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iz.chosun.com/industry/company/2025/03/14/RQCFNNAKLVCE3J4PQ65RWABOIA/




헤더윅은 뛰어난 건축가다. 그러나 건축 설계의 완성도를 찬찬히 따지지 않고, 단지 영국 런던이라는 이름값에 기대어 선택했다면 그것은 문제다. 깊이 있는 안목이 결여된 처사다. 


노들섬의 사운드스케이프도 이미 헤더윅이 맡고 있다. 그외에 익히 아는 DDP는 자하 하디드, 리움은 렘 콜하스 외 3인,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했는데, 국내에서 눈에 띄는 건축물 상당수가 외국 건축가의 손을 거쳤다. 외국 건축가가 설계해야 네임밸류가 높아지고, 국제적으로도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 참여해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잠시잠깐의 반발은 지나가는 파도라고 여길 것이다. DDP의 경우도 당시 청계천 일대 상인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비판은 거의 줄어들었다. 아마 서울시의 시각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역풍은 사그라들고 가치가 결국 인정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에펠탑 건축할 때도 프랑스인 모두가 입을 모아 철근 덩어리라고 비판했고, 아이엠페이가 루브르 앞에 유리피라미드를 박자 모든 프랑스 비평지가 합심해 비난했다. 그러나 이제 에펠탑과 유리피라미드는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국내 건축가를 선정할 경우 파벌 간의 다툼과 시샘을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외국인을 기용하여 논란을 비켜가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국내 건축사무소는 볼멘 소리 일색이리라. 국내 건축가보다 외국의 명망이 선정 과정에서 우선시되었다고 발끈하리라. 사대주의라고 비판하리라. 과거 명나라, 일본, 미국으로 옮겨 가며 외세를 숭배하던 태도가 시대를 달리하며 또다시 반복되었다고 말하리라.


서로 복잡한 입장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서울시나 국내건축가들이나 모두 공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혹시 이 사안의 핵심이 외국 숭배 혹은 해외 사대주의라고 정의한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대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한다. 문제를 정확히 인지해야 고치고, 고쳐서 문제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한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대주의가 외국을 높이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를 낮춰보는 것인가? 어떤 시점까지는 전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국력과 경제력이 충분히 올라온 다음에는 후자다. 그 몇 가지 흐름의 파도는 88올림픽, 90동구권붕괴, 92여행자유화, 2002년 월드컵, 세계화, 2010년 이후 한류붐이다. 


우리나라의 인구는 스페인보다 약간 많으며, 실질 GDP 또한 다소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이 유럽과 미국 앞에서 자존감을 지키는 것과 달리, 우리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낮춰 보는 경향이 있다. 튀르키예의 경우 남북한을 합친 정도의 인구를 지녔는데 경제력은 우리보다 네 단계가량 낮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을 거치며 자국만의 표준을 세웠던 제국 운영 경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자부심이 있다. 자기를 낮춰보지 않는다. 유럽과 아시아 둘 다의 교량이라고 포지셔닝한다. 한국은 한자문화권과 구미세계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이 있는데도 그렇게 포지셔닝하지 않는다. 포지셔닝은 누가 시켜주는게 아니라 스스로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학부시절 교수들이 서양 백인 남성을 대할 때는 마치 왕을 모시듯 공손한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순한 어린 양 같아 보였다. 박사과정에서 자신을 길러준 스승에 대한 존중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기댄 학문의 뿌리를 인정해야 자신의 권위 또한 공고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60년대 남성 교수들만의 습관으로 여겼으나, 이후 서양 백인 여성 작가의 글을 번역하는 여성 지식인들의 태도도 유사한 것을 보고나서는 단순히 성별을 넘어서는 구조적 현상처럼 보였다.


