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오모리에 있는 1904년(메이지37) 아오모리 은행기념관(青森銀行記念館)이다



지식이 많아지고 사물을 인내심을 갖고 디테일하게 바라보게 되면 세상을 읽는 것이 참 재밌다


지적 해상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흑백 브라운관이 아닌 올레드 디스플레이로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1단계는 와 예쁘다

- 비율이 안정적이고 장식이 조화롭다고 생각하지만 큰 관심 없음


2단계는 서양풍도 조금 보이네

- 서양건축 같은 요소들이 눈에 띄지만 정확한 용어는 모름


3단계는 서양식 네오클래시시즘 외관에 일본 목재건축기법을 사용한거네

- 삼각형 지붕(페디먼트), 둥근 지붕(큐폴라), 코니스, 아치창 등에 대해 설명가능


4단계는 서양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와 일본의 화양절충(和洋折衷) 스타일이 함께 보이네

- 페디먼트는 있으나 프리즈는 없는데서 빌려오되 생략하고 로컬화한 것을 발견


5단계는 러스티케이션으로 무게감을 조절했구나

- 재료와 질감 읽을 수 있음


구체적으로

1층 하단부에 돌출된 큰 블록(러스티케이션 rustication)의 원래 기원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궁전(Palazzo)양식. 1층을 거칠게 처리하여 안정과 힘을 보여주던 기법인데 아오모리 은행기념관은 목조라서 러스티케이션을 시각적 질감으로 흉내만 냈다는 것을 간파. 덕분에 건물이 아래는 무겁고 위로 갈수록 가벼운 인상을 줌


6단계 큐폴라는 아치구조 기반이네? 필라스터가 아니라 카럼이 하중을 지탱하고 있고!

- 구조와 장식, 내외면 설계도 모두 투사해봄


중앙의 작은 돔(큐폴라 cupola)은 반구형 지붕구조인데, 큐폴라는 무게를 수직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아치(arcuated system) 원리를 사용함. 내부는 목재 아치(또는 리브 rib)로 지지하고 외부는 작은 판금(도금) 마감. 이 방식 덕분에 비교적 가벼운 재료로도 큐폴라를 얹을 수 있음. 큐폴라는 건물에 상징적 왕관 역할+시각적 중심점을 만들어줌. 외벽에 붙은 장식기능 필라스터도 볼 수 있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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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lazymike.art/exhibitions


삼청 레이지마이크에 다녀왔다


국립현대미술관 뒷편 ㄱ자형 골목에 위치. 건물의 1층은 페레스, 2층은 디아, 3층은 레이지마이크다. 레이지마이크는 라트비아 기반 화랑으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슬라브, 동유럽쪽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지금은 세르비아 출신 필립 미라조비치의 검은 대리석 질감으로 그리 얼굴 없는 인물회화를 볼 수 있다. 지난 전시에선 모스크바 출신 예브게니야 두드니코바의 낭만적 초현실주의 회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일견 지금 탕에서 하고 있는 엘렌 샤이들린과 비슷한 감성과 화풍이다. 대략 하늘하늘 부드러운 버전의 샤갈+무하 조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레이지마이크: https://www.instagram.com/lazymike.art/

예브게니야 두드니코바 : https://www.saatchiart.com/evgeniyadudnikova?srsltid=AfmBOopzlhEDN0tZAlqRs3EGA0jKaoYviu71AKrzzZJcQB-aOVg7KXX6

엘린 샤이들린: https://www.tangcontemporary.com/2025-sheidlin-unconditional



Filip Mirazović <Homo Mundus Minor> 2025, Oil on linen, 132 x 83 cm




Filip Mirazović <The Magician> 2025, Oil on linen, 132 x 83 cm



필립 미라조비치의 작품은 일관되게 얼굴 없는 인간형상의 조형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옷을 걸치지 않은 누드지만 알몸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피부가 대리석처럼 무기질적으로 표현되어 사람의 형태를 입었으되 유기체의 생명성보다는 조각의 물질성이 더 부각되어  돌의 표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부의 감성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인물들의 정지된 듯한 동작과 생명 없는 껍데기로서 피부질감이 합쳐져 오늘날 인류가 겪는 존재의 불확실성과 기억의 퇴색을 시사할 수도 있다.


