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럽병사의 비밀 - 셀럽들의 은밀한 생로병사
KBS 셀럽병사의 비밀 제작팀 지음, 한산이가(이낙준) 감수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밌겠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처: https://www.threads.com/@seunghojung_art/post/DLNkmERSbOK?xmt=AQF07WDVc0hjFLthZW0Nh2ieUcUqeJR8ZvP6mhXsSxYtqw



연보랏빛이 깃든 박하색이 서걱이며 표면에 번지는 가운데 해쓱한 붓자국이 한들한들거리며 청람색 물빛 위를 감아돈다. 햇살이 수면 위로 살포시 기어올라 귀를 간질이는 소리를 낼 듯하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색이 아닌 기척이 남아, 팔랑팔랑, 살랑살랑, 풀잎도 아닌 것이 그림 위에서 서로를 다정히 어루만진다. 황록색 잎맥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는 하단과, 차분한 유백색과 갈매기회색이 뒤섞여 살짝 서로를 밀며 레몬빛의 플로우를 눌러앉힌 상단이 대조를 이룬다. 청람색이 감도는 흐릿한 터치 사이로는 레몬베이지빛이 얇게 퍼지며 똬리를 튼다. 무용수가 치마단을 들고 무대위를 움직이듯 붓끝을 살짝 들어 캔버스 위를 스쳐간 듯한, 연둣빛이 감도는 맑은 회색이 가늘게 떠 있고, 그 사이로 간혹 잘 익은 배색처럼 보이는 바나나빛과 밝은 오크색이 미세하게 배어난다.


공단과 다문화로 유명한 구로의 항동에 서울시 최초 시립수목원인 푸른수목원이 자리잡고있다. 삭막한 잿빛 콘크리트의 숲 가운데 외로이 떠있는 생태의 숲. 푸른뜨락, 내음두루, 한울터, 돌티나라 같은 낯설면서 아름다운 순우리말 이름들. 드렁허리 같은 희귀한 물고기가 사는 항동저수지를 모네의 수련 구도로 감실감실 그린 정승호 작가의 2025년 회화다.


색이 숨결처럼 번져나가며 그림의 숨구멍이 된다. 초록 한 줌, 노랑 한 자락이 툭툭 떨어지며 맴도는 물비늘처럼 화면을 가로지른다. 구체도 없고 선도 없거니와, 대신 바람에 젖은 풀잎이 흘러가는 듯한 찰랑임이 있다. 빛이 물러앉고, 어둠이 깃들며, 물감이 비비적거리며 섞인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머무른 맑은 여름빛. 색깔이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색 사이의 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야할지니. 그림이 보인다기보다 들리는 풍경이다.


중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오며 스트로크는 수면에서 캔버스 정면으로 이동한다. 진부령에서 봤던 2024년 작품들과 같은 회화적 고민의 결이다. 갈피가 없고 산란하는 자신의 존재론적 고민을 냅다 그림 위에 던졌다. 작품 앞에서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진실되게. 점차 채도가 짙어지고, 색은 눅진하게 겹쳐진다. 그림의 허리에선, 블루그린과 코발트 계열의 쿨톤이 눌리며 얹히고, 그 틈을 가르듯 연청색과 송홧빛이 반짝인다. 동글게 쌓인 연잎인듯, 황록, 연록, 비취 계열의 다채로운 그린들이 그림을 풍성하게 덧입히고, 붓터치가 도톰한 구획에서는 물푸레빛과 청람색이 팔레트에서 큰 붓에 의해 옮겨져 캔버스 위에 자리잡았다. 좌측 중단과 하단에는 감귤색 터치가 보이는데, 채도가 강하지 않지만 그림 전체를 깨우는 미세한 온기다. 


