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문서 추천을 받아 조금 넘겨가며 빠르게 읽어보았는데 AI 환경파괴 이슈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인용참고)


문득 데이터센터는 AI의 수도원같다고 퍼뜩 느꼈다. 오늘의 아무말 대잔치가 시작될런가보다. 뭐가 비슷한가. 수도원에서는 인간이 기도하고 데이터센터에서는 기계가 연산한다. 침묵 속에. 끊임없이 반복해서 작동한다. AI의 litany연도는 기계음이며, 기도서는 깃허브라. 현실 속에 드러나 보이지 않으나 세계를 지배한다.


문서 자체의 성격도 생각해본다. AI 진단서라는 외피를 입었으나 해석학적 주권은 신학에 있다고 일갈하는 선언서처럼 보인다. 윤리학적 권력문서라고 할 수 있을까


안티쿠아 노바문서 3항에서 AI가 공공 광장에서 진리의 위기(crisis of truth)를 만들 잠재적 위험성을 지적한다. 으레 인공지능을 거짓말하는 기계로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의미를 무한히 재조합해 양산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하늘에 닿고자 증식하는 고대의 바벨탑의 컨템포러리 버전이다. 



로고스의 조화로 구성된 코스모스가 실리콘과 코드의 유니온, 즉 물질과 논리의 조합으로 환원되어 그 안에는 사랑의 의지가 결여된다. 번개를 맞고서도 인간의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여전히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뱀이 살아 있다.


그래서 AI가 실제로 위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교회의 해석권이다. 문서는 인간과 지능을 정의하는 권한이 여전히 교회 공동체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존재론 경쟁 끝에 AI가 지능이라는 단어를 점유하고 지능을 참칭하게 되면 인간의 본질을 데이터와 확률이 규정하게 되고 통계와 알고리즘으로 지능을 판단하게 된다.


신학이 인공지능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진리는 계시가 아니라 확률로 전락할 것이다. 권위는 전통이 아니라 알고리즘 신뢰도로 판명될 것이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플랫폼으로 변모할 것이다. 주인의식을 지닌 관리자로 호명된 존엄한 인간이 기생적 소비자가 된다. 그래서 이 문서의 행간을 읽으면 AI가 신학의 경쟁자로서 경계되는 게 보인다.


AI는 인간을 대체할까? 생성형 인공지능은 인간의 노동이 갖는 의미를 탈각시킬까 AI는 인간을 소외시킬까? 혹은 도리어 인간의 오랜 욕망과 교만을 드러내는 거울은 아닐런지. 


이미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드러날 수 없다. 인간에게 전능에 대한 부적절한 질투, 예측 가능성이라는 불가능한 욕심, 통제 욕망이라는 불경한 속마음이 없다면 AI가 이를 기술적으로 구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AI를 통해 비로소 만천하에 낱낱히 드러난 것은 사람의 본질과 추악함 그 자체다. 그 결과 자신 안에 내재된 신적 속성을 고양시키지 않은 채, 열화된 버전만 반복적이고 충동적으로 현현된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성스러움은 이미 세속 안에 배태되어 있는 바... 한 줄기가 빛이 영원한 어둠을 밝히고, 한 줌의 소금이 거대한 바다의 속성을 유지하듯, 단 하나의 사랑이 무한증식하는 거짓의 회오리를 잠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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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번이 인상적이네요 current AI models and the hardware required to support them consume vast amounts of energy and water, significantly contributing to CO2 emissions and straining resources.

좋아요 클릭 한 번으로 촉발되는 전기 신호가 해저 케이블 왔다갔다하면서 바다 온도를 올린다는 책이 생각났어요














질서 있는 사랑을 말한 아우구스티누스라면 기계의 창조세계를 소모보다 중요한 건 인간이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에 있다 했을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는걸까요 아님 속도와 편리를 사랑하는걸까요 AI의 환경파괴문제는 기술문제라기보다 마음의 지향성과 사랑의 질서가 왜곡된 증상일지도요 그러다보며 정보를 자연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될지도요


https://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ddf_doc_20250128_antiqua-et-nova_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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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서울시립미술관 2층 유휴공간 헤르츠앤도우 작가의 지구울림 앰비언스가 좋았다면


