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중한 성공회 사제이자 여자인 Fleming Rutledge가 쓴 By the Word Worked는 세미나리에서 진행된 강연을 바탕으로 쓴 세 부로 이루어진 짧은 설교집이다. 인간의 도덕적 결함이 신의 행위를 무효화하지 못한다는 고갱이로, 특히 성례의 효력이 집전자 개인의 윤리적 상태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제목은 라틴어 ex opere operato의 직역이자 핵심논제로 2부에서 집중적으로 논한다.


읽는 중에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흥미로운 책이 떠올랐다. 부르디외의 제자로 문화사회학을 연구하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이자 여자인 Gisèle Sapiro가 쓴 책, Peut-on dissocier l'œuvre de l'auteur, 작품을 작가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다. 창작자의 행위와 작품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를 소비하는 우리의 윤리적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 우리가 신뢰하는건 행위의 순수성인가 아니면 약속의 지속성인가? 에 대해 충돌시켜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정답은 없고 해답만 있다. 접근방식을 더듬어 보는 훈련을 거친 독자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해야한다.


신학자인 루틀리지의 생각은 효력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에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성례를 인간이 수행하는 종교적 행위이 아니라 신이 약속한 방식으로 역사하는 사건으로 본다. 따라서 성직자는 매개자이지 원인이 아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성직자의 치명적인 실수에 의한 도덕적 타락은 성례의 객관적 효력을 훼손하지 않는다. 신자는 인간의 도덕성에 의지하지 않고 신의 약속에서 믿음의 근거를 정초해야한다. 만약 성례의 유효성이 매번 집전자의 상태에 따라 흔들린다면 공동체 전체가 영적 불안정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 지점을 방어하며 실용적인 안정성을 제공하려 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은 작동한다고 말한다.


사피로라면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며 작품은 결코 진공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작품은 생산, 유통, 수용이라는 촘촘히 조직된 네트워크 속에 존재한다. 창작자의 행위는 그 네트워크 안에 존재하고, 작품의 의미를 상호구성한다. 사생활이 문제된 영화제작자 등, 타락한 창작자를 너무 도덕적으로 매도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을 완전히 자율적인 것으로 보는 전통적 시각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 작품을 여전히 소비하는 행위는 그 작가의 상징 자본을 유지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기에 조심해야한다는 것이다. 의미의 생산은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신자를 관객, 성례를 작품, 성직자를 창작자로 일단 거칠게 치환한다면


루틀리지나 사피로나 사람의 도덕적 타락은 권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생겼을 경우 막을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신자=관객은

성직자=창작자라는 인간과, 그들이 행하는 성례=작품을 구분하자는 데까지는 함께 할 것이다.


이후 루틀리지는 성직자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성례는 여전히 지속된다고 주장할 것이고

사피로는 계속 참가하면 창작자의 의미생산 네트워크와 상징자본을 공고히하니 주의해야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둘은 갈라져서 루틀리지는 성직자는 창작자가 아니라 매개자이고, 진정한 창작자는 신이라고 주장할 듯하다.


정리하면 이렇다.


루틀리지

핵심: 성례의 효력

기준: 신의 약속

변수: 인간은 신뢰할 수 없다.

충돌지점: 타락한 성직자가 있다손해도 성례는 지속되고 신자는 영향받지 않는다.


사피로에게

핵심: 작품의 의미

기준: 사회적 맥락

변수: 인간 행위는 의미를 바꾼다.

충돌지점: 타락한 창작자의 작품소비는 관객이 주의해야한다.


이런 입장이 제출되는 까닭은 루틀리지는 효력은 인간을 초월한다 생각하기 때문이고 사피로는 의미는 인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사피로의 입장에서 루틀리지는 한층 더 비판해보자면 제도적 면책 위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


어차피 성례는 유효하다는 논리는 성직자의 도덕적 책임을 상대화하고 권력 남용을 은폐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아가 공동체 신뢰가 붕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례의 객관적 효력과 별개로 신자들은 인간을 통해 경험하기 떄문에 집전자의 타락은 성례의 체험적 의미를 훼손할 수 있다.