현재 지위와 권력을 가진 윗 세대만을 탓할 수만은 없다. 당시 그들이 살아온 시절과 시대정신이 그러했다. 일본과 서구의 것이 최상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 형성된 인식과 경험은 나이가 들더라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당시는 국산 제품의 품질은 미흡했고, 해외 수입품이 훨씬 퀄리티가 좋았다. 국내 대학들은 데모에 공부를 안했고, 해외 유학 가서야 공부다운 공부를 제대로 했으며, 미국 실험실과 연구실의 수준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고, 해외 이론이 우리의 것보다 더 세련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바탕에는 해외를 높이 평가하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국산 기술과 제품의 수준이 상당히 향상되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해외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한국전쟁으로 못 사는 분단국가에서, 힙하고 잘살고 멋진 나라로 긍정적으로 변한 이후에는, 오히려 지나치게 스스로를 낮춰 보는 경향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는 우리가 너무 빠르게 발전한 데다, 과거 세대가 아직 완전히 지나가지 않았다는 이 이중의 난제가 우리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현실적인 해결책은 사람들의 인식을 억지로 바꾸려 하기보다,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내 건축사무소에서도 뛰어난 작품이 지속적으로 나와서 해외의 것이 더 우수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야 하지만, 문제는 실현 기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건축 프로젝트는 막대한 예산과 방대한 인력이 투입되는 분야다. 그래서 이미 풍부한 경험을 쌓아온 해외 건축 회사들과 대등한 경쟁을 펼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그게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사무소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국내 건축계에 기회를 먼저 주자니, 국제적인 경쟁력을 담보하기 어려워진다. 외국 건축가에게 맡기자니 국내 건축가들이 성장할 기회가 사라진다. 결국, 어디로도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진 형국이다.


이 늪 속에 점점 기회는 이미 가진 자에게 편중되고,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마태복음 효과, 즉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되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경험의 축적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결국, 국제-국내 건축 산업 내 양극화로 이어진다.


오히려 서울시는 프리츠커상으로 인해 헤더윅 사무소에 일감이 아주 많이 몰려있는데 다른 나라를 제치고 우리가 로비해서 잘 따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나? 억지로 역차별하는 것이다. 억지로 국내건축사에 일감을 주는 것이다. 부족하더라도 믿고 맡기는 것이다. '사회적 비용'이라는 하나의 체크리스트를 신설해서.


이 방법은 중국도 미국도 이미 해 본 일이다. 중국의 자국 기업 우선 정책(국가 자주화 전략国家自主化战略 혹으 국산화 정책国产化政策)이라든지, 미국의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이라든지.


전자는 말 그대로 이해하면되고, 미국의 적극적 우대조치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미국의 의학과학에서 특히 여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두드러진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과 분야에서 남성이 수리지능이 우세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또 다른 연구에서는 그것은 자연스러운게 아니라 문화적으로 학습되었다고 비판하며, 어린 시절부터 남아에게는 장난감을, 여아에게는 인형을 쥐여 주고, 남아가 수학과학에 뛰어나면 더욱 칭찬하는 문화가 이러한 이공계 대학진학에서 성차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그러니까 기계공학과에 남성이 100명, 여성이 2명인 구조가 왜 생겼는가, 원래 남자가 수학을 잘하나 아니면 칭찬해줘서 그런가, 이런 편향적인 성비가 정상인가, 미래세대를 위해 올바른가, 에 대한 미국 교육계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여성 흑인 CEO는 자신이 개발자라고 소개하면 투자자들이 모두 박차고 나갔다고 했다. 여성과 흑인이 수학과학을 못한다는 인식이 만연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교육계는 기회 평등을 보장하고자해서, 과학계 내 여성 롤모델을 양성하기 위해 일정 부분 역차별까지 감수하며 여성/유색인종 교수 채용과 여성/유색인종 과학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과학인들이 모두 온전한 출발선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중국의 자국산업보호정책이나 미국의 적극적 우대조치는 억지로 다른 대상을 억눌러서 불평등한 부분이 있지만, 사회적 기회균등을 위해 감수해야한다는 대승적 의지가 있었다. 


이대로는 국내 건축사무소는 모두 고사한다. 위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면 국내에서 건축은 어렵고, 자라온 땅에 대한 이해와 익숙함을 버리고 해외에, 베트남이나, 떠오르는 신흥시장 인도, 인구 급증하는 나이지리아, 파키스탄에 설계하러 갈 수밖에 없다. 적게는 물갈이에서 크게는 시스템부재까지, 또 다른 엄청난 도전과 시련이다.


국내에서 프리츠커상이 배출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는 현실적으로 보자면,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건축가가 수상할 수는 있을지언정, 아직 국내 건축사무소 중에서는 그러한 반열에 오를 만한 곳이 없는 듯하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과도 맞닿아 있다. 제대로 된 일감을 공급받지 못한 탓이다. 한국 건축가들에게 국제적 명성을 쌓을 만한 랜드마크 프로젝트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린다. 


헤더윅은 훌륭한 건축가지만 언제쯤 우리도 그만큼 훌륭한 건축가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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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SNS에 다음과 같이 알려주신 분이 있었다. 덕분에 몰랐던 것을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다.