Trent Reznor & Atticus Ross도 좋아할 것 같다

나도 방금 알게 됨


2. 그리고 오늘에서야 알게되었는데 이들이 만든 음악은 이런 게 있었다! 와우


영화 챌린저스 둠칫둠칫

https://www.youtube.com/watch?v=63k6AfvLsso


디즈니 소울의 에피파니 앰비언스

https://www.youtube.com/watch?v=vbBVrfkFe2I


영화 소셜네트워크 (여기서 56:30 부근은 다프트 펑크의 트론이 생각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UnOL6T3FN0


3. KFC 투움바 켄치밥 괜찮다. 광고로 같이 떠서 갑자기 생각남.


안 매운 고추장 버터 볶음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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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센티멘탈 밸류 보았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에서 젊은 레나테 레인스베를 등용해 이전 작품으로 여우주연상, 이번 작품으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번갈아가며 동반 깐느입성했다.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화해, 자매간 우정, 감독과 배우로서 전문가의 고독을 연극무대와 스크린의 관계 속에 녹여낸다. 가족의 굴레에 고통받고 책임의 무게를 어릴 때부터 견뎌 와야했던 K-장녀 이야기를 북유럽 디자인 세팅에, 느릿한 테이크가 특징인 인디영화의 문법에 계승한 것 같기도 하다.

지지난 주에 개봉하고 바로 본 다음 대중교통에서 끄적인 글을 계속 스레드 임시저장본에 묵혀두었는데 이러다간 정말 글을 마무리하지 못하겠구나 싶어서, 빨래 시간이 조금 뜬 김에 얼개만 마무리해 본다. 앨페닝이 분한 레이첼 캐릭터가 체호프같다 생각했고 책을 재독해서 더 좋은 글을 쓰려고 했다가 계속 묵혀두고 있다. 늘 이런 식이다. 국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몇 천 자 쓴 노트가 석화되었다

영화는 극장에서 메데이아의 고전연극무대 시작해 넷플 현대가족극 촬영지로 수미쌍관을 맺는다. 가족 관계도 연극치료의 일환이고,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서 배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네모지고 각진 시각적 프레임을 매체적 특징으로 하는 연극무대와 스크린에 서려있는 애증어린 관계가 읽히기도 한다.

헨릭 입센을 닮은 긴장어린 실내극, 안톤 체호프 모티프의 주변적 캐릭터,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르만이 잘 구사했던 의도된 신학적 침묵 같은 레퍼런스가 오슬로의 차디찬 공기와 과묵한 스칸디나비안의 얼굴을 통해 전해진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사적제도를 해체하면서 해부학자의 냉정함과 정서적 유대감을 유지하는 불가능한 묘기를 선보인다.

노년의 영화감독 구스타브 보르그를 연기한 스카스가드(Stellan Skarsgård)는 마블에선 천문학자, 듄에선 냉정하고 뚱뚱한 귀족(여기서 인사이트를 얻었나?), 캐리비안의 해적에선 저승귀 선원을 연기했다. 이번 작품에선 명성과 실패, 즉 페임과 페일류어를 얼굴에 드러낸다. 경력은 화려하나 가정은 처참하다. 공적 자아는 단단하지만 사적 자아는 균열되었다. 아버지로서 상합하고자 하나 딸은 이해할 수 없다. 왜 이제와서 돌아온 것인지 설명을 원하나, 그냥 각본을 읽어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한다. 서로 욕망이 미끄러지는 순간이다. 얼굴을 마주하는데 말은 어긋난다. 조준경을 벗어나 잘못 발사된 말들이 난사될 뻔하다, 감정이 응결되고 설명은 침묵으로 전환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레이첼이 과연 서사에서 필요한 캐릭터였는지 고민했다. 어차피 엔딩에서 같은 시공간을 살아왔어도, 동생에겐 언니가 있어서 엄마 역할을 해주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라면 레이첼은 왜 필요했을까? 각본에 흥분하다가 이 감정을 살릴 수 없을 것이라 비관해 제풀에 지쳐 때이른 퇴장을 하는 레이첼. 체호프에서 많이 보이는 주변적 캐릭터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레이첼은 가족을 파괴하는게 않니다. 되려, 집의 크랙으로 상징되는 이미 균열이 가 있는 가족관계를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조연이다. 레이첼은 메인 네러티브의 사건을 폭발시키기보다 침묵을 증폭시킨다. 누가 누구를 필요로 하는지, 누가 누구를 대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이 어디까지 연기 가능한지, 등등 관객이 으레 품을만한 질문이 레이첼을 통해 또렷해진다.