아울러 문제가 되는 성직자가 계속 성례를 집전한다면 상징자본과 권위는 유지된다. 문화적 정당성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사피로의 이러한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루틀리지는 이렇게 반박하리라.


은총은 인간의 도덕성보다 더 크다. 만약 성례를 인간 윤리에 종속시키면 구원의 확신이 붕괴된다. 제도와 효력은 구분되어야 한다. 당연히 타락한 성직자는 징계되어야 하지만 그가 집전한 성례까지 무효화할 이유는 없다. 신자의 신앙 보호에 대해서도, 이미 받은 성례의 유효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신앙 자체를 흔드는 일이다.


이런 프레임으로 미국의 가톨릭 아동 성범죄 논란을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의 특종 탐사를 다루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2015)>를 다시 생각해보면 재밌겠다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두 입장은 양립불가능하지 않고 화해시킨 후 이중구조로 모델화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성례는 객관적 효력을 가진다는 성공회 신학자와

그러나 그 의미와 경험은 관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학자의 논쟁이다.


이를 합치면

효력은 신에게서 오지만 의미는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다고 합의가 가능하다.


성례는 유효하지만 타락한 성직자는 공동체에서 배제되어야 하며 신자들이 느끼는 상처 역시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야한다.


아울러 수행성을 경유해 논리를 보강해볼 수도 있다. (요즘 퍼포먼스 전시를 많이 봤기 때문에 생각해본다)

언어행위적으로 성례는 말해지는 순간 발생하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수행은 화자의 신뢰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가


이런 접근으로는 모든 성직자(매개자)를 발화에서 분리시켜 기계적으로 행위자화 시키는 ex opere operato는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다.

관계 네트워크를 맹신하고 모든 창작 소비자가 높은 수준의 지적 윤리적 능력을 지녔다 전제하는 사피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작품과 작가의 완전한 분리도 완전한 동일시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성례는 신의 행위면서 동시에 신뢰 위에 서 있는 수행이다. 즉, 완전한 분리도, 완전한 동일시도 불가능하다. 


신학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사회학은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신학은 신자의 확신을 보호하고 사회학는 윤리적 긴장을 유지한다.


그렇지만 신학와 문화사회학, 즉 종교와 예술은 동일한 문제를 공유하고 비슷한 결의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매개자의 타락이 전달되는 진리를 훼손하는가? 

설교자와 작가는 같은가? 

같다면 작가(창작자)의 사생활문제가 그가 표현하는 작품감상을 방해하는가?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 

우리가 신뢰하는건 행위의 순수성인가 설교자의 아니면 약속의 지속성인가? 


앞서 언급했던 영화 <스포트라이트> 뿐 아니라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소설 보면 되지의 <혼모노>에 수록된 길티 프레져도, 어제 넷플 등 OTT에 대거 풀린 홍상수의 영화들도 이런 프레임으로 톺아보기 좋은 생각의 재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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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자판이 쉬워보이지만 스웨덴어의 å나 프랑스어의 á é ô ç 독일어의 ü 처럼 이상한 모음기호 때문에 까다로울 때가 있다.


일본어는 디폴트로 영어로 시작해서 alt+capslock 히라가나 ctrl+capslock 가타가나로 바꾸어야하는데 이게 은근히 새끼와 약지를 이용하는게 좀 힘들다


중국어는 가끔 꼭 필기로 그려 찾는 한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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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법은 모두에게 통용된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 일부에게만 특별히 잘 적용된다. 전제조건이 갖춰져있는 이에게는 반복가능해서 일반성을 획득할 수는 있어도 보편적이지 않다.


