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선재는 탕비실 화장실 보일러실까지 건물 구석구석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흡사 자기 몸을 완벽히 지배하고 있는 숙련된 무용수같다. 근육의 모든 명칭을 알고 의식이 신체 곳곳을 정확히 핀포인트해서 움직이는듯하다.
그러한 공간활용의 장점이 십분 활용된 지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적군의 언어)전은 웅장한 비장미가 강조된 장소특정적 전시였고, 이번 퀴어작가 단체전 스펙트로신테시스는 작가 70명의 작품을 건물 전체에 나누어 현명하게 분산배치한 것이 마치 솜씨좋은 퍼페티어같다.
전시는 지하1층으로 들어가 3층으로 올라와 내려간다. 이번엔 심지어 경비실에 화장실과 화장실 통로까지 전시장으로 삼고, 북유럽처럼 성중립화장실을 만들었다. 화장실이 얼마나 내밀하면서 정치적인 공간인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공간활용 자체를 감상하는 재미도 꽤 있다.
전시장 가서 사진을 안 찍고 상황에만 충실히 침윤하기로 마음먹은지 꽤 되었다. 전문가들이 고해상도 사진을 많이 찍어서 올려줄테고 나는 다녀온 인상을 사진없이 글로만 배설해본다. 排設. 잔치에서 물건을 자리에 맞게 늘어놓는다는 뜻이다.
목천재단 한국현대건축가 구술사 프로젝트 <건축가 김종성 구술집(2018)>에서 아트선재 개관 때 상당한 예산을 고퀄리티 지하 극장 의자 구입에 썼다는 것을 읽고나서 착석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져 방문할 때마다 자본주의의 이로움을 만끽해보곤한다. 건물관리인이 된듯 지하1층의 신기한 동선을 탐험하고나서 3층에서 노빠꾸로 바로 전시의 강력한 테마인 성, 신체, 정체성, 가족구조, 트라우마를 직면한다. 마치 마라맛 치즈등갈비처럼 3층이 가장 강렬한 향취로 자극하고 2층과 1층으로 내려오면서 폭신하고 고소한 질감으로 바디감을 주는 구조다. 모든 작품을 다 다루기엔 어렵고, 여러 전시에서 익히 알려진 작품만 생각해보면 이런 작가들이 있다.
우선, 2층에는 수트케이스 안에 15세기 플랑드르 회화 <수유하는 성모>를 넣은 얀보(Danh Vo)의 작품이 있다. 제작이 2026년이라 하니 이 전시를 위해 만들었나보다. 작품은 캐리어를 들고 이동하는 현대인의 모빌리티 상징하는데 가장 움직이지 않는 고전회화를 넣어 불가능한 이동성의 이동을 다룬 점이 흥미롭다. 베트남어 로마자 표기법 쯔 꾸옥 응으으로 D는 ㅇ이고 Tr은 ㅉ다. 그래서 나트랑 아니고 나짱이고 댄보 아니고 얀보다. 자인보라고 발음하기도 하는데 북부 하노이에서 D는 ㅈ발음, 남부 호치민에서는 o발음이기 떔ㄴ이다. 혹은 욘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덴마크에 4살 때 이주해 독일에서 활동하는 디아스포라 작가다. 작년 리움 현대미술전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은 복제한 자유의 여신상을 250개로 분해해 전세계미술관에 소장시킨 <우리 국민은(부분), 2011-2013>을 만든 작가다. 리움에는 주름부분 구리가 소장되어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미국적 자유민주주의의 파편화된 공유로도 읽을 수 있고, 이주작가의 사적경험을 적용해보자면, 여러 장소를 의식적으로 알지만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이 그곳에 남겨두고 온 정체성의 편린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청주MMCA, 광주ACC, 일본모리, 평창시립아카이브, 청담아뜰리에에르메스 등에서 본 김아영 작가의 작품도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벽화의 암시를 보니 에른스트모와 딜리버리 댄서 구가 퀴어 주제 속에서 재맥락화되어 백합관계로 바뀌어 흥미로웠다. 청주에선 현대 다크호스, 광주에선 거대한 스크린 밑에서 미드저니 기술의 진화, 모리에선 게임의 예술화 등으로 읽혔고 모와 구는 AI와 인간의 야누스적인 이중 정체성처럼 느껴졌는데 이곳의 벽화 캐릭터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매우 표독스럽고 집착적으로 탐닉하는 듯 보여 새로운 접근방식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 컨트롤러를 사용해 플레이하는 전시한정 게임엔진 속에선 열화된 서울 을지로풍 골목길을 배경으로 3인칭 백뷰 싱글플레이RPG를 진행한다.