비노르웨이인 외국배우로 영화제에서 잠깐 만난 관계이기에 직업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혹은 국가적으로도 외부자다. 그런데 아버지 구스타브와 두 딸이 기억과 원망, (할머니 자살로 상징되는) 세대를 잇는 상처의 악순환 속에 갖혀 소리없는 절규를 지르는 가운데 레이첼이 아무런 정서적 채무가 없는 자로 등장했다가 기존 부녀관계를 강화하고 퇴장한다.

제목으로 비유하면 정서적 가치가 없는 자가 등장해 기존 딸들에 대한 정서적 가치를 환기한다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 유품 정리할 때 동생에게 아무런 감정적 가치가 없는 화분을 언급하니 언니가 냉큼 낚아채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 레이첼이 계속 좁히지 못한 거리감은 역설적으로 부녀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균열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드라마투르기적으로 읽으면 체홒프 소설의 방문자를 닮았다. 이미 고정된 듯 보이던 인물간의 관계성을 재배열한다. 은밀하지만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구스타브가 딸 노라를 염두에 두고 화해의 제스처 일환으로 각본을 썼다. 어렸을 때 차녀는 연극무대에 올려준 적이 없는데 장녀는 그렇게 해주지 못했고 직업도 연극배우 아닌가. 겸사겸사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딸은 제안을 거부한다. 그래서 쿨하게 수긍하고 레이첼로 배우교체를 시도하나, 딸은 대체불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창작물로서 연기자는 대체할 수 있으나 가족은 대체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가족사를 토대로 쓴 극본의 딸도 레이첼로 치환할 수 없다. 레이첼은 이런 치환가능성이라는 불편한 질문을 전면화하는 캐릭터다.

이 포인트가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이유는, 만약 다른 여성이 딸을 연기할 수 있다면 사과와 화해 역시 진정성 없이 연출가능한 장면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이첼은 가족간 화해를 교체 가능한 캐스팅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낸다.

유일무이한 모녀관계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에 수반되는 감정, 그리고 그 집에 살았던 선조의 계보가 있는 역사성을 경계선 위에 서있는 주변적 인물이 얼마나 대리할 수 있을까? 실제 상처를 공유 않았는데 상처가 있던 것처럼 연기할 수 있는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가? 가족의 고통이 예술로 가공될 때 이것이 온전한 치유가 될 수 있을까? 최소한 유의미한 전유라도 될 수 있을까?

치유도 전유도 불가능하다고 느낀 레이첼은 울며 퇴장하고, 이때부터 스토리가 비로소 진전되고, 인물들은 진정한 화해를 향한 걸음을 뚜벅뚜벅 그러나 조심조심 걸어나간다.

초반에 차녀보다는 장녀와 부친의 충돌이 더 심각해보였다. 그래서 초반에는 관계가 이항대립적으로 보였는데, 레이첼이 등장함으로써 관계의 구도가 삼각구도로 확장했다. 

모녀간 정면충돌만으로는 고착될 법했던 감정선이 제3자의 등장으로 흔들린다. 다른 맥락에서 비유하면 로맨스소설에서 여주와 남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매오(매력적인 오답)으로서 주변인물이다. 레이첼을 거치며 쿨하지 못한 질투심, 허장허세, 무의미한 자존심, 서로간 직업적 야망, 갈마드는 인정욕이 상호교차해 부녀가 정말 닮았다고 느끼게 된다. 감정이 불안정하게 요동치기에 드라마가 살아 생동하는 듯 느껴진다.

요컨대 레이첼 캠프를 거쳐 사적 비극이 공적 행위로서 전환된다. 덕분에 작품은 화해서사를 낀 진부한 신파극이 아니라 친밀성이 어떻게 예술로 번역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영화로 승화된다. 사건은 격렬하지 않고 프레임 안에 등장하는 희뿌연 먼지처럼 감정이 정체된 공간 안으로 스며든다. 일종의 미세한 교란이다. 보통 일반적 네러티브였다면 외부에서 도착한 인물이나 오랜만에 귀환한 인물이 등장해 변화를 추동하는데, 폭력적 전환은 일어나지 않고 대신, 기존에 있던 욕망과 좌절감을 가시화한다. 사건의 변화를 촉발하는 외부자가 아니라, 주변적 방문자인 이유는 레이첼이 등장함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인물들이 얼마나 변화하기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반 모험서사에서 나오는 저기 보물이 있으니까 우리 떠나자, 혹은 느와르에서 등장하는 계획을 깨트리는 스파이가 아닌 것이다.

