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아까 까페에서 우다다 써서 비문이 많음)





리움 티노 세갈전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미술이란 무엇인가? 모두 SNS에 전시사진을 올리는 시대에 미술관은 어떠해야하는가? 를 생각해보기 좋은 전시다.

어떤 의미에서 행위예술이 한국에 다소 늦게 메이저 전시실에 들어온 감도 있다. 리움 앞마당의 페이스갤러리와 아마도미술공간에서는 리움의 위성으로서 같은 테마를 동기화해서 70년대의 수행예술의 효시 이건용과 조영주의 행위예술 영상도 상영하고 있다. 더불어 행위예술의 반복 수행성을 데리다의 차연으로 생각해보기 좋은 동선이다.

티노 세갈은 사진영상촬영을 금지해 관객이 모두가 다른 경험을 기억 속에만 간직하도록 디자인했다. 순간의 경험은 이진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뇌내 기억으로만 남고, 같은 전시를 왔더라도 저마다 다른 시간에 다른 각도와 다른 입장에서 상호작용이 구성된다. 다시 말해, 퍼포머를 보는 관객과 관객을 보며 그들의 카메라를 주시하며 관리하는 요원과 관객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동작을 수행하는 퍼포머들 설령 같은 시공간에 위치했더라도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입구에선 컨템!폴러!리!하며 덩실덩실 춤추는 퍼포머가 맞아주어 발랄한 주토피아 분위기로 시작한다. 극I라도 두려워할만한 위협은 없다.

로비에서는 퍼포머 세 명이 기둥을 만지고 쓰다듬고 화음으로 노래하며 이들이 뭐하는거지 하는 관객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는다.

이어, M2 입구에 있는 일본 상점의 노렌, 장지문, 한국 사찰의 하마석처럼 문지방 역할을 하는 초록색 비즈커튼(무제-시작)이 고정적이지 않은 행위예술의 시작점을 구분해주고 자전거, 축구, 바이올린 퍼포머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바라본다. 언제 누가 어떤 동작을 수행하는지는 모른다. 여기서 관객은 이제 선불교의 깨달음을 제각기 추구해야하는 과업을 떠맡게 된다. 명시적 가르침 없이 각자 알아서 도를 깨쳐야할 것. 앞의 퍼포머는 열반을 지연하고 우리 앞에서 가르침을 드러내는 부처다.

가장 큰 전시장에서 하는 이 구성은 분기별로 바뀌니 그 누구도 같은 전시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주토피아에서 느릿한 북유럽 인디영화 분위기로 전환하더니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14점에 둘러싸인 방의 <키스>에선 <어바웃타임> <노트북> 같은 로코풍 진한 로맨스로 톤체인지한다. 물론 <색, 계>, <폭풍의 언덕>까지는 아니다.

남녀 두 퍼포머가 바닥에 누워 이미 정해진 안무 가이드라인에 따라 천천히 로댕과 클림트와 뭉크의 키스와 제프쿤스의 메이드인헤븐의 포즈를 수행한다.

같은 안무를 반복하지만 퍼포머-관객-시공간의 조합은 다르다. 이런 반복 수행성은 데리다의 차연을 호출해 설명함이 좋다.



엘베를 타고 1층에 올라가면 로댕 조각 포즈(아리아드네)로 바닥에 누워 천천히 움직이는 퍼포머를 권오상의 미국 백인 중년 남성풍 조각(캄보드)이 벽에 기대어, 동양 젊은 여성풍 조각(Bbd)이 누워 바라본다. 브리콜라쥬를 차용한 권오상의 조각과 그 곁으로 개념미술의 창시자 솔르윗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수행성, 차연, 구성주의와 개념적 관련성이 있어서다 자코메티, 최만린, 이우환의 관계항, 고 강서경 작가의 조각 모두 행위예슬의 의미를 톺아보기 좋은 현명한 배치다.

이런 일련의 경험을 지나 보는 이는 물질 없는 예술이란 곧 최종적으로 고정된 물성있는 작품만 미술이 아니라 순간의 행위와 일시적 상황으로만 고정되는 것도 작품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큐레이터의 논문투 전시설명이 많았던 다른 전시와 달리 설명문도 최소화되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행위예술의 선구자 Marina Abramović(와 연인관계)나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초빙된 니콜라 부리오는 우리나라에 어느정도 유통된 이름이다. 특히 부리오는 관객 사이의 관계 자체가 작품이라는 그의 관계적 미학을 판소리 마당에서 관객이 즉흥적으로 추임새를 넣는 것에 착안해 비엔날레를 기획했다.