작품의 레퍼런스는 여럿 보인다. 링컨 이미지에서 많이 보이는 19세기 미국의 탑 햇(높은 모자)를 쓰고 있거나, 그리스로마 조각의 콘트라포스토를 취하거나, 천지창조 하나(느)님 아버지의 손짓의 끝부분과 같은 르네상스 종교회화가 보인다. 화면의 구성은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이며 초상화의 인물은 직립해 있고 왼쪽 다리에 체중을 두고 상반신을 오른쪽으로 비틀며 시선은 우측하단을 향해있다. 폴리클레이토스의 정형적 인체비율을 따르는 이상적 몸과 근육이다. 빛은 인물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싸거나 일부를 희미하게 지워내는데 시간의 흐름에 영향받지 않는 듯하다. 너무 매끈한 표면이 풍화와 같은 시간에 의한 침식을 지워낸다. 고전주의풍 조각의 모습은 한쪽 어깨를 내려앉히고 몸의 무게중심을 대각선으로 분배해 자연스러운 운동감을 포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움직임이 정지된 순간, 즉 동작과 정지 사이 어딘가의 비정상성을 드러낸다. 영원과 불안정이라는 두 감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데 키리코의 작풍도 떠오른다. 전통적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인물들은 대부분 화면 중앙에 고립되어 있으며 배경은 흐릿하거나 추상적이어서 초현실적 감각을 준다. 배경과 인물 간 공간적 깊이를 만들지 않아 인물을 마치 무중력 공간이나 몽환적 무대 위에 나른나른하게 부유시킨다.


도쿄도미술관에서 했던 데키리코전

https://dechirico.exhibit.jp/




아래 그림은 전근대 회화의 관습적 구성과 배치를 뒤집었다. 전근대회화에서는 남성이 지배적인 위치로 보통 시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여성이 피지배적인 위치로 남성 시선 아래에 있다. 필립 미라조비치는 다른 작품에서는 없는 여성의 젖가슴을 그려서 일부러 여성임을 강조했다. 그리스로마,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화풍과 구도인데 여성이 위에 있고 남성이 아래에 있다. 재밌는 전복이다.



Filip Mirazović <Solace> 2025, Oil on linen, 141x 160 cm



동양의 서울에서 하는 전시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작가가 관심있는지 모르지만


금박의 용 장식도 넣었다. 하이힐에도 넣었다. 나름 정교하게 모사하려 하엿다.


서양은 드래곤, 동양은 용이고 서로 생물종도, 상징적 의미도 다르다. 동양의 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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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활짝 열리는 사나운 공룡 호기심이 활짝 열리는
앨리스 비챔 지음, 디에고 바이스버그 그림, 신인수 옮김 / 어스본코리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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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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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과 반고흐 미술관에 다녀왔다


국립Rijks 박물관museum과 판van 호흐gogh 미술관은 걸어서 10분 거리로 바로 앞에 있다. 안국역 국립현대미술관과 고궁박물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글 혹은 아모레퍼시픽 사이 거리 정도다


양과 종류에 압도된다. 너무 많다. 예술의전당 2만원 전시 하나 보는 호흡으로 다 둘러볼 수 없다. 하루를 써야한다.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박물관이 힘을 모아 루브르처럼 쏟아지는 듯이 많은 양의 고려 불화, 조선 서화와 도자기 전시를 할 수 있을까?


항상 책에서 이미지로만 봐왔던 얀 아센 반 레이넨의 1650년경 작품 <위협받는 백조(The Threatened Swan>에 깜짝 놀랐다. 작은 프레임으로 봤을 때는 그냥 새를 잘 그렸겠구나 싶었는데 실물로 보니 화룡점정격으로, 프레임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게 아닌가. 남북조의 양승요가 반 레이넨의 전생임이 틀림없다. 그외에도 정물화 컬렉션에서 감동이 있었다. 괜히 이슬람에서 생명체 모방을 금지시킨 게 아니다. 예술가는 창조주와 마찬가지로 숭배될 가능성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이머시브 회화다.


흑백과 컬러TV를 거쳐 디지털에 4D에 올레드까지 기술이 발달했다. 앞으로는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거쳐 뇌척추 인터페이스로 오감전달까지 가능하게 될테다. 인류는 자연의 선명한 재현과 사물의 정밀한 모방 그리고 감각의 온전한 전달을 향해 분투하고 있다.


한 번 유럽 미술관을 가본 사람들은 앞으로 돈을 많이 벌어 다시 와서 더 많은 미술관을 다니겠다고 마음 먹게 된다. 그렇게 마음먹게 할 정도로 미술관 컬렉션이 참 좋다. 이전에는 왕족과 귀족과 일부 부르주아만 향유할 수 있던 문화다. 좋은 시절이다.


판 호흐 미술관에서는 고양이를 건졌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네덜란드 친구가 추천해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녹진한 우유맛이다. 연유와 우유를 반도체 스택 쌓듯 뭉쳐놓은 저항감 있는 크림이다. 홋카이도 우유도 물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가게명은 van der linnde다



물론 지금 갔다온 것은 아니다. 6년 전 7월이다. 코로나도 겪지 않았을 시절의 이야기다. 


한국말의 선어말어미 '왔'은 과거형 표지라서 틀린 말은 아니다. 옛날에 갔다왔다는 말이다.


앞으로 자주 가고 싶다. 일단 아쉬운대로 일본, 대만, 홍콩이라도 가고 싶다.


SNS에 스친이 나고야에 갔다. "아이고야 나도 나고야 가고프다 나고야 좋아해 나도야"라고 댓글을 달았다. 라임이 좋다고, 대댓을 달아주었다. 그 메시지는 나고야로부터 온 데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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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론뮤익전에서 왜 우리는 감동을 느끼는가?


