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미술관에 다녀왔다. 도상(길 위의) 추상전시가 엊그제 열렸다. 9.14까지 하니 시간은 넉넉하다. ISEA 국제학술대회와 함께 1주일 남짓 잠깐 열었다가 급히 폐막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5.23-29) 전, 올해 상반기(2-5월)은 무기의 시대(무기세)전이었고 작년 이맘때 중반기 전시도 이번과 마찬가지로 미적 감각과 추상에 관한 주제였다.
언뜻 알 수 없는 것들만 잔뜩 그린 추상회화들인데 붓질, 구성, 색감, 구도 등에서 하나도 같은 작가가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첨예한 시대의 화두를 읽어내야하는 현대예술이거나 미리 미술사를 잔뜩 공부해가야하는 유럽회화 전시라기보다 가서 보고 느끼는 체험이 중요한 전시다. 물론 그 체험은 이머시브전처럼 직관적이고 유희적인 것은 아니고 명상적이고 지적이다. 작품을 응시하는 동안 검실거리는 내 마음 저편 어딘가에서 움직이는 또 다른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시간이 관건이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아시아 최초로 스웨덴 영성추상작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고전이 열리고 부산으로 순회전시를 가운데 전시 서문은 그녀의 이름을 빌려와 영계의 하이마스터와 대화한 기록이라고 추상의 의미를 잠시 세워둔다. 강릉솔올에서 전시한 아그네스 마틴의 단색화를 빌려와 고요한 순수함의 느낌을 빌려온다. 칸딘스키와 노자도 언급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지혜로운 옛 사람들의 말을 빌려오지 않아도 추상회화는 그 자체로 단단하게 서 있는 자명한 진리다. 회화 앞에 대면한 관객은 마치 작가가 세상앞에 우연히 자기를 내던짐으로서 실존한 것처럼 회화 앞에 갑자기 내던져진 자다. 자기가 설정한 네비대로 저 멀리 죽음으로 가는 와중에 그림도 주어져있고 존재도 주어져있으니, 특별한 목적 없이 툭, 하니 기투된 자로서 회화의 숨결을 느낄 뿐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여러 추상회화가 있고, 모두 영성, 추상, 단색, 명상, 서정 등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단 하나 결을 달리하는 작품이 있으니 이창원 작가의 숨쉬는 반사(Breathing Reflection)라는 제목의 LED 설치작품이다. 조명 자체를 회화로 차용해 반사, 투과, 발광을 조형적으로 실험하는 작품으로 제임스 터렐이 강하게 생각난다. 하지만 색의 층위나 조명의 각도에 따라 변화의 정도가 확연하고 아크릴 페인트와 합판의 사용이 장난감같은 느낌이 있어 터렐의 Wedge같은 압도적인 성스러움은 없다. 외려, 귀여운 성스러움 같은 아이러니한 느낌이다.
최근 한강진 페이스 갤러리에서도 시간당 20명 제한, 코스당 10명 제한으로, 찰칵 찰칵 사진찍는 방해 없이 제임스 터렐의 작업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끔했다. 나의 첫 제임스 터렐은 뮤지엄산이었고,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사실 거대한 빛의 공간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 황홀한 경험을 못 잊어 이후에 특별 호라이즌룸도 신청해서 저녁 17시에서 18시까지 대략 40분동안 깨끗한 원주의 하늘에 엷은 청현색 땅거미가 어둑하니 내려앉는 시간을 스카이스페이스에서 감상한 적도 있다. 터렐관 예약자 전용 스카이스페이스의 테라스 앞에는 오크밸리 골프장의 진록색과 취람색 필드가 널찍이 펼쳐져 있었고 모두가 퇴장하고 비어있는 뮤지엄 산의 까마반드르르한 야경을 걸어 돌아오는 것까지 포함해 참 따스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터렐의 간츠펠트나 웨지와 처음 마주하는 많은 이들은 마치 빛이 빛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 들어선 것 같은 신묘한 감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벽도 창도 없는 무채색의 공간에서 빛이 마치 온몸을 감싸는 듯한, 아니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만 같은 느낌. 그때의 푸른빛도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이 어스름하게 물드는 저녁, 개와 늑대의 황혼의 시간, 그 극도로 얇은 틈새에만 피어오르는 빛깔이다. 얇은 박막같이 퍼져있는 색이 이 서서히 시야를 점령한다. 분명히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눈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모르고, 정체모를 불안함보다는 잊고 있던 평온이, 시끄러운 도시의 번잡함이 아니라 온유한 공기의 잠잠함이, 밀려드는 불면을 다독이는 소리 없는 다정함이.


제임스 터렐의 빛은 존재의 가장 얇은 피부에 살며시 입맞춘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데, 물질로서 빛이 아니라 물질이 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것이 눈 앞에 있다. 형체도 소리도 없이 스스로를 감지하게 하는 빛의 현존이 밀려온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그냥 왠지 내 안 어딘가에 작은 평온의 윤슬이 자리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렇게 참 안온한 일일 수 있다니.
터렐의 공간 안에서 우리는 빛을 본다기보다 빛에게 보여진다. 사방을 가득 채운 청명한 색의 숨결은 우리의 감각의 주도권을 되찾아 다시 우리에게 되묻는다. 현대예술의 사색가이자 수행자인 터렐의 투명한 질문. 정말 보고 있었니?
그렇게 터렐은 관객의 눈을 빌려 지각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탁월하다. 익숙하다고 믿었던 빛의 감각을 완전히 다시 짜 맞춘다. 그 세계에는 도식도 중심도 없다. 오직 밀도와 약간의 망설임만 있다. 노자의 구체적인 구절이 생각난다.