티노 세갈은 이런 맥락 속에서 한결 더 나아가

작품은 오브제가 아니라 사건 즉 이벤트라는 점을 부각시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잠깐 발생하는 상황성에 주목한다 리움은 세갈 전시를 통해 고미술 컬렉션 소장중심 미술관이라는 기존 고착된 이미지에서 프로젝트 기반으로 변하며 라이브 경험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탈피를 시도한다.

세갈은 디지털의 최전선을 달리는 서울 중심부에서 가장 비디지털적 예술을 시도하고, 초고속 통신망과 5G의 한복판, 반도체 생산의 메카에서 SNS와 클라우드와 NFT같은 디지털 아카이빙을 금지함으로써

관객을 포스트 휴먼시대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학습시키고 이와 함께 리움미술관을 물건을 전시하는 수장고에서 경험을 생산하는 맞춤형 장소로 환골탈태하게끔 한다.

이런 맥락에서 티노세갈전에 들어 온 사람이 작품을 찾고 보는 순간 작품 속에 들어와 작품의 일부로 구성됨을 경험한다. 퍼포머는 의례를 행하고 관객은 현장 공연에 참가해 기록이 아니라 기억만을 남긴다.

이런 방식의 개별사건 중심 예술은 예술을 소비하는 방법을 전환하는 실험 프로젝트다.

그러니까 세갈은 아무리 노동집약적이라도 거래가능한 최종 완성본 형태로  존재하는 캔버스, 물성있는 조각(근처 타데우스 로팍에선 김주리의 거대한 웻소일이 있다), 파일영상으로 의미를 정박시키기를 거부하고, 이런 점에서 예술의 존재론(온톨로지)를 스나이퍼철럼 겨냥해 타당하고 고정관념을 깨부시며 일갈한다.

미술은 잠깐의 대화, 매번 바뀌는 정해진 몸짓, 일시적 상황일 수도 있다고.

이런 시각에서 <키스>를 보면 바닥에서 서로 천천히 자세를 이동하며 미술사의 익숙한 연인포즈를 보여주는데 분명 정확한 동작순서를 루프 구조로 반복하는 게 보인다.

앞서 언급한 유명 키스도상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지만 완전히 똑같이 재현하는건 아니고 몸의 구도만 차용한다. 어차피 완벽한 재현도 없고 그를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회화사에서 사랑을 표현한 몸의 문법이 벽에 붙박힌 그림과 받침대 위의 조각에서 떨어져, 완성태로서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움직이는 것을 보게된다. 사진촬영 금지라는 정언명령 속에서도 이미 이미지는 살아 있는 복제다.

그림은 신체화되고  이미지는 사건화되며 역사는 현재화 된다. 훈련된 안무 퍼포머들은 특정 포즈를 오래 유지하지 않고 다시 다른 제스쳐로 이동하는데, 몸의 연속적인 변환이라는 과정 속에 일종의 살아있는 조각같기도 하다.

자크 데리다는 차이 속에서 의미가 생기고 고정된 본질로서 의미는 없고 그저 반복 속에 계속 생성된다고 말했다. 그의 차연 개념이다. 디페항스라는 같은 음성이지만 처자를e에서 a로 바꾼 창의적인 기획이었다. 의미는 항상 반복되지만 같지 않다. 이에 감화를 받은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와 사회적 규범으로 수행성을 확장할 때도 핵심은 반복에 있었다.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만 언어, 규범, 젠더, 의미가 존재하지만 완전하게 동일하게 반복되지는 않는다. 반복 가능성 속에 있는 미세한 차이는 맥락 때문에 생긴다. 같은 기호, 같은 문장, 같은 제스쳐, 같은 의례도 다른 시공간, 다른 화자, 다른 맥락 속에서 의미가 바뀐다. 세갈도 같은 안무, 규칙, 작품이지만 미술관 장소적 특성과 관객특성에 따라 매번 다른 의미를 낳기에 동일한 작품도 매번 다른 사건이 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적 반복을 적절히 설명하는 예시다.

퍼포먼스 예술의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매번 현재적인 것 같음에도 순수하게 완전한 현재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예술이라는 점이다. 왜냐면 정확히 같은 퍼포먼스는 절대 다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될 때마다 변하기 때문이다. 무상, 즉 반복되는 세계에서 동일한 것은 없다.

반복은 동일성을 만들지 않는다. 반복은 차이를 생성하고 그 차이가 의미를 만든다. 따라서 수행성은 차연의 실천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은 퍼포머와 관객과 장소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펄럭이는 깃발 같은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금 더 고전으로 들어가보자면 판타레이(πάντα ῥεῖ), 즉 모든 것은 흐른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유전론자(流轉, flux)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No man ever steps in the same  river twice!"

우리는 같은 강에 들어가지만 동시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이다.

