탕자의 귀향 -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1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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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헨리 나우웬)

내 인생 최고의 책!!

*주의사항(경고)
°신앙인 으로서의 자신의 민낯을 볼 자신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읽지 말것
°마음의 동요대로 따를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읽지 말것
°거룩한 죄책감과 고뇌에 빠질 자신이 있는 사람만 읽을것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읽을것
*그러나 모든 신앙인이 읽기를 바람
(특히 열심히 순종하며 따랐노라 하는 자)

헨리 나우웬은 국제적인 강사,교수(노트르담다,예일대,하버드대),성직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인간의 마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노력했으며, 자신의 아픔과 상처,불안과 염려,기쁨과 우정을 여과없이 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와, 감동을 준
상처입은 치유자 이다.

'탕장의 귀향'은 누가복음 15장11절~~ 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의 얘기로써 이내용을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이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으로 만들어낸 깊숙한 공감감에 탁월하며 그 안에서 부각되는 모델의 표정들을 너무도 현실적으로 표현함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담고있다.)
헨리나우웬이 이 그림을(포스터)보고 영적 고뇌에 빠진 상태에서 큰 깨달음을 얻으면서 쓴,두 아들과,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의 영적 3단계를 보여주는 훌륭한 신앙 안내서 이며, 가정에서의 부모의 위치와 역할을 보여주는 아주좋은 자녀 양육서이다.

-<탕자의 귀향>을 처음 봤을때, 저는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습니다. 죽을 만큼 피곤했습니다. 불안하고,외롭고,초조하고,말할 수 없을 만큼 갈급했습니다.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엉엉 울고 싶었습니다.~~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안식을 약속하는 유혹의 목소리가 들릴때 마다 여지 없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우연히 렘브란트의 '탕자'와 처음 맞닥뜨렸을 무렵, 내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그 그림은 당시 고된 행군을 마치고 돌아온 내가 바라는 모든 걸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실 나야말로 기나긴 떠돌이 생활에 완전히 탈진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포근한 품에 안기고 싶었습니다. 무엇에도 신경쓰지 않고 쉴 집을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지난날의 내 모습인 동시에 장래의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중-

처음의 시작은 이렇게 우리가 많이 들었던 탕자의 비유에서 처럼 헨리도 집나간 둘째아들 탕자가 자기라고 생각했으며, 이제는 모든걸(명예, 관심, 인정받는것) 내려놓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 했지만, 그는 '탕자'의 원작을 본 뒤로는 그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하고,우리에게 일깨워 주지 못한 부분을 깨닫고 일깨워 준다.
자신은 집나간 둘째아들인 탕자 였으며, 지금은 첫째 아들인 집에서 온전히 부모의 뜻을 받들며 순종한, 책임감에 짖눌려 감히 탕자 처럼 뛰쳐 나가지도 못하는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아들에 더 가까우며(교수로서 유명 강사로서 대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 이제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와 성숙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두 팔을 벌려 집나간 탕자를 한없이 기다리는 아버지가 되라고 하심을 깨닫는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달라하며,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났다가 먼 지방에서 방탕하게 살다 길을 잃은 작은아들뿐만 아니라 고향에 머물던 아들 역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겉으로는 어른이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잘해낸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부친을 잘 섬기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지만 큰아들은 날이 갈수록 불행하고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탐욕스러운 작은아들보다 이 냉혹하고 원망과 분노에 차 있는 남자와 더 비슷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맏아들에게는 부모의 기대에 맞추어 살며 그 뜻을 잘 따르고 효도하는 자식이라는 소릴 듣고 싶어 하는 특유의 욕구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정한 의제에 순응해서 거기에
합당한 일들만 골라 하면서 한쪽 구석에서는 어째서 탕자처럼 '달아날' 용기를 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의 상실감과 작은아들의 방황의 삶,
둘 다 치유와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둘 다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둘 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회심을 찾자면 아무래도 집에 머물고 있는 이가 돌이키는 경우를 꼽아야 할 겁니다. -
- 본문 중-

한두 가지도 따라해볼 엄두 조차 내지 못하는 까닭? 무엇일까?