예컨대 고시공부, 화장법, 운동훈련


면벽수행 통암기 기출문제풀이라는 고행 루틴을 따르면 누구나 합격한다고 말하지만 이미 적당한 집중력, 장기기억력, 불안내성, 심지어는 금전적으로 지원되는 쾌적한 생활환경까지 갖춰져 있어야 한다.그 전제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에게는 보편적 방법이 맞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방법이 아니라 압박이다


화장도 특별히 잘 먹는 피부가 있다. 잘 맞는 사람에게는 기적처럼 변신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겐 이유 없는 실패감만 준다


불굴의 의지를 강조하는 스포츠도 유전자, 회복능력, 부상이력, 코칭환경 같은 여러 변수가 있다. 승리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되는데 실제로는 재현 불가능한 조합이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조건을 복제하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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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선재는 탕비실 화장실 보일러실까지 건물 구석구석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흡사 자기 몸을 완벽히 지배하고 있는 숙련된 무용수같다. 근육의 모든 명칭을 알고 의식이 신체 곳곳을 정확히 핀포인트해서 움직이는듯하다.


그러한 공간활용의 장점이 십분 활용된 지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적군의 언어)전은 웅장한 비장미가 강조된 장소특정적 전시였고, 이번 퀴어작가 단체전 스펙트로신테시스는 작가 70명의 작품을 건물 전체에 나누어 현명하게 분산배치한 것이 마치 솜씨좋은 퍼페티어같다.


전시는 지하1층으로 들어가 3층으로 올라와 내려간다. 이번엔 심지어 경비실에 화장실과 화장실 통로까지 전시장으로 삼고, 북유럽처럼 성중립화장실을 만들었다. 화장실이 얼마나 내밀하면서 정치적인 공간인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공간활용 자체를 감상하는 재미도 꽤 있다.


전시장 가서 사진을 안 찍고 상황에만 충실히 침윤하기로 마음먹은지 꽤 되었다. 전문가들이 고해상도 사진을 많이 찍어서 올려줄테고 나는 다녀온 인상을 사진없이 글로만 배설해본다. 排設. 잔치에서 물건을 자리에 맞게 늘어놓는다는 뜻이다.


목천재단 한국현대건축가 구술사 프로젝트 <건축가 김종성 구술집(2018)>에서 아트선재 개관 때 상당한 예산을 고퀄리티 지하 극장 의자 구입에 썼다는 것을 읽고나서 착석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져 방문할 때마다 자본주의의 이로움을 만끽해보곤한다. 건물관리인이 된듯 지하1층의 신기한 동선을 탐험하고나서 3층에서 노빠꾸로 바로 전시의 강력한 테마인 성, 신체, 정체성, 가족구조, 트라우마를 직면한다. 마치 마라맛 치즈등갈비처럼 3층이 가장 강렬한 향취로 자극하고 2층과 1층으로 내려오면서 폭신하고 고소한 질감으로 바디감을 주는 구조다. 모든 작품을 다 다루기엔 어렵고, 여러 전시에서 익히 알려진 작품만 생각해보면 이런 작가들이 있다.