모네의 수련 연작을 연상시키면서도, 이 회화는 자연의 재현이라기보다 전환에 더 가까운 접근이다. 자연의 기억을 시각적 질감으로 환기시키되, 구체적 모사의 의무는 부담하지 않는다. 풍경화이면서 동시에 풍경에 대한 지긋한 명상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안 보이게 한 것이다. 무엇이 보이느냐와 무엇이 보이지 않느냐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이 화면에는 중심도 없고 고정된 시점도 없다. 위아래도 모호하다. 이는 의도적으로 시선의 흐름을 분산시키고, 관객이 하나의 관념적 구도나 중심에 집착하지 않도록 만든다. 위아래 관계없이 그저 흐릿한 어슴푸레함 속에 잎사귀가 퍼진다. 시선은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물위를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을 걷는 눈길. 단일시점과 과학적 원근법을 배제하고 또렷한 응시대신 존재의 머뭇거림을 유도하는 방식. 그것이 작가의 화두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팔려는 그림이 아니라 살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기가 아닌 무언가는 그릴 수 없는 사람이기에, 오랫동안 캔버스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지 그림은 무엇인지 고뇌해왔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인상파를 따라 그리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인상파의 삶을 살려고 한 사람이다. 그러한 생각의 실타래가 캔버스에서 전해져온다. 붓질은 언뜻 제멋대로처럼 보이지만, 그 불규칙이 만들어내는 일렁임이야말로 시선을 붙잡는다. 정승호 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기에 고뇌 끝에 나오는 붓질은 선명하지 않지만 확실하고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시각의 확산은 감각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물속을 보는가, 수면 위를 보는가, 혹은 빛 그 자체를 응시하는가?


회화는 추상과 인상의 경계에서 붓질을 시각언어화한다. 형태의 묘사보다는 붓의 속도, 압력, 방향, 그리고 색의 겹침이 감정을 전달한다. 예컨대 아까 언급한 좌측하단의 킬링 멜로디 오렌지빛 조각들은 온기와 활기를, 그 아래의 짙은 녹청색 클러스터는 뭉근히 침잠하는 감각을 형성한다. 이외에 모든 붓질에 작가가 느낀 감정들이 스쳐가고 회화는 마치 시각적 일기장처럼 빚어진다. 그리하여 보는 이는 장면에서 서사를 독해하기보다는, 어떤 감각을 통과하거나 통과당한다. 

조화, 구도, 균형, 색채의 구성, 조직화 같은 전통적인 미의 기준을 우회하는 대신, 불균질하고 비정형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스트로크의 스타카토 리듬, 오른쪽으로 약간 쏠려있는 비대칭적 구획, 불투명과 투명이 공존하는 색배합이 밴드의 잼세션을 닮았고 시각적 재즈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보는 이는 색을 읽기보다 색 사이를 건너뛴다는 점에서.


작가가 무엇을 그리는가,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보다, 회화가 어떻게 사유되는가에 대해 그림이 우리에게 재삼 질문을 던진다. 나름 답하였으되, 끈덕지게 계속 물어본다. 색채는 대상의 피부가 아니라 정신의 흔적으로 마음의 눈으로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보인다. 작가는 수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수면과 감각 사이에 떠도는 찰나의 순간을 붙잡으므로, 보는 자는 작품의 표면 위에서 머무르지 말고, 시각적 표피를 투과해, 붓질이 남긴 지층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한꺼풀 더 보인다. 그림을 즉물적 이미지로서 소비하기보다, 자신을 던져 감각과 사유가 엇갈리는 장소로서 대우해야한다.


그런 연유로, 이건 연못이 아니다. 풀도 아니고 나뭇잎도 아니다. 항동의 자연이라기보다 우리 마음의 풍경이다. 실제를 따라하지 않은 이 회화가 우리 기억 속에 새근새근 살아숨쉬던 추억 속의 무언가를 더듬는다. 적확한 풍경을 모사하는 자는 뿌연 안개를 걷어내며 선명하게 그리지만, 이 그림은 오히려 그 안개를 머금은 채 둥둥 떠다니는 까닭이다. 모사가 아니라 모색인 것이외다. 기억의 껍질을 쓸어내며 새로운 풍경의 형상을 짓고 있다. 정지하지 않고 흐르는 꿈의 살결을 따라 미끄러지는 붓끝이 남긴 자국은 흡사 들숨과 날숨의 아름거림, 곱디고운 속삭임, 혹은 잊힌 기억의 외마디, 혹은 떠도는 감정의 자락, 혹은 빛과 물과 공기가 서로를 닮아가는 풍경. 보는 이는 보면서 안에 잠긴다. 


그림을 말로 옮길 때 비평가는 구조를 따지고, 문학가는 마음의 결을 헤아린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생각 속에 사로잡혀 글을 남긴다. 정승호 작가의 그림에 대한 생각은 이론와 에세이, 둘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차분한 혼란이다. 나는 이 인상을 명확히 설명할 수도 완전히 침묵할 수도 없다. 그저 회화를 바라볼 뿐. 붓이 남긴 색덩이들을 하늘하늘 따라걷다 보면, 그 끝에 말을 잃고야 만다. 그 순간, 해석과 상상이 협업하는 시가 시작된다.