거의 빨래가 끝나가서 급마무리해야겠다.

정리하면 체호프적 방문자로서 레이첼은 이런 기능을 수행한다.

잠복된 감정의 촉발자

인물들이 애써 눌러온 감정을 표면으로 끌어 올리는 제자.

허영, 질투, 미련, 권태, 자기 기만을 매게하고, 노출하는 캐릭터

메인 인물이 스스로 구축해온 서사를 흔들고 허구성을 드러내는 존재

변화가 판타지적이면서 불가능하다고 제시하고 때맞춰 퇴장하는 자(그리고 감독은 후반부에 변화가 가능하다 보여주기에 화해가 숭고해진다.)

영화는 값싼 화해로 쉬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후반부까지 최대한 버틴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남길 수 있는 상처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시간을 어설프게 소급하지 않으며 화해의 가능성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가능한 마지막 최선의 노동으로서 화해다. 이 화해 없이는 세대간 파국이 반복될 것이다

감독은 미장센을 보석세공인처럼 맑게 제련한다. 수정처럼 다듬어진 프레임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변화와 몸짓을 기다린다. 정교하게 조율된 대사는 정적이고 과시적이지 않다. 순간의 시선, 식탁 위에 놓인 손, 문을 닫는 속도 같은 사소한 제스처가 서사의 중력이 된다. 예술과 삶, 연극과 영화가 교차하듯 서로 감정과 역할도 교차한다. 관객은 관계의 복잡성과 감정의 깊이를 가랑비에 옷 젖듯 시간이 흘러 자각한다.

가족제도는 깨지기 쉬운데 또한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사실상 이미 깨졌는데 붙잡고 있다. 영화는 집이라는 무성명사를 주어로 시작했다. 균열된 집 속에 지속되는 보이지 않는 유대, 그 불편하고도 단단한 끈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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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제일 인상깊은건 다들 애니에서 들어알고 있는

역시로군=사스가다나, 를 한자로 표기한 부분이다

流石 혹은 遉라고 쓰고 さすが라고 읽는다

들어서 입말로 알고 있는 표현이 한자로 표시될 때 그 시각적 임팩트에 깜짝 놀라게될 때가 있다

비슷하면서 조금 더 강한 예시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국한문혼용체다. 그냥 한자도 아니고 한문한문스러운 문체를 한자로 읽을 때와 한글로 읽을 때 느낌이 천양지차다

예컨대

噫라舊來의抑鬱을宣暢하려하면時下의苦痛을擺脫하려하면

희라! 구래의 억울을 선창하려 하면, 시하의 고통을 파탈하려 하면

아아新天地가眼前에展開되도다威力의時代가去하고道義의時代가來하도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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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사제들이 강론을 GPT로 쓰는 것을 금지한 교황님


"음 요즘 신부님 말씀이 참 좋은데?" 했던 잠깐의 허니문이 일장춘몽처럼 끝났다. 교황님 말씀을 안 들을 수는 없으니까. 그 발언의 저의는 강론 준비라는 자기수행 과정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슈를 통해 100% 노동집약적 준비 vs 인공지능을 통해 시간절약 후 더 중요한 우선순위에 한정된 재화를 분배라는 두 양립불가능한 태도의 충돌을 읽을 수 있다. 종교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성직자도 다른 관리자(대위, 수간호사, 매니저 등 팀장직급)와 마찬가지로 담당영역에서 상담, 행정, 봉사, 의례 등 수많은 하루 일과를 쳐내야한다. 현대인이라면 당연한 일. 밤에 촛불을 키고 성경을 뒤적이며 전달할 글을 펜촉으로 쓰던 시대의 정신이 있었다. 돌볼 사람도 많았지만 그만큼 도와줄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기술발전에 따라 예전엔 인력이 해주던 마차 대신 GPS 차량, 연락리에종 담당 시종 대신 핸드폰, 필경사와 제본업자 대신 컴퓨터와 인쇄기기가 있다. 나아가 새로 등장한 다양한 AI에이전트가 절차적 과정을 생략해준다. 대신 조직의 허리가 부족해 시니어급은 과로에 시달린다. 그러니 넓은 지역의 교구사목에 한정된 시간과 체력을 기울이기 위해 반복적인 작업을 AI에 외주해 나보다 더 좋은 강론을 만들어주는 시스템을 활용한다.