우선, 2층에는 수트케이스 안에 15세기 플랑드르 회화 <수유하는 성모>를 넣은 얀보(Danh Vo)의 작품이 있다. 제작이 2026년이라 하니 이 전시를 위해 만들었나보다. 작품은 캐리어를 들고 이동하는 현대인의 모빌리티 상징하는데 가장 움직이지 않는 고전회화를 넣어 불가능한 이동성의 이동을 다룬 점이 흥미롭다. 베트남어 로마자 표기법 쯔 꾸옥 응으으로 D는 ㅇ이고 Tr은 ㅉ다. 그래서 나트랑 아니고 나짱이고 댄보 아니고 얀보다. 자인보라고 발음하기도 하는데 북부 하노이에서 D는 ㅈ발음, 남부 호치민에서는 o발음이기 떔ㄴ이다. 혹은 욘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덴마크에 4살 때 이주해 독일에서 활동하는 디아스포라 작가다. 작년 리움 현대미술전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은 복제한 자유의 여신상을 250개로 분해해 전세계미술관에 소장시킨 <우리 국민은(부분), 2011-2013>을 만든 작가다. 리움에는 주름부분 구리가 소장되어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미국적 자유민주주의의 파편화된 공유로도 읽을 수 있고, 이주작가의 사적경험을 적용해보자면, 여러 장소를 의식적으로 알지만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이 그곳에 남겨두고 온 정체성의 편린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청주MMCA, 광주ACC, 일본모리, 평창시립아카이브, 청담아뜰리에에르메스 등에서 본 김아영 작가의 작품도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벽화의 암시를 보니 에른스트모와 딜리버리 댄서 구가 퀴어 주제 속에서 재맥락화되어 백합관계로 바뀌어 흥미로웠다. 청주에선 현대 다크호스, 광주에선 거대한 스크린 밑에서 미드저니 기술의 진화, 모리에선 게임의 예술화 등으로 읽혔고 모와 구는 AI와 인간의 야누스적인 이중 정체성처럼 느껴졌는데 이곳의 벽화 캐릭터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매우 표독스럽고 집착적으로 탐닉하는 듯 보여 새로운 접근방식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 컨트롤러를 사용해 플레이하는 전시한정 게임엔진 속에선 열화된 서울 을지로풍 골목길을 배경으로 3인칭 백뷰 싱글플레이RPG를 진행한다.


또, 김경묵 작가가 2015년 병역거부로 인한 독방수감 경험을 VR로 체험하도록 만든 <5.25m2>는 재작년 국현미 한캐나다 교류전 순간이동(2024)에서 본 작품이다. 같은 시기에 올해의 작가상 2024을 받아 VR 작품이 윗층에 하나 더 있었던(옥산의 수호자들) 권하윤의 <구보, 경성을 걷다>와 김진아의 동두천 <미군 위안부 3부작>, 랜달 오키타의 <거리의 책> 등과 함께 놓여 VR기기를 통해 다른 시공간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데 전시의 방점이 있었다. 아트선재 전시에 놓이니 작가가 커밍아웃을해서 독방에 갇혔다는 점이 부각되어 개별 작품이 새로운 의미체계 안으로 흡수되어 의미가 재영토화된다.


나아가, 용산 아모레퍼시픽에서 크게 진행했던 마크브래드포드의 작품도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직접 방문해서 만들었다고 써있다. 흑인이라는 인종, 가난한 하류층이라는 경제계급, 동성애라는 젠더, 이렇게 삼중 차별 구조를 도시공간의 문제의식 속에 녹여낸 작가다. 그러나 아모레에서는 아무래도 대기업의 상업전시다 보니 그의 퀴어성을 전면부각시키기 어려웠다. 헌데 아트선재에서도 딱히 더 부각되지 않았고 의미가 새로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작품 자체가 선언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가 함께한 존재감만이 중요하다.


아울러 마크브래드 포드 벽화 작품 앞으로 바닥에 10여 년 전 국현미 올해의 작가상 2015를 탄 오인환의 녹청색 향가루 설치작품이 보인다.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이라는 작품이고 6년 전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도 보고 여러 번 대중에게 눈도장 찍은 작품이다.


이에 더해 베일로 덮힌 밤의 시공간을 모티브로 삼아 고착화된 정체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야광 콜렉티브(김태리와 전인)의 작품도 있다. 아르코에서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보았고 국현미 과천 젊은작가전에서도 있었다. 과천때가 조금 더 매운 맛이었다.  외면은 치즈퐁듀같이 부드럽지만, 평론에 누적된 고차원적 생각의 흔적은 단단하다.


생각해보니 지하1층에 김초엽 작가의 책도 언급되어있던 것 같다. 어쨌든 이쯤 마무리해본다.


