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피, 국수 구토 구멍, 2025, 장지에 먹, 색연필, 금분, 아크릴, 수채, 191 x 61cm



평창 누크 갤러리 이피작가(2)

이제 전국 전시장 핀한 곳이 700군데에 이르렀다. 자랑할 건덕지도 아니다. 그냥 별볼일 없는 짓을 열심히 하였다. 그저 어딘가에서 보아주기를 원하는 작가의 작품이 기다리는듯하여 발품을 팔아서 눈에 담으려 다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예술에 대한, 작가의 정성과 노고에 대한 올바른 대우라 생각하였다.

합정지구, 인미공처럼 10년 넘게 운영하다가 사라지는 중소 갤러리가 있기도하고, 독일계 페레스나 일본계 SH 서울처럼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중대형 해외화랑도 있고, 라트비아계 레이지마이크나 포르투갈계 두아르트스퀘이라, 독일계 에스더쉬퍼처럼 새롭게 진입한 해외화랑도 있다. 그러한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없는 만물의 이고짐과 인연의 들고남 가운데, 메이저 갤러리밖에 모르는 이들의 눈밖에 작지만 강한 좋은 갤러리들이 자기 포지션을 확보하고 있다. 보통 이런 갤러리는 작품 보는 안목이 뛰어나면서 예술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하는 디렉터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곳인데, 개인적으로 평창의 누크(영어로 아늑한 구석nook이라는 뜻), 북촌의 도로시, 중구의 눈이 그런 기준에 부합한다고 본다. 이제 바이럴되는 유명한 곳에서 눈을 돌려 유명세는 덜하지만 실속있는 곳에 초점을 맞출 때가 아닌가. 언젠가 메이저 국공립미술관에 걸릴 작가도 통찰력있는 디렉터의 간택을 받아 작고 소박하게 시작하는 것이니.

물론 이번 평창 누크에서 하고 있는 이피 작가는 아예 무명은 아니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러나 향후 대형갤러리 전속작가로 소속될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진단한다. 하여, 여러 회에 나누어 글을 쓸 예정인데 우선 전시 제목의 문학적·어학적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적었고, 이제 작품의 기법적 분석, 미시정치의 메시지에 대한 통찰, 시각언어의 섬세한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을 할 차례다. 모두 섬세한 일별을 요한다. 이제 작품의 기법적 이야기를 두 회에 나누어 해보자. 스레드 글은 본 글과 댓글을 제외한, 클릭하고 나서 보이느 이하 세 번째 부터는 잘 안 읽는 것 같으니 분량이 길어질 것 같기 때문.

반드시 외국에서 교육받았다고, 시카고 미대에서 학석을 나왔다고 국제적인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유학가서 한국인들과 함께 시간을 더 많이 보낸 나머지 0개국어하는 무국적 국제미아가 되기도 하며, 어떤 이는 평생 한국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마치 우리네 192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동아일보를 탐독하며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민감히 반응했던 것처럼, 70년대 문학사상을 통해 동시대 서구철학사조를 습득한 것처럼, 80년대 예술가들이 서울미술관에서 유럽미술운동과 함께 호흡했던 것처럼 신토불이의 땅 위에서 최신 외국경향을 면밀히 주시하기도 한다.

그말인즉슨, 한국미대를 나왔다고 토속적인 작가에 역할이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외국미대를 나왔다고 글로벌한 작가라 참칭할 수 있는 바도 아니니. 모든 것은 케바케, 사바사이올시다. 그런데 이피 작가는 한국적인 것을 글로벌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누크 디렉터의 선택에 경의를 표한다.