(ποταμοῖς τοῖς αὐτοῖς ἐμβαίνομεν καὶ οὐκ ἐμβαίνομεν)

강이 흐르며 물이 계속 바뀌므로 같은 성분의 물에 담그지 못한다. 그러니 같은 강이 아닌데, 강 이름(로고스)는 동일하니 동일성은 유지된다. 전시의 이름은 무제인데, 무제라는 이름만 동일하고 그 안의 변화하는 퍼포먼스는 퍼포머의 상태와 분위기와 관객의 응시에 따라 매번 다른 것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강은 동일하지만 동시에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나 데리다가

기호는 반복되지만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나 같다는 말이다.

공통분모는 동일성은 반복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

그런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고 싶다. 헤라클레이토스 더 급진적인 유전론자였던 크라튈로스(Cratylus)와 세갈이 닮아 보인다. 이미 벤야민적 디지털 영상 복제시대에 유전론은 테스트되었고, 사진촬영, 기록금지라는 


세갈의 아이디어는 극단적인 유전론자 크라튈로스에 가깝다고 본다. 애초에 동일성도 없다. 기록된 것도 없다. 같은 전시도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인용문에서 단독저서없이 발언으로만 간접 언급되는 크라튈로스는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자다.

헤라클레이토스를 더 밀어붙여 단 한 번도 같은 강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디지털 영상시대 반복수행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기록금지를 요구한 오직 순간의 차연으로만 존재하는 티노 세갈의 생각이 크라튈로스와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헤라클레이토스는 강은 계속 변하더래도 강이라는 동일성은 유지된다고 생각했는데(변하지만 로고스는 존재)

크라튈로스는 변화가 너무 급진적이어 동일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강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던 리움 티노세갈전의 이벤트들이 과연 같은 전시인가? 개별적으로 관객은 관람했다는 일, 퍼포머는 수행했다는 일, 관리요원은 감시했다는 일만 있고, 애초에 동일성이 있다고 조차 말할 수 없다.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사건을 본 무리조차도 같은 혀를 공유하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그만큼 설명텍스트도 결여되어있고 오직 퍼포먼스를 보는 나만 명징하고 나머지는 다 가변적이다.

단어를 말하는 순간 대상은 이미 변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관측하는 순간 위치가 바뀐다. 그래서 말도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했다. 동일성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나와 까페에 앉아 서로 느끼고 본 것을 말하는 순간 의미가 미끄러진다.

데리다의 차연에서 기호는 대상을 고정하지 못하기에 의미는 계속 미뤄진다. 언어의 불안정성

기호와 대상의 간극.. 의미의 지연. 아 화장실 가야해서 여기까지만. 아메리카노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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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먼슬리 클래식) 먼슬리 클래식 15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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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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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단상
한중일 구매형태
교복 기사보고 생각

일본 100만원 비싸고 만듦새 좋은 교복을 선배로부터 물려받아 잘 쓰고 세탁해서 물려준다. 내부 인맥과 시스템중요
중국 2-5만원짜리 츄리닝 염가로 사서 막 쓰고 버린다. 초저가와 초고급 양극화가 너무 심하다. 지니계수 0.4 이상 극단적
한국 개인이 사기엔 비싼데 어쨌든 사고 입다가 버린다. 각자도생 사회

렌탈패밀리보고 생각. 문화권별로 체면치레용 돈을 쓴다.

일본 강한 정상지향성과 경직된 시스템. 정상가족을 연기한다. 지방에 살아도 상관은 없는데 문제없는 사회적 모습(겉모습=다테마에)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대리사죄, 풍속업소

한국 강한 중앙 지향성. 과거제도 지속 공부 잘해 성공한 삶을 연기한다. 입시와 교육서비스 무한지출

북한 극장국가. 인류학자 권헌익에 따르면 카리스마를 독점하는 권력은 예술정치로 상징과 의례를 활용한다. 위세를 뻐기고 권력을 연기한다. 군사력, 핵

미국. 협의로 끝날 일을 소송으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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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의 2026년 아카데미 대예측
42분 내내 했던 말 다 동의한다
일단 <씨너스>와 <원배틀애프터어나더> 투 탑이 상을 거의 싹 휩쓸겠지
이에 더해 햄넷,센티멘탈, 넷플케데헌, 프랑켄까지 본 사람은 꽤 될 것 같다

나도 특히 제시 버클리는 <햄넷>으로 여우주연상 받을 것 같은데 심지어 평론가는 전재산의 99%를 걸었다. (최근 80% 대출받아서 서재 빌딩 구매 및 리모델링했는데 그래도 괜찮은건지?)