인상파전과 현대예술전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마이아트, 더현대,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을 가는 이와 국현미, 아트선재, 서울시립을 가는 이는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아름다운 이국의 풍경을 보면서 힐링하고자 하는 마음과, 일부러 불편한 것을 보고 익숙한 일상의 문제를 꼬집는 마음이 같은 선에 있지 않다. 이렇게 동시대인보다 한 걸음 앞서서 미래를 사는 이들이 있는데, 산업화 시대에 민주화를 꿈꾸던 이도, 노예시대에 인권을 꿈꾸던 이도, 식민지 시대에 민족주의를 꿈꾸던 이도 모두 자신의 시대와 불화했다. 그리고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100년이 지나면 언젠가 이들도 기득권이 된다는 점. 지금 이렇게 시대에 대해 아파하는 여린 마음들이 훗날 인공지능의 시대에 조부모의 세대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리라. 퀴어 엄빠들은 로봇을 사랑하고 버튜버와 결혼식을 치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때는 인간을, 인간의 몸을 사랑했어! 정말로 비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 그게 맞아? 하면서 되묻게 되리라. 사상이 석화되고 퇴화되기 전에 너도 나도 생동하는 사유의 최전선을 음미해보자. 


모두가 좋아할 전시가 아니라, 일부가 매우 사랑할 전시다. 김이나 작사가의 말을 빌려 재서술해서 말하면, 적당히 사랑받고 정확히 미움받는 시대를 지나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는 나날을 향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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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미안 허스트전은 호불호가 매우 갈리는 전시다. 중간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원본을 8천원으로 국내에서 볼 수 있으니 비행기 티켓 몇 백만원 아끼는 셈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슈퍼스타 슈퍼리치 현대예술가의 기운을 받기위해 많은 인플루언서들이 방문할 것 같다. 나만 인스타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문화가 있는 수요일에 공짜로 본다면 더욱 사람을 몰리겠으니 전시스텝은 론뮤익보다 더 고생할 듯하다.


전시 기획은 직관적이어서 이해가 쉽고 해골 상어 소머리, 세 손가락으로 간결하고 임팩트가 있다. 마이아트나 더현대의 인상파전처럼 배워야할 유럽문화 배경지식이 많지 않아 허들이 낮다.


반면 데이미안 허스트전에 데이는 관객도 다소 있을 성 싶다. 해골 상어 소머리, 세 점 말고는 볼 것이 없다는 아우성이 있을 수 있다. 국공립의 공공성에 대한 논란도 하나다.


나는 기획이 전략적이고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전시가 외화내빈이라고 비판받더라도 티켓은 잘 팔릴 것 같고 소셜미디어의 사람들의 반응도 좋을 것 같다. 유명세는 유명세를 부르는 마태복음 효과를 추종하는 SNS에 경도된 한국사회 아닌가. 론뮤익에서 배운 것 같다. 그 유명하고 비싼 다이아몬드 해골을 실견할 기회를 놓칠 배금주의자들은 적으리라


죽음과 박제라는 테마는 작년 국현미 개관 이래 최다 관객인 53만명을 모은 론뮤익과 연속성도 있다. 론뮤익도 허스트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개인전이었고, 론뮤익 마지막은 거대한 해골더미로 끝났는데 허스트는의 다이아몬드 박힌 해골이 릴레이 바통을 잡았다. 트라우마와 죽음충동은 작년 호암의 루이즈부르주아와 맥을 같이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이 근대미술에 강하다면(실제 진본 소장품도 많다) 한국은 현대미술에 강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만큼 우리의 경제성장이 더뎠다. 사람들의 먹고사니즘이 해결되어야 미술을 관람한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첫 아시아 대규모 회고전을 한국에서 했다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볼 게 많았냐는 잘 모르겠다.


쭈글한 소파 질감의 상어의 눈은 불쌍해보였고 파리는 꽤 팔팔했고 잘린 소머리는 리얼했으며 18세기 해골은 눈 푹 꺼진 자리 안와와 입천장 구개까지 꼼꼼히 박혀있었다.