매스스터디 등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다.


https://www.c3ka.com/city-attempts-exhibition/

http://architecture-newspaper.com/v40-c07-kmj/

https://www.elle.co.kr/article/1866005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 천지고, 나의 글은 온전하지 않다. 더 많이 읽고 전문가들로부터 배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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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의 동시로 첫 읽기 세트 - 전3권 박성우의 동시로 첫 읽기
박성우 지음, 최미란 그림 / 창비교육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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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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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강남 교보문고 매대에서 막 번역 출판된 이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나는 베르베르의 <개미>나 최근작 <행성>보다 이 단편모음집에 수록된 <상표전쟁>을 좋아한다. 정말 있을 법한 미래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는 2010년, 프랑스에서는 2008년 10월께 나온 책인데, 2025년 오늘날에 읽어도 이후의 미래를 잘 예측했다. 처음 이 책을 손에 집었을 2010년에도 <상표전쟁>을 단숨에 흡입하듯이 읽었다. 책을 사게 되 것은 2019년 후 신판이 나온 다음이다.


단편 <상표전쟁>은 소위 테크 자이언트라고 일컫는 기술 거대 기업의 부상에 따른 국가의 점진적 대체를 그리고 있다.


국가보다는 기업광고송이나 사가(회사 노래)를, 국기보다는 로고를 사람들이 선호하게 되면서 물건구매가 투표행위의 일환이 되어간다. 일련의 과정을 지나(스포일러니 책을 읽어야함) 기업들이 과거에는 주권 국가만이 수행하던 전쟁을 벌이는 미래를 그리는데 예측 중 일부(2040년께의 우주 전쟁이나 2018년의 콜라 전쟁)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관료주의에 의해 둔화된 국가를 기업이 대체하는 흐름은 놀랍도록 정확하다.


펜데믹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미국의 일론 머스크와 중국의 마윈의 부상. 2010년 후반에 알리바바가 항저우에 너무 큰 위치를 차지 해서 국가기관이 기업 안에 들어와서 서류발급 민원처리를 한다고 했던 어느 기사를 읽고 이 단편을 떠올렸었다. 스페이스X나 나사의 업무 일부를 대체하고, 국경을 초월하여 유럽의 이민정책과 극우정치 공론에도 영향을 미치는 2025년 기사를 보면서 다시금 이 단편을 떠올린다.


스토리에서는 규제 지연과 정치적 분열로 인해 국가들은 거대 기업의 기동성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기업이 곧 국내경제만을 담당하던 시대를 지나 세계화시대에는 국제 무역을, SNS와 AI의 시대에는 이념적 담론까지 기업들이 주도하게 된다.




국가들이 이에 적응하여 다시금 주도권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기업들에게 더욱 많은 권한을 내어줄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역사가 보여주듯 권력 구조는 정적이지 않다. 기술 기업들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경제적 민족주의와 지정학적 충돌로 인해 국가들이 새로운 균형을 모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이야기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세처럼 변해간다는 것이다. 공급망 붕괴, 우리가 알던 세계화의 종말, 중도의 몰락과 극좌와 극우 양극화, 기후변화, 각자도생의 시대. 모두 성벽을 세우는 중세의 특징이 아닌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작이 '상실의 시대' 같은 그의 이전 작품의 집대성처럼 읽는 사람도 있으나, 다가올 미래, 즉, 벽을 세워 중세도시를 만드는 시대를 예측한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다보면 시대에 대한 통찰이라는 부산물을 얻을 수 있다. 작가가 반드시 예언서를 쓰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고, 책을 집어드는 독자도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은 아닌데, 재밌게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면 생각지 않게 얻게 되는 부산물이 바로 시대에 대한 통찰이다. 왜 그것이 가능한가? 


아이디어의 전파와 현실화 과정에 글이 에너지와 질량이 낮기 때문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질량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개념이 현실에 미치는 속도와 영향력이 결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적은 에너지가 드는 것은 음성언어 즉, 말이고, 그다음이 문자언어, 즉, 글이다. 말과 글은 한 개인이 적은 노력으로 바로 발산할 수 있기 때문에 시대의 유동성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이후 말과 글에 감화를 받은 예술가들이 이를 그림, 이미지, 영화로 시각화한다. 물론 예술가들이 작가 자체일 수도 있겠다. 내 말은, 시각화는 소리화와 문자화에 비하며 훨씬 더 에너지와 노력이 들기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기술을 통해 실체화되는 것이며 이후 상용화를 거쳐 대중이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다시 짚어보자. 미래를 내다보는 한 비저너리는 먼저 아이디어를 말로 표현한다. 아직은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구술언어로 말하는 단계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을 정리해 말을 글로 정리해 출판하고 독자들이 읽기 시작한다. 출판과 유통에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러나 책은 말보다는 널리 퍼지는 효과가 있다. 소리는 가청범위에만 다가갈 수 있지만 책은 지역을 넘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예술가들이 공감하여 그림과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기술자들이 실제로 이를 구현하지만 초기에는 비용이 높아 쉽게 보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용화되면서 마침내 대중의 인식 속에 자리 잡는다.