그림이 나를 물가로 이끌지 않고, 물속으로 자빠뜨린다. 일반적인 그림 감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감각과 감정, 언어와 무언이 뒤섞인 하나의 인상체험이다. 그림은 풍경의 외피가 아니라 내면의 풍경, 몸 안쪽에 자리한 꿈자리 같은 것이다. 보고 싶으면, 보지 말고, 눈을 감고 느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 <더러운 돈에 손대지마라> 봤다. 비운의 창고영화로, 7년 묵힌 영화다. 물류창고 컨테이너 보관기간도 3년이 최대고, 심지어 인삼도 7년 이상되면 썩는다는데. SNL 숏폼 트렌드도 몇 주면 바뀌는 세상에 7년을 묵은 비운의 창고 영화다.


1. 구체적으로 왜 7년이냐? 찾아보니

2018년 12월에 크랭크인했는데

2019년 3월에 크랭크업하고 5년 7개월만인 2024년 10월에 개봉하고 8만5천명이라는 처참한 기록을 안은 채

2025년 6월에 세컨드런으로 넷플릭스에 넘어왔다


2. 연기는 좋다. 특히 김대명의 연기가 준수하다.


3. 유태오 배우가 중국 범죄조직 보스의 똘마니로 도살 전문 망나니로서 도끼칼을 들고 고광석(허동원 분)을 막 베는 장면이 있는데

유태오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2022년 헤어질 결심(박찬욱 감독), 2023년 패스트 라이브즈(셀린 송 감독)보다 훨씬 더 어렸을 시절이다.


영화가 얼마나 타이밍이 늦었는지, 그 기간 동안 사람이 얼마나 자랐는지, 시간이 지나며 얼마나 얼굴이 성숙해갔는지 볼 수 있다. 유태오가 이렇게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면 포스터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단역이다.


4. 한창 2017년 즈음에 개봉했으면 범죄드라마, 느와르, 액션 스릴러 그리고 범죄경찰의 피카레스크극으로서 재밌었겠지만 코로나의 타격으로 시절을 많이 잃었다.


5. 인천 화교나 중국 범죄 조직에 대한 스테레오타입도 문제지만, 한국에 넘어온 중국 범죄조직보스의 중국어가 너무 형편이 없다. 한국인 배우인 것이 너무 티난다. 거의 페이퍼타올이 요기잉네 수준이다


6. 극의 진행이 중간부분부터 힘을 잃는다. 동기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고 관객에게 그 설득력을 잃은 까닭이다. 특히 메인캐릭터의 중간 행동전환은 납득이 잘 안된다. 무엇보다 아이 수술비 마련이라는 모든 행동의 이유가 너무 올드하다는 것이 함정. 캐릭터가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다 이 선량하고 어린 아이의 비싼 수술비를 마련해야하는 당위성에서 비롯되는데

과연 아이는 무조건 선한가? 개인적 불행이 사회적 범죄를 정당화하는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7.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처럼 느와르의 엔딩은 무조건 아이와 함께 해외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헬조선을 탈출해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동남아 휴양지에서 40억 플렉스하면서 살고 싶은 한국인의 꿈처럼 느껴진다.


8. 8. 영화에서는 공중전화가 등장한다. 핸드폰을 버리고 도망치는 형사가 주인공과 연락하기 위해 사용한다. 아직도 재난 등 공공적 필요에 의해 공중전화를 유지하지만 그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 듯하다. 특히 MZ세대 중에 공중전화를 사용해 본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일단 동전을 안 들고 다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상대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다. 그래도 10년대까지는 지하철에서 교통카드로 공중전화를 이용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역사 안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이 공중전화신이 과연 오늘날 대중에게 소구력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공중전화가 어디에 있는지 스마트폰으로 찾아야할 정도일 듯한데. 무엇보다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통신매체의 발달은 사람들의 소통방식뿐 아니라, 영화 속 연락장면의 연출방식도 함께 바꿔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삐삐와 공중전화의 시대는 5091(오늘밤에 전화해줘)를 받고 공중전화에서 집전화로 연락했다. 영화에서는 상대를 다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장면이 많았다. PC통신과 삐삐를 통해 익명으로 소통하면서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는 서사인 <접속>이 대표적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선 공중전화를 통해 만나고, <올드보이>에서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술 취한 채 가족하고 통화하다가 머리를 가격당하고 사립 감옥에 갇힌다.