예상치 못했는데 자기 살껍질을 벗겨낸 성바르톨로뮤 청동상과 대리석으로 조각한 천사 해부상이 흥미로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중일전쟁을 반성적인 톤으로 기술하는 방향 속에 사람 살점 벗겨내는 몽골(?) 고문기술자가 떠올랐다. 살과 근육을 청동으로 구현한 질감과 대리석으로 표현한 대동맥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세 폭 제단화 구성에 왼쪽은 다양한 생선을 포름알데히드로 박제를 하고 가운데는 가위 등 의료기기를 두고 오른족은 생선에서 가시만 정교하게 벗겨낸 오브제 작품도 흥미로웠다.


왜 한미제약이 서포트를 했을까 보니 약통이 제단으로 쓰였다.


조각상이 마주보고 있는 공간이 있다 누미노제의 신성을 스테인레스스틸 가위로 도려낸 종교도상의 공간이다.

하나는 검정 하나는 하양

서로 흑백이 마주하고 있고 하나는 진취적인 로마 개선장군 포즈, 하나는 수그린 피에타 자세를 취한다.

하나는 남성과 울그락불그락 근육과 철제질감

하나는 스푸마토로 부드럽게 연마한 대리석으로 천을 구현했다.


나아가 나비라는 덧없는 생명이 박제된 영원을 추앙하는 종교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영성이 도려진 도상의 공간에서 의학이 종교를 대체했는가, 삶과 죽음과 영속성과 존엄은 어디갔는가 생각해본다. 


도록에선 학예사가 허스트의 미술사적, 미학적 분석을, 서울대 종교학과 유요한 교수가 예술 의례를,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유명한 이진경 교수가 죽음상징 바니타스 등 철학적 의미를, 그레고르 뮤어 테이트 미술관 디렉터가 골드스미스와 프리즈 시절 초기 경력을 훑어준다.


해골 상어 소머리가 핵심이긴 하지만 그외에도 종교를 대체한 의학의 역할, 가톨릭 도상의 재해석도 탐구할만한 재미있는 주제다.


대부분 허스트의 20대 시절을 다루는 1부를 쓱 넘어가겠지만, 거기서 보이는 대부분의 작품이 2,3,4부로 연결된다는 점을 더 감안하면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첫 작품 데님셔츠 <자화상>는 그가 골드스미스 학부1학년 때 개념미술의 방향을 설정해 준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을 오마주한 것이다. 노동집약적인 유럽회화가 고전주의 구도가 아니라 현대미술가로서 지향성을 나타낸다. 미술관에 걸어둔 옷이 미술이라는 점을 인정하거나 논란이 생기는 것에서 현대미술이 시작한다.


이어지는 <죽은 자의 머리와 함께> 사진에서 보면 16살의 허스트는 뚱뚱한 대머리 영국인 시체의 잘린 머리와 웃고 있는데 죽음에 대한 일관적인 주제를나타낸다. 2부의 상어 소머리와 연결된다.


그 다음 콜라주는 수집광 노인이 강제이주된 집에서 본 산처럼 쌓이 잡동사니가 인간 삶을 보여주다는 깨달음을 나타낸다. 세 번째 작품이 작가 최애라 했다. 4부에 산더미처럼 쌓인 약으로 이어진다. 잡동사니가 의약품으로 바뀐 것일 뿐이고, 의약품의 종류가 개인 삶의 궤적을 나타낸다 보는 것이다.


스팟 페인팅은 죽음의 반대 생명이자 덧없이 지는 와비사비의 상징, 벚꽃 연작과도 연결되고, 2층 작가의 방 리버페인팅과도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알약캐비닛 연작의 강박적으로 질서잡힌 다양한 색깔이나 마지막 전시실 벽을 뒤덮은 약제명과도 연결된다. 일부 스팟 페인팅 연작의 이름엔 화학물질이나 의약품명도 붙어있다.


