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음악은 정조(情調)를 완벽하게 봉합해버린 나머지 이후 다른 작품에서 재등장할 때 자동적으로 그때 그 기억과 정서과 소환되곤 한다.
현명한 감독은 이렇게 기억된 잔향처럼 작동하는 곡을 새로운 작품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기존의 영화 에서 시그니처로 굳어진 음악을 재호출하면 원래 영화의 미장센과 감정의 유령까지 함께 끌고 들어와 자기 작품을 혼동스럽게 만들고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음악의 재활용은 지양되기 마련이다. 인용을 한다면 신중하게 의도된 전유(appropriation)여야한다.
좋은 예시는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RMN(자기공명영상장치MRI를의미)에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나오는, 우메바야시 시게루가 작곡한 유메지의 테마 바이올린 소품을 쓴 것이고
다소 부적절한 예시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햄넷에서 테드창 원작/드니 블뇌브 감독의 컨택트(어라이벌)에서 나오는 막스 리히터의 바이올린곡을 쓴 것이다.
이미 한 작품에서 영화적 공기를 완성해버린 음악은 이후 독립된 음향 오브제처럼 유통된다. 다른 영화에서 옛 ost를 듣는 관객은 현재의 장면을 보며 과거 영화의 기억을 중첩해 듣게 되기에 혼란에 빠진다.
유메지의 테마는 개인적 영화경험에 각인된 매개체로서 느릿한 스텝, 좁은 복도, 스쳐 지나가며 교차되는 시선, 반복되는 슬로모션, 베일 차양막과 함께 욕망과 유예의 감각을 낳았다.
그런데 크리스티안 문지우는 RMN에서 이 곡을 왕가위적 낭만을 재현하려는 데 쓰지 않는다. 루마니아와 헝가리와 독일계 다민족 공동체의 불안, 침잠된 혐오와 불신, 모순 어법, 냉랭한 시선을 다루는 영화 속에 지나치게 아름답고 고혹적인 선율을 삽입함으로써 강한 이질감을 만든다. 왕가위의 홍콩에서 욕망의 미끄러짐을 표현하던 음악이 문지우의 루마니아에선 유럽 내부의 균열과 정서적 소외를 비추는 낯선 잔향으로 변모한다.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화양연화를 떠올리지만 바로 그 청취경험 때문에 현재 장면의 삭막함을 더 예민하게 체감할 것이다,
그러나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를 굳이 햄넷에서 사용해야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매혹적인 바이올린 솔로가 공유된 비애의 정서를 상기시키는데 컨택트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강렬하게 사용되어 시간의 비선형성과 상실의 감정을 정리한다.
홍콩배경의 바이올린이 루마니아시골에선 이질적 감각을 낳는 것이 의도였던 유메지의 테마 사용은 체칠리아 캐릭터의 한 명의 비애를 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클로이 자오의 의도는 무엇이었까? 엔딩에서 연극의 이야기가 자기와 가족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는 것? 슬픔과 애도를 추체험해 연극치료하기 위함이라면 기존음악을 차용할 필요 없이 새로 작곡할 수 있었고 이미 집단 기억 속에 저장된 분위기를를 빌려 올 필요는 없었다. 히로인의 체념, 극복과 미래를 다루는 햄넷과 컨택트는 정서가 겹친다.
몰입하던 스토리의 엔딩에서 바깥의 다른 영화적 기억이 감각되어 결과적으로 정서가 겹치고 오염되고 섞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