예컨대 로켓, 우주 개발, SNS, AI, 배터리, 전기차 등 모든 혁신이 이 경로를 따른다. 처음에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이 되었다. 대중은 자기 앞에 물성으로 다가와야 이를 이해한다. 말과 글인 단계에서 비웃지 않고 공감하 사람은 축복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작가들의 글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가 기록하는 생각이 곧 있을 법한 미래의 현실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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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ytimes.com/2025/03/03/arts/design/francis-bacon-barry-joule.html?searchResultPosition=1


3월 15일 오늘 배송받은 NYT 인터내셔널판 1면과 2면에 크게 실린 기사. 아니나다를까 이미 12일 전 기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종이로 밖에 글이 읽히지 않으니.


글은 대충 이런 내용이다. 베리 줄(Barry Joule)은 영국의 유명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가까운 사이였던 캐나다 출신의 핸디맨(대충 잡역부, 심부름꾼, 이것저것 다 돌봐주는 사람)이었다. 베리는 1992년 베이컨이 사망하기 직전, 82세의 작가로부터 스케치와 그림, 신문 및 잡지 기사 위에 덧칠한 꾸러미(번들)을 받았다고 했다.(According to Joule, Bacon, then 82, handed over some bundles that included hundreds of newspaper and magazine cuttings, some of them with added brush strokes and paint splotches. Joule says Bacon also gave him an album of sketches, with drawings...) 그런데 이 작품들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미술계에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베리 줄은 이전에 자기가 받은 컬렉션을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 기증했다. 수십 년 후 미술관은 반환했고, 현재 프랑스 퐁피두 센터가 수용할지 검토 중이지만, 베이컨의 유족 측은 반대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해당 작품들이 베이컨의 기법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의심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리 줄은 금전적 이익이 아닌, 베이컨을 기리는 것이 목적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논란들은 미술계를 갈라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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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의 좋은 기사는 첫 문단, 2/3지점, 마지막 문단에 방점이 있는 것 같다. 왜냐. 사람들은 보통 신문을 훑다가 제목을 보고 관심이 생기면 첫 문단을 읽고 첫 문단이 괜찮으면 마지막 문단을 읽은 다음 거기서도 흥미가 생기면 두 번째 문단부터 이제 제대로 읽기시작한다.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은 요컨대 제목을 제외하고 사람들의 눈길이 가는 부분이라 기자도 신경쓸 수 밖에 없다. 음악으로 말하면 후크 같은 부분이다. 그럼 2/3은 왜냐? 열심히 읽어주는 사람을 위해 그즈음에 자기 생각을 숨겨두었다. 정치철학으로 유명한 시카고의 레오 스트트라우스가 고전철학자들은 박해와 유명세 등을 피하기 위해 관습적이고 일반적인 주장을 하다가 자기 글을 끝까지 따라와주는 이해심 많고 지적 능력 되는 독자들을 위해 2/3지점부터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비슷한 맥락이다. 반드시 고전철학만 그런 것도 아니고 NYT 나 르몽드나 영미유럽권의 좋은 글을 읽다보면 경험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이 기사에서는 2/3 지점에 뭘 숨겨두었나? 뉴욕타임즈에 익명으로 제보한 큐레이터의 입을 빌려 왜 이 진위 논쟁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지를 밝혔다. 기증한 목록이 완전 엉망진창 난리브루스라서 뭐가 베이컨 것인지 뭐가 베리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One curator who once collaborated with Joule on a show agreed to speak to The Times, but only on condition of anonymity, so their name “wouldn’t be dragged into this,” they said. The works and documents in the archive were “a mess,” the curator wrote in an email, “with perhaps a mix of ‘genuine’ material from the Francis Bacon studio and other stuff by people around Bacon, perhaps including Barry himself.”