이후 벽돌폰이 등장하면서 이동 중에도 통화가 가능해졌지만 메시지 전송은 제한적이어서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감정을 전했다. 애니콜 시대에도 한 달 요금제에 따라 문자 알 수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긴 메시지를 여러 번 보낼 수 없었다. 카톡과 완전히 다른 감성이다. 게다가 이때는 지금의 자판형 키보드 쿼티와는 달리 버튼 하나에 여러 글자가 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지로 버튼을 여러 번 눌러서 기호를 입력해야했다. <봄날은 간다>나 <클래식>에서 영화 속 연인들은 몇 번이나 버튼을 눌러 잘 자 한마디를 보내곤 했고 이런 짧은 시적 한 마디에 많은 감정과 의미를 부여했다. 또, 답장이 오기까지의 간절한 기다림이 극의 긴장감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니 통신매체의 발달은 커뮤니케이션기술, 도구 제도의 발전이면서 동시에 생활양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사람이 감정을 전달하고 표현하는 리듬, 속도, 거리감, 기다림에 관여하고 관계의 진정성과 만남의 피상성 등을 함께 변화시킨다. 이러한 소통의 모습이 옛 영화 속 연출방식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지금은 스마트폰의 시대. 영상통화, 실시간, 무제한, 장문의 메시지, SNS에, GPS 위치공유까지 연락방식은 다양해졌고, 이에 맞춰 영화 속 등장인물 간의 연락방식, 관계 거리감도 달라졌다. 지금은 필요하면 바로 연락하고, 연락을 안 받으면 "아이씨 왜 전화 안 받아!"라는 대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접속> <클래식> 때는 상상할 수 없던 대사다. 느리게 다가오던 감정의 고조 대신 즉각적 반응과 끊임없는 연결이 새로운 서사의 리듬을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보통 70-90명 오는 내 블로그에 어느날 갑자기 200명, 400명씩 오는 일이 있다 왜 그럴까? 오늘은 290명이 왔다. 무슨 일일까? 네이버처럼 수익화수단이 없고 유입트래킹이 안되는 알라딘서재라서 사람들이 어떤 검색경로로 왔는지 알 수 없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울대미술관에 다녀왔다. 도상(길 위의) 추상전시가 엊그제 열렸다. 9.14까지 하니 시간은 넉넉하다. ISEA 국제학술대회와 함께 1주일 남짓 잠깐 열었다가 급히 폐막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5.23-29) 전, 올해 상반기(2-5월)은 무기의 시대(무기세)전이었고 작년 이맘때 중반기 전시도 이번과 마찬가지로 미적 감각과 추상에 관한 주제였다.


언뜻 알 수 없는 것들만 잔뜩 그린 추상회화들인데 붓질, 구성, 색감, 구도 등에서 하나도 같은 작가가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첨예한 시대의 화두를 읽어내야하는 현대예술이거나 미리 미술사를 잔뜩 공부해가야하는 유럽회화 전시라기보다 가서 보고 느끼는 체험이 중요한 전시다. 물론 그 체험은 이머시브전처럼 직관적이고 유희적인 것은 아니고 명상적이고 지적이다. 작품을 응시하는 동안 검실거리는 내 마음 저편 어딘가에서 움직이는 또 다른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시간이 관건이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아시아 최초로 스웨덴 영성추상작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고전이 열리고 부산으로 순회전시를 가운데 전시 서문은 그녀의 이름을 빌려와 영계의 하이마스터와 대화한 기록이라고 추상의 의미를 잠시 세워둔다. 강릉솔올에서 전시한 아그네스 마틴의 단색화를 빌려와 고요한 순수함의 느낌을 빌려온다. 칸딘스키와 노자도 언급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지혜로운 옛 사람들의 말을 빌려오지 않아도 추상회화는 그 자체로 단단하게 서 있는 자명한 진리다. 회화 앞에 대면한 관객은 마치 작가가 세상앞에 우연히 자기를 내던짐으로서 실존한 것처럼 회화 앞에 갑자기 내던져진 자다. 자기가 설정한 네비대로 저 멀리 죽음으로 가는 와중에 그림도 주어져있고 존재도 주어져있으니, 특별한 목적 없이 툭, 하니 기투된 자로서 회화의 숨결을 느낄 뿐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여러 추상회화가 있고, 모두 영성, 추상, 단색, 명상, 서정 등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단 하나 결을 달리하는 작품이 있으니 이창원 작가의 숨쉬는 반사(Breathing Reflection)라는 제목의 LED 설치작품이다. 조명 자체를 회화로 차용해 반사, 투과, 발광을 조형적으로 실험하는 작품으로 제임스 터렐이 강하게 생각난다. 하지만 색의 층위나 조명의 각도에 따라 변화의 정도가 확연하고 아크릴 페인트와 합판의 사용이 장난감같은 느낌이 있어 터렐의 Wedge같은 압도적인 성스러움은 없다. 외려, 귀여운 성스러움 같은 아이러니한 느낌이다.