나도 탕자의 귀향에서 저자처럼 어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부당하다 생각 했으면서 왜? 내 자신이 큰아들이라는 생각을 못했을까?
집에 머물면서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놓고, 의무가, 책임이 너무 막중하다고 징징 거렸다.
모든, 쫌 믿음 생활 했다는 신앙인들은 그럴 것이다. 내게 주어진 많은 임무(구역장,지역장,봉사부서),책임감과(새신자를 챙겨야 하고, 나이드신 분들을 섬겨야하고),무조건 순종하고 따르라는 교역자 사이에서 내 믿음을 지키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난 과감하게 핑계를 대고 내 사명과 의무를 놓아버리고 요나처럼 외면하고 도망쳐 버렸다. 탕자처럼 집을 나갈 용기는 없어서 집 안에서 나름 변명을 하고, 투덜거리며 파업을 하고 있다. 직분도 봉사도 모두 모르는 척~~ 다시 초신자로 돌아가 한없이 사랑을 받고만 싶어졌다.
마리아와 마르다에서 내 모습이 마르다 인듯 하였다. 너무도 분주해 지쳐버린 마르다.
예수님 옆에서 열심히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 말씀 경청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분주하고 바쁘게 일하는 마르다, 스스로 일할것을 선택했음에도 불평과,불만으로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를 질책하는 마르다~~ 예수님은 얘, 놓아두라고 각자 좋은것을 하는게 마땅하다 하신다.

교회에는 마리아와같이 말씀을 듣는 (초신자)
자도 필요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마르다와 같은(신앙의 연도가 오랜)신앙인도 필요하다.
신앙의 연륜에 따라 향상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초신자에 머무를 수 없으며
한층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서 초신자들을 보듬고 섬기며,세상가운데 나가서 두팔 벌려
그 사랑을 전해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그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안다.
그렇기에 아직 초신자에 머물러 사랑을 받기만을 바란다.
헨리도 그렇다고 고백을 한다.
이제 아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한단계 더 올라가 아버지의 자리에 앉으라는 말씀에 두렵고 자신 없어 한다.

-내속에 큰 아들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다. 숨길수록 내면의 큰아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신앙의 연도가 깊어갈수록 큰아들의 마음을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사는것,
아버지라는 이름에.... ~~~~
그러나 곁길로 나간 작은아들이나, 성을 내는 큰아들이 되는 쪽이 훨씬 편해보입니다.-
-본문 중-
그러면서도 이렇게 고백 한다.

-청춘은 흘러갔으며, 여전히 어린아이의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스스로 노쇠했고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는 진실을 덮으려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성인으로서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동시에, 오직 삶의 여정 속에서 다치고 깨진 이들을 반가이 환영하며 잘잘못을 따지거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데서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온다는 사실을 과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문 중-
(모두다 초신자로 사랑 받기만을 바란다면 누가 세상가운데 나가 두팔 벌려 안아줄 것이냐고.)

그러나 그 두 아들은 다 우리들 이었으며, 하나님 이셨다. 한 없이 철부지로 방황하는 작은 아들도 조금은 성숙해졌다고 의무를 다하며 힘들어 하는 큰아들도 다 우리의 모습이며 예수님의 모습 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와 동등됨을 취하셔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지친 젊은이의 얼굴에서 아기 예수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저 쇠약한 청년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사람들과 같이 " (빌2:6-7) 되신 분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버지가 맡기신 것을 죄다 팔아치웠습니다.~~
차츰 내가 소유한 아들의 신분과 그리스도가 가진 아들의 지위가 하나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내가 고향을 다시 찾아가는 것과 예수님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내 집과 주님의 집이 하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기쁨을 힘닿는 데까지 '훔쳐다가' 남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쳐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두려울 만큼 어둠이 짙을 때도 빛을 선택하고,죽음의 세력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데도 생명을 선태하며, 거짓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도 진리를 택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둠은 언젠가 깨끗이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슬픔을 모두 없애주시지는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복판에 하나님이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기쁨의 나라에 속한 자녀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아들의 신분을 되찾았으면 이제는 아버지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은 용서하고, 화해하고, 치유하고,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내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비록 지금은 작은아들인 동시에 큰아들의 처지이지만 한없이 그 모습에 머물러서는안 되며 아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들딸 시절을 거치지 않고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과정을 밟아야 하지만, 영적인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 문 중-

