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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인간
아베 고보 지음, 이선윤 옮김 / 고트(goat) / 2026년 8월
평점 :
아베 코보가 1973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소설 상자인간(箱男 하코오토코 박스맨) 읽었다.
골판지 상자 안에 들어가 살기로 한 사람에 대한 내용인데, 상자는 막다른 골목이나 별세계로의 출구를 의미하기도 하고, 외면, 허례허식, 의복, 사회, 세계, 존재를 은유하기도 한다. 상자 안에 들어가 밖을 본다는 설정 속에서 엿보기, 노출, 타인의 시선, 스스로에 대한 성찰, 존재의 윤곽같은 철학적 메타포가 반복된다.
뚜렷한 서사가 잡히지 않아 술술 쉽게 읽기는 힘든 지적인 소설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내면 독백이 떠오르기도 하고, 가장 비근한 느낌의 한국 작품으로는 영화 <김씨표류기(2009)>를 꼽아본다. 밤섬에 갖힌 남자(정재영)과 스스로를 아파트에 가두고 그 남자를 망원경으로 엿보는 여자(정려원)이 나온다.
소설에는 상자인간인 주인공과 동시에, 상자인간이 싫어 공기총까지 쏠 정도였다가 자기도 냉장고 포장 골판지상자에 들어가 상자인간이 된 아파트 거주민 A나 그녀, 군의관이 등장하지만 서사 진행에 딱히 이렇다할 개입을 하기보다 상자인간의 생각을 촉발시키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
간단해보이지만 간결하지는 않고, 별 것 없어 보이지만 심오해, 이것이야 말로 순문학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는 예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용이 까다롭지만 기발한 편집 네 부분이 원활한 독서를 거든다. 책 전역에 걸쳐 노트에 필기한 파트는 모두 연필 필선이 강조된 기울어진 서체로 되어있다. 표지 겉면은 책의 주 소재인 골판지 상자에 맞게 갈색 마분지 질감 커버로 감싸여있고, 앞면 상단에 상자인간의 엿보기 눈 구멍처럼 눈이 뚫려있다. 언뜻 두 눈동자 같기도, k k라고 쓰여진 것 같기도 하지만 커버를 벗겨 안을 보면 상자 상箱의 대죽 변 이다. 36쪽 5줄에 ‘인간은ㅂ‘ 하며 잉크가 떨어져 쓰다만 필기감을 강조하기도 했다. p82 하단에는 글자를 아예 90도로 회전시킨 부분도 있었다.
때론 스토리 진행 관계없는 묘사 그 자체가 소설을 완독한 후 기억에 남곤하는데, 예를 들어 8년 전에 나온 구병모의 파과(2018)에서 지하철 도어가 압력이 가득 찬 밥솥의 코크가 열리는 듯하다, 라는 표현이 기억에 오래 남아 지하철을 탈 때마다 반복 강화학습을 했다.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원작 기반의 영화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그런 문장을 애초에 시각화로 살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외에도 신경숙, 김애란, 예소연 등등 통통 튀는 표현을 잘 구사하는 좋은 작가는 a를 이야기하며 b를 기억시키는데 능하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고 기억에 각인될 표현이 몇 개 생겼다.
임신 중인 길고양이의 배가 가득 알을 품은 청어같다랄지p35 개가 내뿜는 입김같은 해변에 내리는 비의 냄새, 분문기로 흩뿌린 듯 방향을 알 수 없는 안개비p31 같은 표현이 일부 예시다.
종이는 면적의 압력은 버틸 수 있지만 점의 압력에 취약해서 공기총알이 뚫고 갈 수 있다는 부분도p23 인상적이었다. p228 초콜릿 구운 조개 맛, 새우튀김 바나나 맛도 특이했다. p216 아래 두 줄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한 표현인지.....
상자인간은 도처에 있다. 부랑자나 아니지만 여기저기 존재 p19-20 그러나 거지나 부랑자는 아니다. p227 요컨대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는 현대(일본)인의 부분집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등장인물에 대한 정보는 흩어져있다. 주인공은 상자인간되기 전 갓 독립한 카메라맨이었다. p50 p57
그녀는 가난한 미술전공생에서 간호사가 된 인물이다. p84
상자에 들어갔으면서 둘이 성관계같이 할 거는 다한다. p149-50, p276-8
상자인간을 보는 것과 실제로 뒤집어 쓰고 사는 건 다르다고 말하는데, 신용을 담보로 할부제도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반할부주의자로 산다는 결의p222로 일종의 이 세상에 대한 저항의식의 발로라고 이해해볼 수 있겠다.
사진 에세이 p45-8, p246-9가 그가 상자에 뚫린 엿보기 구멍으로 관음하는 70년대 일본의 풍경이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평범하디 평범한 세상이고, 누군가에게는 편리한 물건이 가득한 평화로운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이 억압적이고 옥죄는 세상이었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