최근 한강진 페이스 갤러리에서도 시간당 20명 제한, 코스당 10명 제한으로, 찰칵 찰칵 사진찍는 방해 없이 제임스 터렐의 작업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끔했다. 나의 첫 제임스 터렐은 뮤지엄산이었고,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사실 거대한 빛의 공간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 황홀한 경험을 못 잊어 이후에 특별 호라이즌룸도 신청해서 저녁 17시에서 18시까지 대략 40분동안 깨끗한 원주의 하늘에 엷은 청현색 땅거미가 어둑하니 내려앉는 시간을 스카이스페이스에서 감상한 적도 있다. 터렐관 예약자 전용 스카이스페이스의 테라스 앞에는 오크밸리 골프장의 진록색과 취람색 필드가 널찍이 펼쳐져 있었고 모두가 퇴장하고 비어있는 뮤지엄 산의 까마반드르르한 야경을 걸어 돌아오는 것까지 포함해 참 따스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터렐의 간츠펠트나 웨지와 처음 마주하는 많은 이들은 마치 빛이 빛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 들어선 것 같은 신묘한 감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벽도 창도 없는 무채색의 공간에서 빛이 마치 온몸을 감싸는 듯한, 아니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만 같은 느낌. 그때의 푸른빛도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이 어스름하게 물드는 저녁, 개와 늑대의 황혼의 시간, 그 극도로 얇은 틈새에만 피어오르는 빛깔이다. 얇은 박막같이 퍼져있는 색이 이 서서히 시야를 점령한다. 분명히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눈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모르고, 정체모를 불안함보다는 잊고 있던 평온이, 시끄러운 도시의 번잡함이 아니라 온유한 공기의 잠잠함이, 밀려드는 불면을 다독이는 소리 없는 다정함이.



제임스 터렐의 빛은 존재의 가장 얇은 피부에 살며시 입맞춘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데, 물질로서 빛이 아니라 물질이 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것이 눈 앞에 있다. 형체도 소리도 없이 스스로를 감지하게 하는 빛의 현존이 밀려온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그냥 왠지 내 안 어딘가에 작은 평온의 윤슬이 자리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렇게 참 안온한 일일 수 있다니.


터렐의 공간 안에서 우리는 빛을 본다기보다 빛에게 보여진다. 사방을 가득 채운 청명한 색의 숨결은 우리의 감각의 주도권을 되찾아 다시 우리에게 되묻는다. 현대예술의 사색가이자 수행자인 터렐의 투명한 질문. 정말 보고 있었니?


그렇게 터렐은 관객의 눈을 빌려 지각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탁월하다. 익숙하다고 믿었던 빛의 감각을 완전히 다시 짜 맞춘다. 그 세계에는 도식도 중심도 없다. 오직 밀도와 약간의 망설임만 있다. 노자의 구체적인 구절이 생각난다.


道沖而用之或不盈(도충이용지혹불영)

淵兮.似萬物之宗(연혜.사이만물지종)


도는 비었으나 아무리 써도 차오르지 않고

그윽하도다 마치 만물의 으뜸인 것 같다


빛이 입자도 파동도 아닌 숨쉬는 존재, 혹은 도라는 것은 이런 느낌 같다. 탄닌감이 가득한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난 뒤 입 안 가득 짝짝거리며 퍼지는 미세한 떫은 맛의 차오름. 혹은 고소하고 구수한 빵 굽는 냄새가 동네를 감싸안는 느낌. 그렇게 무채색 벽에 투사된 선홍빛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홍조를 띤 보랏빛으로 스며들 때, 우리는 실체 있는 무언가를 육안으로 보는 느낌이 아니라 빛이 스스로 되는 것을 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미술이 반드시 실제 대상을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을 치료해준다. 터렐은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다. 유명하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직업이 아니고, 삶의 태도다. 그는 색을 칠한 것도 형태를 새긴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의 방 안에서 평화를 느낀다. 그는 직업종교인도 아닌데. 그 앞에서 울고 웃는다. 이 불가해한 감정의 기원은 우리가 일상에서 외면하던 감각에 몸을 맡기면서 찾아온다. 빛의 무게, 색의 체온, 공간의 숨결.