교회에는 세상에는 더이상 작은아들이나 큰아들이 더 필요하지 않으며, 회심하고 돌아왔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고,
이제 늘 손을 내민 체 살며 한시바삐 아이들이 돌아와서 그 어깨에 손을 내려놓고 쉬기를 학수고대하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아이가 성장하면 어른이되고 부모가 되듯이
올바른 신앙이니 되는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피할수 없는 관문이다. 언제나 피터팬으로, 키덜트족으로 살 수 만은 없으니.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
다시 집을 뛰쳐나가는 탕자가 되거나, 집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큰아들로 돌아갈 것 만 같아 자신이 없어진다.

그런 우리에게 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부모의 단계를 갈 수 있는 지 가르쳐 주셨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처럼 될 수 있까?-
누가복음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서 자신이 받은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거룩한 자비를 베풀도록 초청하라 하십니다.
아들로서, 상속자로서, 후계자로서 권한과 의무를 통째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을 말씀 하십니다.

°첫번째 방법은 거룩한 자녀들이 벌이고 있는 엄청난 탈선 행위를 하나님의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절절한 슬픔에 눈물을 쏟으며 울부짖으라 하십니다.

°두번째 방법은 끊임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건 힘들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적 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4)

°세번째 방법은 너그러움 마음을 품는 겁니다.
떠나가는 아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것을 다 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며 온갖 선물을 퍼부었습니다.
자신을 준다는 것은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저절로 생기는 품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옮겨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본문 중-

헨리는 두렵고 떨리며 힘들지만 이렇게 한 걸음씩 내디뎌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가겠노라
고백한다.
나 또한 이제까지 권리만 행사하려하고 의무는 피해갔던 제게 크나큰 떨림과 울림을 받았다. 지금까지 신앙적으로 방황하며
헤매였던 이유를 찾았고 해답을 찾은듯 하다. 아직은 두렵고 떨리고 자신이 없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함을~~

*이책을 읽으며 신앙에 있어서 많은 위안과 깨닫게 된 것도 많지만 지금의 내 위치에서
(사춘기의 자녀를 키우는 입장) 좋은 양육 지침서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다.

《자녀 양육 지침》

1.비교하지 않는다.
탕자의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 아들을 비교하지 않고 서로의 있는 성향 그대로를 받아들 였다. 각자 걸어온 삶의 여정대로 온전한 사랑을 쏟았다
작은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즉각적으로 잔치를 열었으며,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는 뛰어 나가 반기며 함께 어울려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자고 초대해 그 마음의 서운함을 달래 주었다.

2.각자의 특성을 인정한다.
아버지는 아들들의 저마다 가진 각자의 독특한 은사와 부족한 점들도 꿰고 있었다.
큰아들은 소심하고 열정이 부족해서 생동감이 모자라는 것이 아쉽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큰아들에게 잣대를 들이대지 않은 것처럼 작은 아들에게도 낫고 못함을 가리거나 더하고 덜함을 재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두 아들이 가진 독특한 특성에 맞추어 반응했다.
큰아들에는 그가 집에서 만족감을 느낄수 있도록 집안 일을 담당하게 했으며,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강하고 열정적인 둘째는 그의 뜻대로 세상을경험하게 해주었다.

3.강요하지 않는다.
작은아들이 방탕하고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올 줄 알면서도 그를 강압적으로 제재하지를 않았다. 아무리 얘기를 해봐야 스스로 경험하고, 깨닫고 느끼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큰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불평 불만에도 자신이 얼마나 큰 아들을 사랑하는지를 알아주기를, 또한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4.기다려준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집을 나갔을때 그가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때까지 문밖에서, 늘 그자리에서 한없이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아들이든 큰아들이든 기대하는 건 단 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 뿐.