제시 버클리는 <브라이드!>에서 전혀 다른 연기톤을 보여줘서 확실하게 연기력을 입증을 했다

언급된 영화 중 <웨폰><시크릿 에이전트>를 나는 못 보았고, 평론가가 국내에서 볼 방법이 없어서 못 봤다고 언급한 <마티 슈프림>도 못 보았다

평론가가 모두가 다 잊을 수 없다고 말한 <씨너스>의 중후반부 장면은 그 노래 롱테이크(중국 경극도 같이 나오는)일까, 미시시피의 광활한 벌판일까 둘 다 일까

https://www.youtube.com/watch?v=u8Er-cVcb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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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후이의 글을 읽자


2016년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랑 몇 년 전에 Cybernetics for the 21st Century에 수록된 Machine and Ecology만 읽어보았는데 정말 놀랄 노자였다.



https://www.e-flux.com/journal/161/6776851/the-university-within-the-limits-of-automated-knowledge



홍콩이 낳은 희대의 기술 철학자 육후이의 글
e-flux Issue
March 2026

The University Within the Limits of Automated Knowledge
자동화된 지식의 한계 내에 있는 대학

구성은 세 개로 되어있다. 빠르게 스키밍했고 중간 어려운 철학적 논의 빼고 대충 짧게 (인간인 내가) 엉망진창 요약하고 내 생각을 덧붙여본다.


1. Anti-human, All Too Human
2. The Conflict of Organs
3. The End of Machines


인간보다 AI가 더 많은 지식을 생산한다면 지식생산의 권위가 인간에게 있는 것일까?

이미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푸코의 사회적 제도로서 저자가 예견한 것
리오타르는 이미 1979년 컴퓨터가 지식을 생산하는 시대를 예측했다.

인간은 지식의 주체가 아니게될 것이라 했다 포스트모던 인식론은 불확실성을 테마로 삼고 포스트모던은 이미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포함했다

인간이 지닌 감정적 오류가 없는 AI는 지적 영역에서 인간을 능가하니 이성적 인간을 기르는 대학의 역할이 흔들린다

대학은 기계 관리 기관이 되고 교육은 AI화, 즉 지식생산이 자동화공장처럼 된다. 근데 AI는 할루시네이션이 있다.

(중간 칼슈미트,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데카르트, 앙리 베르그송 생략)
인간은 기술에 적응해야하고, 기술을 인간목적에 맞게 재전유해야한다. 기술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것.

(중간 칸트 생략)
인간이 생산하는, AI가 아닌 지식은 삶에 대한 지식이다. 어떻게 함께 살아야하는가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AI문제는 기술발달의 문제인 동시에 지식권위의 정치문제다.
중세에서 근대를 거쳐 교회에서 대학으로 지식의 권위가 이동했고
AI시대에는 데이터센터로 이동할 것이다.
따라서 향후 AI시대 대학은 지식 생산기관이 아니라 지식 해석기관으로 재변모해야하고
AI시대에 인간만 만들 수 있는 지식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이에 기대서 생각해보는 것은


미래 대학에서는, 기술과 상호작용을 다루는 인터페이스학이 전필이 되리라 생각한다. Interface Studies.


알고리즘 편향, AI slop, 페이크뉴스와 가짜데이터정치, 포스트트루스시대, AI증거 판단의 진위성(노머시:90분 영화에서처럼) 같은 주제를 다룬다.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접근방식을 교육한다. 모두가 큐레이터가 되어야하는데,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어영부영살고, 제대로 사는 이는 드물 듯.

AI는 암기, 패턴 인식, 데이터 분석과 요약은 잘하지만 문화적 맥락 이해, 거시적 판단, 역사적 상징 해석을 잘못하니, 인간은 고차원적 사유를 해야하고, 그건 사실 AI이전에도 일부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단히 독서를 많이 한 이들만 가능한 것. 역설적으로 AI를 잘 다루는 이는 AI 디톡스한 이가 아닐까. 전쟁을 이기는 사령관이 현장에서 검을 휘두르지 않듯이.


그리고 중세-근대-AI가 선형적으로 발전하는게 아니라 AI시대가 다시 중세로 돌아간 것일 수도. (계속 테크중세사회 이야기했었다)

피곤해서 여기까지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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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스키밍하며서 중간 생략하면서 이렇게 요약했는 걸 첫 문단으로 시각화. 인간보다 AI가 더 많은 지식을 생산한다 면 (지식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낳는데) (~~~가 이미 다 예견했던 것처럼) 지식생산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낳는데 +(그럼 인간에게 있는 것일까? ) ---- -> 인간보다 AI가 더 많은 지식을 생산한다 면 지식생산의 권위 는 인간에게 있는 것일까? 중요 열쇳말로 서론을 질문화하며 요약

(내 방식대로 대충했다는 뜻)

내가 엉망진창으로 요약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쓴 글이다. 그런데 저자 문체 그대로 따라가면 너무 어려워서 톤다운해서 일부만 추출해서 쉽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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