물론 나머지가 가짜라고는 안했다. 기자니까 객관적으로. 베이컨의 아마 진짜인 자료와 다른 여러가지의 혼합을 기증한 것이다. '아마'의 사용에서 유보적인 태도가 보인다. 이런 단어의 사용도 간단하지만 영리하다. 논쟁은 진행중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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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마지막 문단에 재밌는 영어가 있다.


Joule would only let me hear that bizarre snippet, but he insisted that he had hours more. If so, it seemed like great material for a radio documentary or a podcast. But Joule said he wasn’t interested in anything like that. Instead, he said, he planned to drip feed excerpts to friendly reporters for the rest of his life.


줄은 내가 그 기묘한 이야기 토막만 듣게 해주었지만, 그는 몇 시간 분량이 더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라디오 다큐멘터리나 팟캐스트에 적합한 훌륭한 소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줄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친분 있는 기자들에게 조금씩 발췌 부분을 흘려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snippet은 단편, 정보토막, 소식 같은 말이다. 


drip은 뚝뚝 떨어지는 것, feed excerpts는 발췌 부분.


짤막한 이야기, 단편성 정보를 여러 동의어로 다양한 뉘앙스를 풍기며 흥미롭게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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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담은 화면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깊고도 묵직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서서히 적셔온다. 투박한 손길로 쪽빛 치마를 고쳐 매던 어머니들의 체온과 이 땅의 지난한 세월과 시련이 빚어낸 깊고도 아련한 울림이 느껴진다. 우리네 민화에 그려진 어머니상과도 닮았다. 주름 사이사이 새겨진 세월의 흔적과, 이슬 머금은 듯 촉촉한 눈망울이 화면을 가득 메워 괜히 눈시울이 매워진다. 살며시 떨리는 입술, 억눌린 듯 흐느끼는 숨결, 눈물이 차올라도 왈칵 쏟아내지 못하고 꾹 참는 그 얼굴, 과, 그 눈빛. 마치 수십 년 한을 품고도 말 한마디 쉽게 뱉지 못했던 어머니들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먹처럼 번진다.


이보다 더 염혜란의 얼굴을 가까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은 샷은 <야구소녀(2020)>에서 였다. <이태원 클라쓰(2020)>로 같은해 유명세를 한층 더 증폭한 이주영배우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감독과 호흡을 맞춘 영화였다. 부동산 시험 문제 유출로 남편이 경찰서에 잡혀가고 딸에게 야구하지 말라고 삶이 힘들다고 절규하던 장면이다. 


이런 한스런 어머니 배역을 소화해낼 수 있는 동급의 배우가 또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신록 정도밖에 없다. 그러나 산업화의 거치며 거칠게 살아온, 가난과 설움을 등에 지고, 배우지 못해 억울하고, 차별받아 한 많은, 궁시렁궁시렁 입으로는 투덜대면서도 따스한 정이 서려 있는 우리네 4-60년대생 어머니를 이토록 생생히 그려낼 배우는 오직 염혜란뿐없을 것 같다. 


김신록의 배우로서 확실한 인상은 <지옥>에서 박정자가 고지받는 장면과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이성민배우에게 살려달라고 땅바닥을 기는 장면이다. 놀라운 연기였다.  김신록의 연기에 대한 애정은 스스로 보여주는 연기에서 뿐 아니라 배우가 쓴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폭싹 속앗수다> 1화에서 지미집으로 붐 업하면서 1초간 살짝 시대상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눈 밝은 시청자는 반공선전물, 농업고도사업, 이승만 사진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시대상을 유추해낼 것이고, 이 시대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시청자는 바랜 포스터지를 통해 옛날 느낌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다.


최근에 봤던 <히어>나 <컴플리트 언노운>에서는 복식을 포함한 모든 미술소품에 각본까지 합해 총체적으로 시대상을 전달한다. 대사로 칠 경우에는 지나가는 말로 하나씩만. 집의 부채를 이야기하는 신에서 존슨 때문에 이자율이 올랐다든지 하는 식으로. 귀 밝은 사람은 존슨대통령을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60년대가 떠오른다. 그는 1908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어 20세기 기 사람이지마 대통령 임기는 63-69년뿐이니, 존슨+대통령이라는 단어 조합은 특정 시간대를 즉각 소환한다.


<폭싹 속앗수다>는 <히어>나 <포레스트검프>처럼 시대극을 전면에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시대 속의 개인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나라 드라마는 각본에서 정치나 역사는 소략했다. 대신 시각적 이미지로만 시대상을 잠깐 스쳐지나가며 보여준다.


제주도 사투리 대사를 이정도로 살리기 힘든데 각본과 배우가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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