5.비난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큰아들이 거칠고 모질게 대들어도 비난 섞인 꾸지람으로 맞서지 않았다.
되받아 치지도, 잘못을 꼬집는 법도 없었다.
아들의 비난에도 변명하지 않았을뿐더러 큰아들의 처신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모든 평가를 단숨에 뛰어넘어 곧바로 친밀한 관계를 강조 했다."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무조건 적인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 었다.
작은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도, 질책이나,꾸지람이나, 그어떤 경위도 묻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기며 기뻐하고 잔치를 벌였다.

6온전한 사랑을 쏟는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므로 강요 하지도 ,속박 하지도, 밀어 붙이지도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그 사랑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든지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이었다 온전한 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자녀들이 자유로워 지기를, 자유로이 사랑하기를 바랄뿐이다.
아버지는 집에 팔짱을 끼고 앉은 채,자식이 돌아와서 탈선행위를 사죄하고,용서를 청하며,
앞으로 잘 살겠다고 약속해 주기를 기다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집 밖으로 찾아다니고, 위엄 따위는 내팽겨치고
달려나갔다. 사과나 개과천선을 약속하는 말에 집착하지 않았다. 잔치상을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손을 잡아끌었을 뿐이다.

7.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탕자의 비유는 해피엔딩으로끝나지 않았다.
선택의 몫은 오직 두아들에게 넘겼다.
작은 아들이 잔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큰아들이 동생의 잔치에 참여했는지, 모든것을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들였는지 알 수 없다.
그 판단과 선택은 누구도 해줄 수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본인의 몫임을

8.부모로써 신뢰를 주어야 한다.
집나간 탕자가 집으로 돌아 올 수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자기를 받아줄 거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망과 질책과 꾸짖기만하는 아버지가 있는 집이라면 결코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문밖에서 두 팔 벌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에 감히 돌아갈 용기를 낸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아버지가 계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나를 끌어안고 따뜻하게 품어주실 하나님 아버지~~~

헨리는 주님은 그 품안에 안긴 자녀들을 하나하나 특별하고 온전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한다.
탕자의 비유는 나를 만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찾아다니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죽음의 권세에 의지하지 말고 그토록 소원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거룩한 팔에 몸 맡기라고 하나님이 권면하고 간청하고 사정하신다고.

이제는 방황을 끝내고 돌아가야 할 때인것 같다. 더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을것 같다.
내 영혼은 매우 지치고 곤하여 더이상 떠돌기에는 모든걸 소진했다.
이제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할 때임을~~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하나님께서 묻고 기다리고 계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고 다만 축복하고 용서해줄 아버지 께로의 "귀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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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김신회 지음 / 놀(다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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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위로와 따뜻한 말이 필요할 때*
살다가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지? 하는 궁금함이 생길 때, 어디에 물어보기도 뭐하고 물어볼 곳도 없을 때, 그럴 때마다 훌렁훌렁 넘겨보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책! 보노보노는 6권으로 된 일본 만화책이다. 작가가 워낙 보노보노의 광팬이라 보면서 느끼고 깨달은 생각들을 소소하게 자기 이야기와 함께 가볍게 풀어쓴 이야기다. 읽기에 부담도 없고 아무 곳이나 쫙 펴서 읽어도 되고, 잔잔하고 가벼운 내용이라 읽기 좋지만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하고, ‘그래! 나, 잘 살고 있구나’하는 안도감과 ‘이렇게 한 번 살아볼까?’하는 새로운 마음가짐, 뭐~~ 그런 나도 나야~~ 하는 자존감이 생기게 된다.

-본문 중-

*진정한 위로는 내가 받고 싶은 위로야*
“다 괜찮아질 거야~~”, 어떻게 힘을 내야 될지 모르겠고, 언제 괜찮아질 지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런 말은 폭력이다.
그럴 때는 “야, 진짜 열받겠다.” 같은 말이 더 와닿는다.

*가족이란, 모르는 것투성이*
*인생이 꼭, 재미있어야만 할까?*
아무 일도 없다는 건 좋은 거구나.

