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갤러리 플래닛, 몸 꽃 Blooming Made, 2025.05.28-06.27
왼쪽부터 허보리, 나무 추상1, 무꽃 추상2, 노랑 추상 연구, 파랑 추상 연구, 분홍 추상 연구, 작은 꽃 16 2025.
청담 갤러리 플래닛에 다녀왔다. 허보리 작가가 제주에서 붓으로 채집한 꽃 그림이 걸려있다. 경희궁 근처 최정아 갤러리에서도 비슷한 그림으로 단체전하고 있다.
이런 작품은 학술적인 어휘로 평하면 그림을 정당히 대우를 하는 게 아니다. 꽃밖에 없는 화면에 꽃을 눈으로 감상하는게 전부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면 된다. 사상가의 현학적 분석은 잠시 정지하고 그냥 작가가 하자는대로 따라 걸으며 그림을 그 자체로 느껴야한다.
이런 꽃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식물을 대상이 아닌 동료로서 대하는 것 같다. 꽃들은 말을 하진 않지만 고개를 돌리면 늘상 거기에 있다. 중산간을 달리다 마주친 유채밭처럼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 낯익은 생명의 소란함. 허보리 작가는 제철 꽃들이 아우성대며 자신을 봐달라고 하는 그 소리없는 외침을 듣고 매일 캔버스에 일기로 기록했다.
햇살에 따라 기울고, 바람에 따라 고개를 돌리는 꽃들이 흔들거리며 일렁이는 감각을 붓의 반복적 스트로크로 표현했다. 반복은 사람에게 노동이나, 그 무념무상의 노동을 통해 나는 시가 된다.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붓은 생각을 덜어내고 손은 마음을 대신해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리기라는 인위적인 행동에서 살아내기라는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생의 감각이 바뀌어간다.
작가는 제주 풀밭을 걷고, 숨 쉬고, 손에 흙냄새를 묻히며 살아가는 삶의 결을 그대로 화폭에 들여왔다. 들판은 바람을 담는 그릇이다. 캔버스는 그 찰랑이는 냉수 한 사발을 제주에서 서울로 옮겨온 것 뿐이다.
바람결에 사박사박 흔들리는 연두빛과 연보라 물결이 화폭을 매만지고 균일하지 않은 색채가 비정형의 꽃잎과 함께 번져나간다. 분홍은 분홍 하나로 끝나지 않고, 흰빛을 배기도, 혈색을 띄기도하며, 작가의 붓은 쉼 없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아이보리 아이들과 남청색 꼬마들이 새근새근 숨쉬는 가운데, 덩굴처럼 얽히고 설킨 붓질로 꽃잎 아래의 가지가 아주 알차고 무성하게 피어난다. 허보리 작가는 꽃을 그리되, 그간 주목 받지 않았던 꽃 아래의 가지들도 주목한다.
첫 눈길에 수천 송이 분홍꽃들이 소곤소곤대는 푸르른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다른 꽃 그림과 다르게 꽃술과 봉오리의 입체감을 돋우기 위해 마티에르를 너무 두껍게 쌓지 않고, 오히려 억센 가지에도 물감의 두께를 층층히 얹어 방점을 주었다. 주인공과 스태프를 동시에 주목한 것이다. 화려한 공적 삶과 휘황찬란하 사회적 업적의 이면에 있는 매일의 고단한 살림의 단면과 쿰쿰한 생활의 무늬도 동시에 인정한 것이다.
부드럽고 예쁘고 연약한 여성적인 이미지로 소비된 꽃의 편견을 비틀어 억세게 살아있고 생존하는 해녀와 같은 꽃을 그렸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고난에 흔들려도 흙 속에 뿌리를 박으며 살아온 그런 삶을. 회화도 스스로를 버티며 살아 있고, 그곳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이 모두 담겨있다. 하여, 허보리의 꽃은 식물이면서 동시에 삶, 그리고 사람이다.작업실은 작가에게 깊고 고요하고 자신을 담길 수 있는 우물이다. 그녀도 그 공간에서 기거하고 걷고, 먹고, 자고, 붓을 잡는다. 따라서 작품은 그녀의 분신이자 매번 새로이 자라나 수확을 기다리는 자기 아이덴티티의 일부이다. 그 그림 한 귀퉁이가 사행하는 저기압 기단을 타고 날아와 서울에 잠시 묵었다가 누군가의 거실로 옮겨졌을 때, 미술품이라기보다 하루하루 모은 풍요로운 제주생활의 풍광이 걸린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느끼는 일상적 감동과 그림을 보는 자의 감동은 분리될 수 없다.
작가의 작업은 자기 살림을 짓는 일이다. 꽃그림이 아니라 삶그림. 자기가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함께 숨쉰 풍경만 화폭에 그대로 진실되게 옮겨올 수 있다. 붓끝에는 밥 짓는 냄새가 배어 있고 들풀처럼 질긴 삶의 의지가 스며 있다. 아름다움은 얄팍한 꾸밈이 아니라, 생존하는 자의 기백에서 나온다. 그녀의 회화는 그 기운생동하는 질감의 가장 뜨겁고도 부드러운 표면이다.

왼쪽부터 허보리, <하얀 숲2>를 위한 드로잉, 2025
허보리, 작은 숲 1, traditional cotton fabric, threads, wires, wood, sewing, 2025
허보리, 하얀 숲 2, 2025
참고로, 이런 유화로 그린 꽃은 최근 작업이지만, 초기의 설치예술 작품은 사뭇 달랐다. 가령, 2005년경의 말미잘 베개, 2012년께의 줄줄이 소시지와 텐트, 2015년 무장가장 설치예술과 2019년 언저리의 남성양복으로 만든 K9 탱크 시리즈와 모두 퀼트와 천조각으로 만들어서 부드러운 질감으로 반대의 감성을 표현하려 했고, 2024년 서울대 미술관 무기세 전에 그 K9 자주포가 전시된 적 있다. 물론 마지막에 천조각으로 표현한 꽃도 있었는데, 그 검은 꽃은 마치 균사체같은 느낌이 난다. 이전의 기세와 명맥은 여전히 있다.
K9 작품 참조: https://www.hurboree.info/installa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