명상적이고 성찰적인 색면추상 회화로 가득했던 이강소전이 자기 독백적인 모노톤 소설이라면 


론뮤익전은 다층적 시각을 보여주는 연출방식이기에 관객들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어도 무언가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같은 사소설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기독백적 내레이션, 멀리 나아가서는 수학자 이윤하가 쓴 <나인 폭스 갬빗>처럼 마치 한 캐릭터의 보이스톤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있다. 















비슷한 색감, 비슷한 작품의 크기, 위치와 동일한 시선높이 등. 한 테마에 몰입하기에는 좋지만 다채롭다고 느껴지는 않는다. 색감이 아니라 관객경험이라는 측면에서. 그래서 다양한 레이어와 타이밍과 표현방식을 구사하는 이머시브 전시가 각광을 받는다.


그런데 디지털 스크린으로 연희문화적 한국인의 오감을 자극하는 이머시브 전시가 아닌데도 론 뮤익전의 티켓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 무엇이 사람들을 환호하게 하는가? 다양한 관객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선과 시선적인 측면에서도, 메시지 측면에서도 다양한 해석을 낳는 다층적 구조를 띠고 있다.


론 뮤익전에서 사람들은 걸리버 여행기의 릴리풋 소인의 시점으로 보았다가(누워있는 거대한 여인) 


다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토끼굴 속으로, 즉 6전시실 계단 지하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 소인국 릴리풋 인간들이 걸리버를 바라보는 시선이 같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새로운 세계로 가듯 관객도 국립현대미술관 6전시실 지하계단으로 홀리듯 내려간다. 6전시실까지 안 가고 집에 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앨리스 사진 출처 : https://www.lookandlearn.com/history-images/A008091/Alice-in-Wonderland-by-Lewis-Carroll


그 토끼굴에는 두 개 합쳐 1시간 분량 론 뮤익의 작업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영상에서는 마치 루시안 프로이드가 살점을 그리는 것처럼 점토로 얼굴살을 제대로 표현하기위해 이리저리 시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Lucian Freud 사진 출처 : https://www.wikiart.org/en/lucian-freud




작품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관객들의 시선도, 저 멀리 바다 끝을 응시하는 나룻배 위 알몸의 남자도, 관객과 독대하는 거대한 론 뮤익의 자화두상도 모두 카라바죠가 그린 도마의 불신에서처럼 보기 전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그득하다.


전시를 오기 전 SNS를 보는 우리의 표정도, 전시에 와서 짓는 우리의 표정도, 조각의 표정도 

모두 예수의 부활을 믿기 힘들어하는 도마의 표정을 닮았다.


카라바죠, 도마의 불신 incredulity of Thomas, 1602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he_Incredulity_of_Saint_Thomas_(Caravaggio)


유럽회화에서 해골의 의미는 선명하다. 마지막 전시장에서, 이름 모를 죽음이 있었을 법한 옛 보안사 건물터에 지어진 국립현대미술관의 같은 공간에서 7m 높이에서부터 굴러 떨어지는 거대한 해골 더미와 함께 전시를 끝맺는다.


일견 론 뮤익전은 침착하고 차분하다. 그의 수도승과 같은 작업루틴과 완성되어 놓여진 정적 조각은 말을 건내지 않는다. 그러나 전시에서는 온갖 다층적 보이스가 난무한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처럼 독자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다층적인 구조를 통해 풍자와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 관객이 표면적인 이야기와 더 깊은 의미를 모두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어디에 그런 사회적 풍자가 있냐고? 소녀의 손을 뒤에서 꽉 쥔 소년조각이나 자신에게 존재를 완전히 의탁한 베이비를 품에 안은채 무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서 문화적, 철학적 함의와 사회경제적 조건을 읽어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뒷모습 디테일



Ron Mueck. Young Couple, 2013. Mixed media, 89 x 43 x 23 cm. Private collection. Courtesy: Hauser & Wirth. Photograph: Isabella Matheus.



Ron Mueck. Woman with Shopping, 2013. Mixed media, 113 x 46 x 30 cm. Collection: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Paris. Photograph: Isabella Matheus.
















바흐찐의 말마따나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목소리가 서로 충돌하고 얽히는 다층성(다성성 폴리포니)이 읽힌다. 작품의 사이즈도 그렇고, 사이즈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형되는 관객의 시선과 위치도 그렇고, 지하굴로 들어갔다가 죽음을 만나는 동선도 그렇고,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그렇다. 그렇게 층층이 쌓인 여러 보이스가 상상력을 자극해 고작 30여 남짓 적은 수의 그냥 사람 조각일 뿐인데도 우리로 하여금 신기진기한 묘한 경험, 걸리버와 앨리스와 카라바죠와 루시안을 한꺼번에 모듬세트로 경험하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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