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전시장마다 디렉터에 따라 취향이 선명하게 있다. 어제 댓글 달면서 잠깐 생각해봤다. 아래의 (외국계) 갤러리는 거의 다 갔는데 내 느낌상


포르투갈계 두아르트스퀘이라는 남유럽 특유의 쨍한 햇빛 속에 즐길 수 있는 화사한 색채감을 좋아하면서도 유럽적 우울 가운데 발랄함이 섞였다. 창의적인 구도가 공통분모다. 장난기 많은 어린이를 둔 초췌한 어른 같기도, 슬픔을 견디기 위한 경쾌하 축제같기도.


독일계 마이어리거울프는 목탄느낌에 드로잉선의 골격감이 있다. 독일 표현주의의 세례도 있고, 동독 공업 도시의 회색빛 공기와 전후 폐허의 먼지나 탄광도 상기된다. 색보다 선이 먼저이며 선은 감정 설명용이 아니라 상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함이다. 화면에 벽의 균열이 느껴진다.


라트비아계 디아는 러시아적 동유럽적 신사도가 읽힌다. 오래된 코트의 깃, 차가운 도시의 엄격한 예절, 곧 혁명으로 몰락하기 전 세기말 귀족 문화의 마지막 품위 같은 것. 곧 소멸될 인물이나 결코 흐트러져 있지 않다.절제와 멜랑콜리가 공존하더라


DDP는 톰 삭스, 바스키아, 패션, 섬유, 이머시브 등 산업과 팝의 뒤엉킴이다. 엔지니어링과 스트리트문화와 하이패션과 공업재료가 함께 굴러다닌다. 매끈한 미래주의이기도하고 조립식 도시의 거친 미감이기도


바톤은 빛, 색, 재료의 물성에 초점. 광학과 재료공학을 현대예술로 번안한 감각. 안료가 캔버스에 살포시 놓이는 방식, 빛의 반사와 굴절에 대한 세밀한 탐구, 빛이 표면에서 데굴데굴 미끄러지는 속도, 광택과 침잠의 차이를 집요하게 다루려한다. 이우환이 개척한 모노하의 현대적 계승자. 갤러리508의 렌티큘러도 비슷


송지오갤러리느와는 복수의 시대, 재료, 스타일을 충돌시킨 후 정반합의 원칙을 따라 동시대성으로 승화한다. 봉제인형과 생성형이미지, 전통가구와 스테인리스스틸, 권오상, 디지털 토템, 미국선주민풍 퀼트, 3D모델링 미래형 조각


P.S.돌이켜보면 타데우스로팍이 상업갤러리치고 지난 전시를 2.24-5.2까지 꽤 오래했다. 알렉스카츠는 5.2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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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역에 있는 상암 영상자료원 1층 한국영화박물관의 타이포그래피전에 다녀왔다.

영화의 제목 타이포그래피는 흥미로운 중매쟁이다. 영화와 관객이 처음 만나는 소개팅 주선자면서 정보 전달 적어둔 노트면서 관객이 아직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피부로 접촉하는 감정의 예고편이다. 이 영화가 느와르일지 로맨스일지 공포일지 서체를 통해 전달된다.

글자는 읽는 대상이면서 그 자체로 감정 이미지다. 화면 위를 미끄러지는 먹이 번져나간 자국, 거칠게 끊긴 획, 급히 휘갈긴 듯한 꺾임의 방향 듬등은 등장인물의 감정과 시공간의 분위기를 관객쪽으로 흘려보낸다. 자간이 비틀리고 획 끝이 갈라진 타이포그래프를 본 관객은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어떤 불안과 열기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폰트는 한국 전통 서예와도 이어진다. 반듯한 해서의 안정감은 역사극의 무게와 휴먼드라마의 품위를 만들고, 초서의 흩날리는 필획은 느와르나 멜로드라마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중요한 건 글씨의 의미보다 기세로


동아시아 서예에서 붓의 머뭇거림과 질주는 개별 사람의 개성적 기운으로 읽혔다. 영화 제목의 서체 역시 능히 인물의 정념과 영화의 호흡을 미리 드러낸다. 그래서 어떤 영화 제목은 단 몇 글자만으로도 바람 소리나 쇳소리 같은 촉감을 전달한다.

디지털 타이틀 디자인은 전통 서예적 감각을 계승해 글자가 흔들리고, 번지고, 깨지고, 천천히 사라지는 현대적 변주를 만ㄷㅇㄴ다. 고정된 활자와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오래된 붓의 기억을 희미하게 끌고 다닌다

정거장에 도착해이만 끝.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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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음악은 정조(情調)를 완벽하게 봉합해버린 나머지 이후 다른 작품에서 재등장할 때 자동적으로 그때 그 기억과 정서과 소환되곤 한다.
현명한 감독은 이렇게 기억된 잔향처럼 작동하는 곡을 새로운 작품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기존의 영화 에서 시그니처로 굳어진 음악을 재호출하면 원래 영화의 미장센과 감정의 유령까지 함께 끌고 들어와 자기 작품을 혼동스럽게 만들고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음악의 재활용은 지양되기 마련이다. 인용을 한다면 신중하게 의도된 전유(appropriation)여야한다.