*야옹이형, 살아가는 건 점점 망가지는 일이야. 아무도 그걸 막지 못해*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걸 만들 수밖에 없어. 하긴 새로운 건 다 쓸데없는 것들이지. 하지만, 쓸데없는 것 때문에 불행해진다면 그 불행 역시 쓸데없는 거라는 걸 난 알아. 그렇다면 그게 또 행복이겠지.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잘 들으렴 보노보노, 재미있는 게 끝나는 이유는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을 반드시 끝내기 위해서란다. 잘은 모르겠지만, 오늘도 재미있는 일이 시작된다! 분명히, 그럴 거야.

살다가 마음이 허할 때, 무료할 때, 심드렁해질 때, 겁나고 무서워질 때, 슬플 때, 누군가 너무 미울 때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훌렁훌렁 책장을 넘겨보세요. 보노보노와 그 친구들이 토닥거리며 같이 화를 내고 욕을 해줄 것 같다. 이제 좀 안심하고 곤란해할 수 있겠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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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출코드 학평기출문제집 영어영역 고2 독해 (2017년) - 2017 학평 대비 다빈출코드 학평기출문제집 (2017년)
능률영어교육연구소 지음 / NE능률(참고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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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출코드 학평기출문제집 영어영역 어법어휘 (2017년) - 2017 학평 대비 다빈출코드 학평기출문제집 (2017년)
능률영어교육연구소 지음 / NE능률(참고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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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머클라비어
야스미나 레자 지음, 김남주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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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머클라비어(야스미나 레자-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

-함머클라비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29 B플랫 장조. 베토벤이 거의 1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곡 으로 작품의 길이가 50분 정도 된다.
1악장- 알레그로, 거부할수 없는 박력과,
웅장함.
2악장-짧은 스케르초, 나긋나긋하며,
경쾌,발랄
3악장-아다지오. 우아하고 매력적이다.
마지막장-푸가형식,복합적느낌으로
낭만적이다.

-함머클라비어-
19세기 제작된 피아노 포르테.
이탈리아어로 현대적으로 개량된 피아노를
뜻하는 피아노 포르테를 독일어로 옮긴 것.

제목을 보면서 작가가 왜? '함머클라비어'라고 지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나에게 클레식 음악이란 넘사벽 아무리 노력을 해도 '좋네 '그이상의 감상평을 하기가 어려운 장르다.

책을 읽으며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를(5번) 감상하며 읽으니 조금은 제목을 이해할 듯 했다.
야스미나는 유대계 이란인 아버지와 유대계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만큼 감성이 풍부하고, 클래식에도, 미술에도, 문학에도 뛰어난 감성을 지녔다.

이책은 44편의 짧막한 에피소드의 자전적 소설이다.
44편의 이야기 속에는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
처럼 삶의 희,노.애,락 이 들어있다.

*<희>2악장 - 나긋나긋한 스케르초
"눈부신 미소"에서 딸의 앞니가 모두 빠진 공간을 드러내며 활짝 읏는 모습에서, 매력적이라 느끼며 "난 네 이가 정말 좋아" 그 찰라의 순간들을 그녀는 놓치지 않으려 웃는다.
"투덜이 소녀"에서는 일곱 살짜리 딸과 함께 작은 이야기책을 만들면서 죽이 잘맞다고 혼자만의 생각을하며 그 찰라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 간다.

-알타는 웃는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빨이 빠지는 구강 상의 성장단계를 그렇게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건 분명히 아는것 같다.-

*<노>1악장- 역동적
"어떤 꿈"에서 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 베토벤을 만난 얘기를
통해서 베토벤이 자신의 함머클라비어의 아다지오 부분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냐며
화를 내는 모습에서는 베토벤의 다혈질 적인 면을 볼수 있다.
또한 "포르트 샹페레"에선 남녀가함께 차를타고 포르트 샹페레를 가는 중 남,녀의 실존적인 면에서의 차이 때문에,다름을 느끼며 육탄전을 버리듯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이 그 비극을 파헤쳐 분석했을 때도, 그들 두 사람이 애정에 찬 마음으로 각자의 변명에 유머 한 방울을 더하기로 동의했을 때도,(위고가 백퍼센트 잘못했다고 인정했을 때) 두 사람에게는 여전히 뭔가가 미진한 채로 남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또 다른 포르트 샹페레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애> 마지막장 -푸가형식, 낭적이며 종합적. "일그러진 함머클라비어"," 데스마스크" "어느아침", "마문", "현재를 초월해" 서는 삶의 종합, 결론을 보는것 같다.