<7개의 팬>은 상업주의 작가로서 효시를 알린 <프리즈>전의 기억이다. 투명한 관은 상어-소머리와 함께 있으나 지나치기 쉬운 나머지 한 작품과 연결된다. 의자가 너무 바짝 붙어서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투명감옥이다.


<올라간 것은 반드시 내려온다> 헤어드라이어에 붙은 탁구공은 죽음과 탄생의 상승하강 이미지를 상기하며,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 운명을 중력으로, 헤어드라이어의 바람을 덧없고 일시적인 인간의 노력으로 치환한다.


기계의 힘으로 회전하는 캐버스에 물감을 부어 제작하는 스핀페인팅은 자신의 작업방식이 어시나 기계에게 외주를 준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하고, 순환하는 생명의 사슬, 예술의 우연성과 통제불가능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산탄총으로 자살한 남자의 사진이 블러처리되어 QR코드로만 원본을 볼 수 있는 세척용품, 장갑, 의료기기와 함께 전시한 작품은 4부 죽음과 의학에 대한 1부에서 가장 직접적인 복선이다.


이렇게 1부의 작품 모두 전시 주제에 대한 암시를 하고 있다. 그 다음 이제 상어, 소머리, 해골이고 그 다음 의료기기, 동상, 약 끝이다.


전시를 가지 않아도 SNS에 너무 많은 사진이 올라올텐다. 정말 그게 전부이지만 사람들이 그래도 꾸역꾸역 직접 원본을 보기 위해 안국역으로 갈 것이다. BTS 컴백공연(3.21)과 단일전시 최대관객을 그러모은 공예박물관의 금기숙 기증전 종료(3.22) 마지막 고별인파와 허스트전 개막(3.20)이 겹쳐 도떼기시장일지도 모르겠다.


MOOC를 통해 대학강의 무료로 인터넷에 공개하면 학생들이 학교를 안 오고 집에서 공부할거라는 비판이 있었으나 기우였다.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다. 온라인에서 보면 더 친숙해지고 오프라인으로 더 오고 싶어진다.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해골 보려고 지방에서 다 올라올거다. 한국인의 갤럭시와 클라우드에 너도 나도 론뮤익과 허스트 작품 사진이 있게되리라. 희토류를 사용해만든 최첨단폰에 불필요하게 수많은 저장용량을 사용해서 자원낭비와 중복이 너무 심하지만, 다시는 안 볼 지언정 나만 안 할 수 없다. 포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사진어플을 잘 쓰는지 어깨너머 알 수 있는 기회다. 아시아 최초전시라 하니 일본,중국,대만에서도 오겠지. 주식판의 지금이 가장 쌀 때다라는 말처럼 오히려 지금이 가장 사람이 적을 때다, 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문화가 있는 수요일 저녁엔 얼마나 많아질까.


너무 과한 촬영장비로 너무 과하게 찍는 이들도 있었다. 사진 촬영이 중요해서 작품에 다가가면 눈치 주는 사람들도 보았다. 미술감상보다 소셜스페이스가 더 중요한 시대라 그런지


흡사 현대예술계의 내한공연과 같아보인다.

용이나 유니콘 같은 상상 속의 존재를 내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전시다.

혹은 소문만 무성하던 왕족이 친히 내왕해주는 퍼레이드라 할 수 있을지도

언젠가 보았던 에도시기 그림에 조선통신사를 보기 위해 몰린 일본의 인파처럼, 일본 스님마저 내려온 것처럼.

루브르에서 모나리자 앞에서 선 유럽인도 매너건 뭐건 다 잊고 무장해제되어 너나 할 것 없이 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다.


싫다는 사람의 볼멘소리도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장삼이사 모두 친견하러 올 것이다.

찰칵찰칵소리는 몇 달 간 끊임없으리라

미술담론과 상관없이, 한국인의 심리를 꿰뚫어 본 전략적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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