좋은 예시는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RMN(자기공명영상장치MRI를의미)에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나오는, 우메바야시 시게루가 작곡한 유메지의 테마 바이올린 소품을 쓴 것이고

다소 부적절한 예시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햄넷에서 테드창 원작/드니 블뇌브 감독의 컨택트(어라이벌)에서 나오는 막스 리히터의 바이올린곡을 쓴 것이다.

이미 한 작품에서 영화적 공기를 완성해버린 음악은 이후 독립된 음향 오브제처럼 유통된다. 다른 영화에서 옛 ost를 듣는 관객은 현재의 장면을 보며 과거 영화의 기억을 중첩해 듣게 되기에 혼란에 빠진다.

유메지의 테마는 개인적 영화경험에 각인된 매개체로서 느릿한 스텝, 좁은 복도, 스쳐 지나가며 교차되는 시선, 반복되는 슬로모션, 베일 차양막과 함께 욕망과 유예의 감각을 낳았다.

그런데 크리스티안 문지우는 RMN에서 이 곡을 왕가위적 낭만을 재현하려는 데 쓰지 않는다. 루마니아와 헝가리와 독일계 다민족 공동체의 불안, 침잠된 혐오와 불신, 모순 어법, 냉랭한 시선을 다루는 영화 속에 지나치게 아름답고 고혹적인 선율을 삽입함으로써 강한 이질감을 만든다. 왕가위의 홍콩에서 욕망의 미끄러짐을 표현하던 음악이 문지우의 루마니아에선 유럽 내부의 균열과 정서적 소외를 비추는 낯선 잔향으로 변모한다.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화양연화를 떠올리지만 바로 그 청취경험 때문에 현재 장면의 삭막함을 더 예민하게 체감할 것이다,

그러나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를 굳이 햄넷에서 사용해야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매혹적인 바이올린 솔로가 공유된 비애의 정서를 상기시키는데 컨택트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강렬하게 사용되어 시간의 비선형성과 상실의 감정을 정리한다.
홍콩배경의 바이올린이 루마니아시골에선 이질적 감각을 낳는 것이 의도였던 유메지의 테마 사용은 체칠리아 캐릭터의 한 명의 비애를 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클로이 자오의 의도는 무엇이었까? 엔딩에서 연극의 이야기가 자기와 가족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는 것? 슬픔과 애도를 추체험해 연극치료하기 위함이라면 기존음악을 차용할 필요 없이 새로 작곡할 수 있었고 이미 집단 기억 속에 저장된 분위기를를 빌려 올 필요는 없었다. 히로인의 체념, 극복과 미래를 다루는 햄넷과 컨택트는 정서가 겹친다.

몰입하던 스토리의 엔딩에서 바깥의 다른 영화적 기억이 감각되어 결과적으로 정서가 겹치고 오염되고 섞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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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 2026 칼데콧 수상작
매슈 버제스 지음, 카티아 친 그림, 김지은 옮김 / 신나는원숭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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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데콧 수상작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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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책 소개 및 번역


1. 사람 소개


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필립-알랭 미쇼(Philippe-Alain Michaud)의 책

<영화에 대하여>


필름과 미술사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는 Centre Georges Pompidou 영화 부문의 큐레이터를 맡고 있으며 브뤼셀의 École de recherche graphique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아비 바르부르크와 움직이는 이미지》(1998), 《이미지들의 민중》(2002), 《필름: 확장된 시네마 이론을 위하여》(2014) 등이 있다.


2. 책 소개


“시네마(ciném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움직임’을 뜻한다 [movie]. 운동의 환영은 분명 필름 이미지의 일반적인 보완물이다. 그러나 그 환영은 포토그램들이 이어지는 속도가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변화한다는 확신 위에 성립한다. 하지만 필름 스트립의 구조적 배열 자체에는 그러한 확신을 정당화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거부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예술을 단순히 ‘필름(film)’이라 부를 것이다.”

— Hollis Frampton,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Pour une métahistoire du film)」


이 책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역사에 대한 회고적이며, 비선형적이고, 탈중심화된 독해를 제안한다. 책은 기술적 응용과는 독립적으로 재현의 역사 속에서 전개되어 온 ‘필름적 사유(pensée filmique)’를 분석하는 데 기반을 둔다. 동시에 영화적 스펙터클을 조건짓는 장치(apparatus)로부터 분리된 필름의 속성들이 예술 실천의 여러 영역 안에서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추적한다.