- 마문은 너무나도 연약하다. 결코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말없는 깃털.~~그녀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요란스럽게 아녕하세요,를 외치고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베토벤의 마지막 악장은 낭만적으로 느껴지지만 삶에 있어서 낭만은 모든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 까? 죽음도 희망도,잊혀진 이들의 슬픔도 포함되는것 같다.

* <락>3악장- 매력적인 아다지오
"가엽은 크로체이크", "슬픈 언덕",
"뤼세트 모제스","목걸이" 등을 통해서 그녀의 우아하고, 고상하며, 품위있는 일상들을 볼 수 있다.
그녀의 지적이며, 매력적이리 만치 자신에 찬 삶들이 질투가 날 정도다.

-이틀 후 나는 봉마르셰 백화점에서 여성판매원의 상술에 홀려 긴 진주 목걸이 두 개를 걸고 그곳을 나선다.~~친구 세르주와 블레옐 홀에서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베토벤 초기 소나타를 듣기로 했다. 새로산 목걸이를 하고 가면 어떨까?...-
-나는 가브리엘이 연구 중인 에에 세제르의 책을 뒤적인다. 여름이 지나가는 이때 가브리엘이 우리가 있는 스위스로 와서 함께 며칠을 보내고 있다.~~ 일정 나이를 지난 남자들에게서는 시간에 대한 무심함이 있다.
나도 갖고싶은 그런 무심함이.-

위의 평?들은 온전히 내 주관적인 생각, 느낌이다. 다소 억지스러운 짜맞추기식 평이긴 하지만 왠지 이렇게라도 억지스럽게 쓰고싶게 만든건, 그녀의 지적인 매력에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30초간의 침묵" 에서 그녀가 경멸했던 소위 "안다 박수를"(한국 사람들이 연주회에서 1악장이 끝나면 감동을 느끼기도 전에 악장이 끝날때 박수 쳐야하는 걸 난 알고 있지 하며 제일 먼저 아는체하며 무조건 박수 치는 사람.
요즘은 감정을 흩뜨린다고 박수를 안치기도 한다.) 치는게 나일지라도.
난 그 천박한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

-마지막 대사가, 마지막 음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들의 거친 함성을 내지르고 싶어서 조바심을 치는 거야. 합법적인 자신들의 요란한 함성으로 연극의 마지막 한숨을 뒤덮고 싶어서, 자신들의 역겨운 자유를 세상에 공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거야-
-30초간의 침묵 중-

내가 이토록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그녀는
스스로 삶에 맞서고 있는 것일게다.
잊혀져 가고, 사라져 가는 시간과 추억들에
존재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고자 한 몸부림 인지도 모르겠다.
얘기 곳곳은 통쾌하면서도 슬프고 애잔함은
프랑스 문학적인 암울함이 있고, 해학이 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방법대로 시간에 내쫓기지 않으려고 애를쓰고 있다.

- 나는 과거 어느날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 어느 날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무관심한 이 두 순간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존재하려 애쓴다.-
-나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을 수가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결국 어떻게 행동하든 나는 결국 죽을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하고 싶다....
나는 더 나아가고 싶다.
나는 더 길을 잃고 싶다.
<참을성에 대한 공포 > 중

그녀는 어쩌면 시간을 뛰어 넘고 싶었는지도,
지배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려는 글을 씀으로 맞섰는데, 난 무엇으로 맞서야 할지를 깊이있게 고민해 봐야 겠다.

프랑스 문학은 언제나 너무 어렵고 심오해서 늘 부담스러웠는데 함머클라비어는 나에게 그 부담감을 완전히 덜어 주었다.
아주 짧은 내용에 얇으며, 그녀 주변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읽는 재미로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깰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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