道沖而用之或不盈(도충이용지혹불영)
淵兮.似萬物之宗(연혜.사이만물지종)
도는 비었으나 아무리 써도 차오르지 않고
그윽하도다 마치 만물의 으뜸인 것 같다

빛이 입자도 파동도 아닌 숨쉬는 존재, 혹은 도라는 것은 이런 느낌 같다. 탄닌감이 가득한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난 뒤 입 안 가득 짝짝거리며 퍼지는 미세한 떫은 맛의 차오름. 혹은 고소하고 구수한 빵 굽는 냄새가 동네를 감싸안는 느낌. 그렇게 무채색 벽에 투사된 선홍빛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홍조를 띤 보랏빛으로 스며들 때, 우리는 실체 있는 무언가를 육안으로 보는 느낌이 아니라 빛이 스스로 되는 것을 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미술이 반드시 실제 대상을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을 치료해준다. 터렐은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다. 유명하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직업이 아니고, 삶의 태도다. 그는 색을 칠한 것도 형태를 새긴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의 방 안에서 평화를 느낀다. 그는 직업종교인도 아닌데. 그 앞에서 울고 웃는다. 이 불가해한 감정의 기원은 우리가 일상에서 외면하던 감각에 몸을 맡기면서 찾아온다. 빛의 무게, 색의 체온, 공간의 숨결.
하지만 그 방엔 본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눈은 너무 바쁘다. 그러다가 시각중심의 감각경험이 구겨진다. 눈앞에 번지는 빛은 도무지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 덩어리를 보고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중얼거리지만, 사실은 아무도 뭔지도 모르면서 우러러본다. 서커스나 뮤지컬의 잠시잠깐 스펙타클이 휘발되는 것처럼 가볍지는 않다. 뭔가 단단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렇게 터렐이 교묘하듯, 이창원도 교묘하다. 터렐의 벽보다는 작은 합판에 반사된 색과 빛이 사람의 인식을 벌거벗긴다. 빛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뭉게뭉게 일어난 감정이 자신이 보고 있는 작품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리고 진짜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앞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진짜라는 착각만 진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보고 왔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경험은 정말이었으니까. 인식론과 존재론을 몰아붙이기 위한 조용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좀처럼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나가면 다시 경험할 수 없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지만, 사진으로 그 순간의 느낌이 다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빛은 더 이상 조명의 일부가 아니며 원근감을 주기 위한 인상화의 실험이나 구상화의 배경도 아니다. 존재 자체다. 음악이 악기의 울림통을 벗어나 청중의 내부로 파고드는 것처럼 존재 전면에 서서, 시각을 넘어서 내면의 청각과 촉각에 지워지지 않는 파장을 새긴다. 예술의 미학적 범주를 확장시킴으로써 끝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느끼는가에 대한 질문이 여운처럼 남는다.
사람들은 제임스 터렐을 사랑한다. 그의 무해하고 안온하고 종교적이지 않으면서 성스러운, 빛의 방 안에서 우리는 세상에 적응된 눈을 잠시 감고, 태초의 빛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어둑한 수공간에서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서서히 퍼진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방식으로 본다는 행위를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추가)
이창원 작가의 작품도 실루엣은 마치 부서진 토템처럼 서있는 가운데
뒤에서 어둠이 번져나오다 음영의 이음새를 매만지며 둥실하고 빛이 떠오른다.
이 빛이 진짜 주인공이다. 단단한 실체의 가장자리를 타고 난반사되는 이 빛은
청자 위에 물든 새벽 안개처럼 새륵새륵 거린다.
안개가 낮게깔린 에메랄드빛 호수처럼 부드러움을 갖춘 음산함이다.
번쩍이는 주황빛 번개
비온 뒤 물방울에 적셔진 포도껍질처럼 부드럽고 무광택 보라색
석류껍질 벗기기 직전의 금홍색, 우유를 섞은 유백색의 살구빛, 달콤씁쓸한 아마레토 시럽같은 금빛이 붉은태양과 감황색 사막의 모래언덕 사이로 휘몰아쳐 빛의 체온을 느끼게한다.
혈색이 감도는 핑크빛 피부의 미세한 온기가 모두 미끄러져 실루엣 사이로 윤곽과 빛을 흐리며 무화시킨다.
음영. 빛은 그림자와 대척점에 있지 않다. 빛은 그림자를 몰아내는 회초리가 아니다.
그림자와 함께 어깨를 겨누도 빛 자체의 파형을 끌어안은 조형물이다.
과일 젤리가 가득찬 유리병의 디저트 같은 느낌의 작품도, 새벽녘 일출이 걸린 산 봉우리 같은 작품도, 우리네 산 능선을 수평선으로 표현한 듯한 작품도 있다.
붉은 귤껍질처럼 질감있는 탁한 주황색에 버터를 발라 연한 노랑감을 주다 다시 유약바른 청록색 자기색에 복숭아빛 핑크처럼 흘러간다.
서서히 빛의 스펙트럼이 전이되는 구간이 아이 손에 아이스크림이 녹아가는 어느 불 꺼진 후의 하늘에 남은 잔광처럼 따뜻하다.
슬쩍 번져있는데, 번져있다는 말은 색이 직선적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수채화에서처럼 종이 위에 물을 떨어뜨리고 난 번짐과 울림과 머뭇거림이다. 이 오묘한 시간의 자취 속에 빛이 스스로를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