교황님의 말씀은 강론 전달을 통한 결과적 찬사보다는, 준비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성직자 자신의 마음가짐을 갈고 닦는데 그 본질이 있다는 뜻 같다.


예컨대 음식을 팔아 이윤을 남기고자 하는 요리사가 인건비 절약 및 워라벨을 위해 냉동음식이나 공장에서 음식을 떼어와서 파는 경우와 상반되는, 모든 음식을 뒷마당에서 무농약으로 재배하는 유기농 농부와 같은 태도. 가톨릭의 추구미다.


그러나 소규모 까페 운영자가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반죽해서 베이커리를 매번 준비하기엔 비현실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다. 중간업체를 이용하는 합리적 이유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격무에 시달리는 관리자에게 과거 10명이 해야할 강도의 노동이 집중되고 있다. 가끔 생각하는 것이지만, 전달자는 자기에게 전달하는 바가 결여되어 있다. 미용사는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고, 심리상담사는 자기 마음을 돌보지 못하며, 교육자는 자기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한다. 종교인도 영적지도와 수행에 전념하기 어렵다. 박영진이 외쳤다. "소는 누가 키울 거야? 소는" 그것처럼, 모두 수도원에 가면 양떼는 누가 돌보나?



모두가 절에 들어가 면벽 수행하고 모두가 공부만 하는 학승이 되면 절은 누가 돌볼지. 주지 스님이 없다면 산에서 다 굶어죽을지도 모른다. 같은 예시다.


성직자의 GPT의 사용 이슈에서 더 나아가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왜 교황님은 금지했을까

생성형 인공지능이 자료 조사와 초안 작성 등 로펌 주니어, 신입 개발자, 버역가, 대학원생, 비서 등이 해주었던 화이트 칼라의 하급노동을 자동화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는데

종교인마저 강론을 생성한다고 여겨지게 되면

강론의 신비가 탈각된다. 신부님도 GPT쓴다면서요? 그럼 왜 강론 왜 들어요 라는 낙인이 싫은 것이다. 


마치 필적에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글에 쓴 사람의 맛이 드러난다. 이 구수하고 인간적인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GPT 특유의 표현이 싫다. 영양가 없는 레토르트 제품 먹는 것 같다. 예컨대 not only but also를 번역한 결국 아니다. 구조 설계. 너무 많은 쉼표 등등. AI가 쓴 글 마저도 쓴 이의 지문이 묻는다.


성직자도 광의에서는 철학자와 같다. 성경의 단어에 대한 문헌학적이고 철학적 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금욕적이고 방향성 있는 삶의 태도도 비슷하다. 


이때 철학자의 학회에서 발표와 성직자의 강론은 닮아 보인다. 세속이냐 아니냐의 양태가 다를 뿐. 그런데 철학자들은 학회에서 자신의 이론을 이해해 줄 지식 수준이 되는 동료 철학자마저도 자기 발언을 듣지 않고 있어도 그 낭독 과정을 자기 전달과정으로 포함한다. 최근 번역된 대니얼 대닛의 자서전 생각이란 무엇인가에서 읽은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이전에 이미 마음과 의식을 다루는 과학철학을 선구적으로 연구한 대니얼 대닛 같은 최상급 철학자도 학회가 너무 지루해 내용이 아니라 발언자가 내뱉는 단어의 a, b, c 알파벳 순서를 세면서 겨우 졸지 않게 버틴다고 했다. 이제 AI로 요약해서 논문을 빠르게 섭취하는 이공계 전공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인문학자의 발표방식은 말과 글의 전달이라는 결과론적 행위보다 그것을 행하는 수행성이 자기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인식 에 기반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자기가 써서 준비한 글을 신자들 앞에서 읽는 자체가 중요하다. 신앙을 한층 더 성숙하게 하고 자신을 조탁하는 여정으로서 글쓰기다. 설령 다들 안 들어도 자기가 듣고, 고난의 과정을 함께 하시 하느님이 듣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과거에도 정말 모두 100% 자기가 썼을지, 정말 큰 웨스트민트서 대성당 같은 abbey=주교좌성당에 주니어 사목사제와 수녀님들이 많았다면 초안 써주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 같다. 이때도 경영자적 마인드가 있는 이들은 일부 업무를 아웃소싱했을 듯 하다. 이 이슈를 통해 GPT 사용유무의 현안보다는 현 미국교황님의 철학자적 면모가 드러났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jm7mXppQ9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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