또, 김경묵 작가가 2015년 병역거부로 인한 독방수감 경험을 VR로 체험하도록 만든 <5.25m2>는 재작년 국현미 한캐나다 교류전 순간이동(2024)에서 본 작품이다. 같은 시기에 올해의 작가상 2024을 받아 VR 작품이 윗층에 하나 더 있었던(옥산의 수호자들) 권하윤의 <구보, 경성을 걷다>와 김진아의 동두천 <미군 위안부 3부작>, 랜달 오키타의 <거리의 책> 등과 함께 놓여 VR기기를 통해 다른 시공간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데 전시의 방점이 있었다. 아트선재 전시에 놓이니 작가가 커밍아웃을해서 독방에 갇혔다는 점이 부각되어 개별 작품이 새로운 의미체계 안으로 흡수되어 의미가 재영토화된다.
나아가, 용산 아모레퍼시픽에서 크게 진행했던 마크브래드포드의 작품도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직접 방문해서 만들었다고 써있다. 흑인이라는 인종, 가난한 하류층이라는 경제계급, 동성애라는 젠더, 이렇게 삼중 차별 구조를 도시공간의 문제의식 속에 녹여낸 작가다. 그러나 아모레에서는 아무래도 대기업의 상업전시다 보니 그의 퀴어성을 전면부각시키기 어려웠다. 헌데 아트선재에서도 딱히 더 부각되지 않았고 의미가 새로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작품 자체가 선언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가 함께한 존재감만이 중요하다.
아울러 마크브래드 포드 벽화 작품 앞으로 바닥에 10여 년 전 국현미 올해의 작가상 2015를 탄 오인환의 녹청색 향가루 설치작품이 보인다.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이라는 작품이고 6년 전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도 보고 여러 번 대중에게 눈도장 찍은 작품이다.
이에 더해 베일로 덮힌 밤의 시공간을 모티브로 삼아 고착화된 정체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야광 콜렉티브(김태리와 전인)의 작품도 있다. 아르코에서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보았고 국현미 과천 젊은작가전에서도 있었다. 과천때가 조금 더 매운 맛이었다. 외면은 치즈퐁듀같이 부드럽지만, 평론에 누적된 고차원적 생각의 흔적은 단단하다.
생각해보니 지하1층에 김초엽 작가의 책도 언급되어있던 것 같다. 어쨌든 이쯤 마무리해본다.
인상파전과 현대예술전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마이아트, 더현대,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을 가는 이와 국현미, 아트선재, 서울시립을 가는 이는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아름다운 이국의 풍경을 보면서 힐링하고자 하는 마음과, 일부러 불편한 것을 보고 익숙한 일상의 문제를 꼬집는 마음이 같은 선에 있지 않다. 이렇게 동시대인보다 한 걸음 앞서서 미래를 사는 이들이 있는데, 산업화 시대에 민주화를 꿈꾸던 이도, 노예시대에 인권을 꿈꾸던 이도, 식민지 시대에 민족주의를 꿈꾸던 이도 모두 자신의 시대와 불화했다. 그리고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100년이 지나면 언젠가 이들도 기득권이 된다는 점. 지금 이렇게 시대에 대해 아파하는 여린 마음들이 훗날 인공지능의 시대에 조부모의 세대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리라. 퀴어 엄빠들은 로봇을 사랑하고 버튜버와 결혼식을 치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때는 인간을, 인간의 몸을 사랑했어! 정말로 비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 그게 맞아? 하면서 되묻게 되리라. 사상이 석화되고 퇴화되기 전에 너도 나도 생동하는 사유의 최전선을 음미해보자.
모두가 좋아할 전시가 아니라, 일부가 매우 사랑할 전시다. 김이나 작사가의 말을 빌려 재서술해서 말하면, 적당히 사랑받고 정확히 미움받는 시대를 지나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는 나날을 향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