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중한 성공회 사제이자 여자인 Fleming Rutledge가 쓴 By the Word Worked는 세미나리에서 진행된 강연을 바탕으로 쓴 세 부로 이루어진 짧은 설교집이다. 인간의 도덕적 결함이 신의 행위를 무효화하지 못한다는 고갱이로, 특히 성례의 효력이 집전자 개인의 윤리적 상태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제목은 라틴어 ex opere operato의 직역이자 핵심논제로 2부에서 집중적으로 논한다.
읽는 중에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흥미로운 책이 떠올랐다. 부르디외의 제자로 문화사회학을 연구하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이자 여자인 Gisèle Sapiro가 쓴 책, Peut-on dissocier l'œuvre de l'auteur, 작품을 작가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다. 창작자의 행위와 작품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를 소비하는 우리의 윤리적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 우리가 신뢰하는건 행위의 순수성인가 아니면 약속의 지속성인가? 에 대해 충돌시켜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정답은 없고 해답만 있다. 접근방식을 더듬어 보는 훈련을 거친 독자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해야한다.
신학자인 루틀리지의 생각은 효력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에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성례를 인간이 수행하는 종교적 행위이 아니라 신이 약속한 방식으로 역사하는 사건으로 본다. 따라서 성직자는 매개자이지 원인이 아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성직자의 치명적인 실수에 의한 도덕적 타락은 성례의 객관적 효력을 훼손하지 않는다. 신자는 인간의 도덕성에 의지하지 않고 신의 약속에서 믿음의 근거를 정초해야한다. 만약 성례의 유효성이 매번 집전자의 상태에 따라 흔들린다면 공동체 전체가 영적 불안정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 지점을 방어하며 실용적인 안정성을 제공하려 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은 작동한다고 말한다.
사피로라면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며 작품은 결코 진공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작품은 생산, 유통, 수용이라는 촘촘히 조직된 네트워크 속에 존재한다. 창작자의 행위는 그 네트워크 안에 존재하고, 작품의 의미를 상호구성한다. 사생활이 문제된 영화제작자 등, 타락한 창작자를 너무 도덕적으로 매도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을 완전히 자율적인 것으로 보는 전통적 시각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 작품을 여전히 소비하는 행위는 그 작가의 상징 자본을 유지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기에 조심해야한다는 것이다. 의미의 생산은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신자를 관객, 성례를 작품, 성직자를 창작자로 일단 거칠게 치환한다면
루틀리지나 사피로나 사람의 도덕적 타락은 권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생겼을 경우 막을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신자=관객은
성직자=창작자라는 인간과, 그들이 행하는 성례=작품을 구분하자는 데까지는 함께 할 것이다.
이후 루틀리지는 성직자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성례는 여전히 지속된다고 주장할 것이고
사피로는 계속 참가하면 창작자의 의미생산 네트워크와 상징자본을 공고히하니 주의해야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둘은 갈라져서 루틀리지는 성직자는 창작자가 아니라 매개자이고, 진정한 창작자는 신이라고 주장할 듯하다.
정리하면 이렇다.
루틀리지
핵심: 성례의 효력
기준: 신의 약속
변수: 인간은 신뢰할 수 없다.
충돌지점: 타락한 성직자가 있다손해도 성례는 지속되고 신자는 영향받지 않는다.
사피로에게
핵심: 작품의 의미
기준: 사회적 맥락
변수: 인간 행위는 의미를 바꾼다.
충돌지점: 타락한 창작자의 작품소비는 관객이 주의해야한다.
이런 입장이 제출되는 까닭은 루틀리지는 효력은 인간을 초월한다 생각하기 때문이고 사피로는 의미는 인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사피로의 입장에서 루틀리지는 한층 더 비판해보자면 제도적 면책 위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
어차피 성례는 유효하다는 논리는 성직자의 도덕적 책임을 상대화하고 권력 남용을 은폐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아가 공동체 신뢰가 붕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례의 객관적 효력과 별개로 신자들은 인간을 통해 경험하기 떄문에 집전자의 타락은 성례의 체험적 의미를 훼손할 수 있다.
아울러 문제가 되는 성직자가 계속 성례를 집전한다면 상징자본과 권위는 유지된다. 문화적 정당성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사피로의 이러한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루틀리지는 이렇게 반박하리라.
은총은 인간의 도덕성보다 더 크다. 만약 성례를 인간 윤리에 종속시키면 구원의 확신이 붕괴된다. 제도와 효력은 구분되어야 한다. 당연히 타락한 성직자는 징계되어야 하지만 그가 집전한 성례까지 무효화할 이유는 없다. 신자의 신앙 보호에 대해서도, 이미 받은 성례의 유효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신앙 자체를 흔드는 일이다.
이런 프레임으로 미국의 가톨릭 아동 성범죄 논란을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의 특종 탐사를 다루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2015)>를 다시 생각해보면 재밌겠다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두 입장은 양립불가능하지 않고 화해시킨 후 이중구조로 모델화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성례는 객관적 효력을 가진다는 성공회 신학자와
그러나 그 의미와 경험은 관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학자의 논쟁이다.
이를 합치면
효력은 신에게서 오지만 의미는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다고 합의가 가능하다.
성례는 유효하지만 타락한 성직자는 공동체에서 배제되어야 하며 신자들이 느끼는 상처 역시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야한다.
아울러 수행성을 경유해 논리를 보강해볼 수도 있다. (요즘 퍼포먼스 전시를 많이 봤기 때문에 생각해본다)
언어행위적으로 성례는 말해지는 순간 발생하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수행은 화자의 신뢰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가
이런 접근으로는 모든 성직자(매개자)를 발화에서 분리시켜 기계적으로 행위자화 시키는 ex opere operato는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다.
관계 네트워크를 맹신하고 모든 창작 소비자가 높은 수준의 지적 윤리적 능력을 지녔다 전제하는 사피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작품과 작가의 완전한 분리도 완전한 동일시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성례는 신의 행위면서 동시에 신뢰 위에 서 있는 수행이다. 즉, 완전한 분리도, 완전한 동일시도 불가능하다.
신학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사회학은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신학은 신자의 확신을 보호하고 사회학는 윤리적 긴장을 유지한다.
그렇지만 신학와 문화사회학, 즉 종교와 예술은 동일한 문제를 공유하고 비슷한 결의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매개자의 타락이 전달되는 진리를 훼손하는가?
설교자와 작가는 같은가?
같다면 작가(창작자)의 사생활문제가 그가 표현하는 작품감상을 방해하는가?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
우리가 신뢰하는건 행위의 순수성인가 설교자의 아니면 약속의 지속성인가?
앞서 언급했던 영화 <스포트라이트> 뿐 아니라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소설 보면 되지의 <혼모노>에 수록된 길티 프레져도, 어제 넷플 등 OTT에 대거 풀린 홍상수의 영화들도 이런 프레임으로 톺아보기 좋은 생각의 재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