초기의 장들에서는 시네마라는 형식(forme-cinéma)이 성립하게 된 공간과 범주들이 어떻게 해체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근현대의 예술가들과 영화감독들이 필름의 속성들—빛, 지속시간, 운동—을 서로 분리하고, 포토그램 혹은 포토그램의 띠, 광선(faisceau), 투사면 등 필름의 구성 요소들을 따로 떼어낸 뒤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열해온 과정을 서술한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그 효과를 아직 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준의 변화를 낳았으며, 필름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소급하여 다시 읽게 만든다. 동시에 필름이 예술 체계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 그리고 역으로 그 체계를 변형시키는 과정 또한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흔히 부정확하게 “실험영화(cinéma expérimental)”라고 불려온 것은 이제 20세기 내내 지속되어 온 하나의 흔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필름의 경험이 단순한 비물질화의 역사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의 흔적이다. 고전적 극장 공간 안에 주조된 전통적 영화 스펙터클에 맞서,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1960년대의 익스팬디드 시네마(expanded cinema), 그리고 동시대 작가영화에 이르기까지, “실험적”이라는 스타일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역사를 다시 사유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다른 계보와 다른 개념들을 제안함으로써 영화사를 재배치하려는 시도였다.


현대 시네마가 자신을 인식하고 전개해온 공간적 장치—움직이지 않는 관객들이 투명한 표면으로 설계된 스크린을 응시하는 구조—와, 그로부터 구축된 고유의 이해 가능성 체계 앞에서, 또 다른 방식의 필름 사유가 떠오른다. 그것은 특정 매체 규정으로부터 벗어난(despécifié) 필름이며, 연극성의 법칙과 사진적 인화(photo-impression)의 법칙으로부터 해방된 필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양한 현상들의 ‘출현(comparution)’을 발생시키는 일반화된 전이(dispositif de transfert généralisé)의 장치다.


https://www.editionsmacula.com/livre/sur-le-film/


3. 책에 대한 Géraldine Sfez의 학술 서평


https://journals.openedition.org/critiquedart/23230


“영화(film)는 시네마(cinéma)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필리프-알랭 미쇼는 이러한 가설에서 출발한다. 이 생각은 이미 그의 저서 《아비 바르부르크와 움직이는 이미지》(《Aby Warburg et l’Image en mouvement》, 파리: 마큘라, 1998)에서 암시된 바 있으며, 이후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전시 《이미지들의 운동》(Le Mouvement des images, 2006년 4월 5일–2007년 1월 29일)을 통해 더욱 실험적으로 검증되었다. 미쇼는 이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방대한 ‘필름의 역사’를 전개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단적이며 “탈중심화된” 역사다. 그는 영화사를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를 통해 접근한다. 1920년대 아방가르드 실험들에서부터 실험영화, 그리고 1960년대의 익스팬디드 시네마(expanded cinema)에 이르기까지, 시네마의 경계 바깥에서 영화를 사유한다.


이 책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필름적 속성들(빛, 지속시간, 운동)을 ‘쇼로서의 시네마’와 체계적으로 분리해낸다는 점에 있다. 미쇼에 따르면 필름은 시네마로 환원되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초과한다.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이미지의 역사는 협의의 영화사를 넘어선다. 따라서 문제는 예술가들과 영화감독들이 이러한 필름의 속성들, 더 나아가 포토그램이나 광선(faisceau) 같은 구성 요소들을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탐구하는 데 있다. 예컨대 앤서니 맥콜의 작품 《Line Describing a Cone》(1973)은 빛의 원추 자체를 조각적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미쇼는 특히 “필름 위에서의 작업”이 종종 시네마 자체를 거슬러 작동해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표적인 예가 폴 샤리츠의 실험영화들이다. 《T.O.U.C.H.I.N.G》(1968)이나 《Synchronoussoundtracks》(1973–1974)에서 샤리츠는 재현의 예술로서의 시네마로부터 벗어나, 플리커(flicker) 기법을 통해 필름을 ‘현전(presence)의 예술’로 전환시킨다.


풍부한 도판과 함께 구성된 이 책은 여러 계보학을 펼쳐 보인다. 파노라마의 역사 속에서 산책의 미학을 추적하기도 하고, 엘 리시츠키나 마르셀 브로타에르스의 작업을 통해 전시와 필름의 관계를 분석하기도 한다. 또한 켄 제이콥스와 잭 스미스의 작업을, 보들레르와 벤야민이 말한 ‘넝마주이(chiffonnier)’의 형상과 연결지으며 영화적 반복과 리메이크의 문제를 새롭게 독해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접근하고 사유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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