하지만 그 방엔 본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눈은 너무 바쁘다. 그러다가 시각중심의 감각경험이 구겨진다. 눈앞에 번지는 빛은 도무지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 덩어리를 보고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중얼거리지만, 사실은 아무도 뭔지도 모르면서 우러러본다. 서커스나 뮤지컬의 잠시잠깐 스펙타클이 휘발되는 것처럼 가볍지는 않다. 뭔가 단단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렇게 터렐이 교묘하듯, 이창원도 교묘하다. 터렐의 벽보다는 작은 합판에 반사된 색과 빛이 사람의 인식을 벌거벗긴다. 빛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뭉게뭉게 일어난 감정이 자신이 보고 있는 작품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리고 진짜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앞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진짜라는 착각만 진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보고 왔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경험은 정말이었으니까. 인식론과 존재론을 몰아붙이기 위한 조용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좀처럼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나가면 다시 경험할 수 없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지만, 사진으로 그 순간의 느낌이 다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빛은 더 이상 조명의 일부가 아니며 원근감을 주기 위한 인상화의 실험이나 구상화의 배경도 아니다. 존재 자체다. 음악이 악기의 울림통을 벗어나 청중의 내부로 파고드는 것처럼 존재 전면에 서서, 시각을 넘어서 내면의 청각과 촉각에 지워지지 않는 파장을 새긴다. 예술의 미학적 범주를 확장시킴으로써 끝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느끼는가에 대한 질문이 여운처럼 남는다.


사람들은 제임스 터렐을 사랑한다. 그의 무해하고 안온하고 종교적이지 않으면서 성스러운, 빛의 방 안에서 우리는 세상에 적응된 눈을 잠시 감고, 태초의 빛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어둑한 수공간에서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서서히 퍼진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방식으로 본다는 행위를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추가)


이창원 작가의 작품도 실루엣은 마치 부서진 토템처럼 서있는 가운데

뒤에서 어둠이 번져나오다 음영의 이음새를 매만지며 둥실하고 빛이 떠오른다.

이 빛이 진짜 주인공이다. 단단한 실체의 가장자리를 타고 난반사되는 이 빛은 

청자 위에 물든 새벽 안개처럼 새륵새륵 거린다.

안개가 낮게깔린 에메랄드빛 호수처럼 부드러움을 갖춘 음산함이다.

번쩍이는 주황빛 번개

비온 뒤 물방울에 적셔진 포도껍질처럼 부드럽고 무광택 보라색

석류껍질 벗기기 직전의 금홍색, 우유를 섞은 유백색의 살구빛, 달콤씁쓸한 아마레토 시럽같은 금빛이 붉은태양과 감황색 사막의 모래언덕 사이로 휘몰아쳐 빛의 체온을 느끼게한다.

혈색이 감도는 핑크빛 피부의 미세한 온기가 모두 미끄러져 실루엣 사이로 윤곽과 빛을 흐리며 무화시킨다.


음영. 빛은 그림자와 대척점에 있지 않다. 빛은 그림자를 몰아내는 회초리가 아니다.

그림자와 함께 어깨를 겨누도 빛 자체의 파형을 끌어안은 조형물이다.

과일 젤리가 가득찬 유리병의 디저트 같은 느낌의 작품도, 새벽녘 일출이 걸린 산 봉우리 같은 작품도, 우리네 산 능선을 수평선으로 표현한 듯한 작품도 있다.

붉은 귤껍질처럼 질감있는 탁한 주황색에 버터를 발라 연한 노랑감을 주다 다시 유약바른 청록색 자기색에 복숭아빛 핑크처럼 흘러간다.

서서히 빛의 스펙트럼이 전이되는 구간이 아이 손에 아이스크림이 녹아가는 어느 불 꺼진 후의 하늘에 남은 잔광처럼 따뜻하다.

슬쩍 번져있는데, 번져있다는 말은 색이 직선적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수채화에서처럼 종이 위에 물을 떨어뜨리고 난 번짐과 울림과 머뭇거림이다. 이 오묘한 시간의 자취 속에 빛이 스스로를 확장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