보통 한국적이 것을 세계에 알릴 때 우리 안에 있는 전통적인 요소를 불러오려고 한다. 한국의 미란 무엇인가? 는 장욱진,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 등등 옛 선생님들이 많이 고찰한 바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현대적인 요소를 중첩시켜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자는 드물고, 선명한 답을 내놓지만 그 답 역시 제출한 자가 제공한 시공간과 그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국한되어 있는 듯하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확연해보였던 답안의 외연이 퇴색되는 듯한 기분도 든다. 오히려 한국적인 정체성이란 매 세대마다 재구성되고 새롭게 발명된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정체성 찾기 시도의 초기에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전략이 일반적이다. 내가 누구냐? 는 남은 누구인가? 남이 보는 나는 누구인가? 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사회의 발전은 어느정도 인간의 심리학적 발달단계와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의기양양해진 정부는 89년부터 여행자유화를 실행했는데 이 특혜를 입어 전세계를 방문한 한국인들은 지금껏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로 살았는지 한탄하며 각 분야에서 세계를 더욱 알자는 글로벌화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세계를 알면 알수록 한국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이리라 믿었다. 하여, 21세기 초 미술계는 세계화의 영향에 힘입어 장르를 교차하는 혼종성이 뚜렷해졌는데 예컨대 동양기법으로 동양풍경을 그리거나 서양기법으로 서양풍경을 그리는 트렌드가 생겨났다. 당시에는 다양한 시도과 창의적 접근이었다.
예컨대, 동양화 담청기법으로 서양풍경 중세 성당 그리기
서양화 유화기법으로 동양풍경 정자, 궁궐 그리기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하이브리드는 동-서의 이분법적 대칭구조를 강화하는데 이바지하였다는 한계가 있다. 기법과 대상이 각 문화권에 확실히 존재해야 이러한 교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예시로 설령 불화 금니기법으로 성모마리아
서양화 템페라 기법으로 반가사유상
을 그렸다 해도 마찬가지다. 동양의 종교:불교 vs 서양의 종교:기독교의 기존 구조에 기반하고 이 패러다임을 더욱 공고히했을 뿐이다. 타자를 통한 나 자신의 이해는 처음에는 흥미롭지만 여전히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이피작가는 불화의 금니기법으로 아예 새로운 현대적 조형을 그림으로써 이 보수적 생각의 레짐에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만의 창의적인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냈다. 작가는 전통적인 상징언어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장르와 기법에 밀접하게 결합된 스테레오타입을 해체하고, 대신 자신만의 촉각적인 환상체계를 구성했다. 음식, 도구, 식물, 신체, 유기체는 부단히 상호 침범하고 뒤섞이는 탈경계의 관계적 존재로 제시된다. 화면전체는 수직적 구조를 띠고 있지만 딱히 어떤 순서도 없어 내러티브조차 부유하고 있으며 오브제는 명확히 생물인지 도구인지 혹은 작가의 알터이고인지 혹은 관람자 자신인지 피실험체인지 핀포인트해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만물의 뒤섞임이 괘불의 구도와 아예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니 불화기법으로 불화를 그린 것도, 대척점의 서양종교화를 그린 것도 아닌 아예 새로운 조형을 그리면서도 걸개그림의 구도와 친연성을 보이는 것은 아주 담대하고 신선하다고 할 수 있다. 22세기의 한국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국인이라는 핏줄이나 한국의 토양, 한국의 학벌도 아닌 새롭게 도출해낸 한국적인 것이다. 작가가 한국인이서가 아니다. 불교, 유교, 도교, 그리스도교와 원불교가 공존하는 한국적 비빔밥적 감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색연필과 수채의 사용은 표면을 유약하게 만들어 반투명한 질감 속에서 이미지가 덧칠되기보다는 스며들고 배어나오게 한다. 장지에 먹은 일종의 음각의 윤곽이자 그림자처럼 자리잡으며 각 조형요소들이 완전하게 경계 짓는 것을 거부하고 애매모호함과 유동성에 이바지한다. 몽환의 실험실에서 끄집어 실려나온 유기체가 각기 다른 리듬으로 자기 몸을 조율하고 있는 듯하다. 금속성 윤기를 머금은 노랑과 연보라의 유기체, 그리고 미묘하게 빛나는 청록 등 화면 전체를 부유하는 특이한 색채의 플로우는 흡사 살아있는 공기처럼 공간을 확장한다. 작가는 전통적인 화면 구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시각적 문법에 의거해 리뉴얼해 위아래의 중력을 전복하거나 우주적 시점을 부여함으로써 땅에 닿지 않은 감성을 시각화한다.

아울러 불교의 금니기법에서 유래한 금분의 라인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신성함의 상징에 정박되기를 거부하고 세속적 육체의 윤리와 감각의 마디를 꿰매 이질적인 질료를 잇는 실타래처럼 사용한다. 화면의 요소들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대자비의 봉합먹의 번짐과 색연필의 정밀한 선 사이에서 식욕, 오물, 분비, 성적 긴장에 정교한 예식성을 부여하는 금빛의 색은 마치 감각 사이의 이음매, 존재 사이의 경계선, 혹은 기억의 봉합처럼 기능한다. 이러한 재료적 중첩은 평면의 표면을 비단 이미지의 장뿐 아니라 새로운 감각적 전이의 신축 구조물로 전환시킨다. 새로운 필법 새로운 표현이다.

오늘은 피곤하니 여기까지만 쓰고 마무리해야겠다. 당연히 한국이란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 질문을 던지는 끊임없는 과정과 시도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외국유학, 이민 등으로 이한 해외동포의 숫자와 해외거주경험이 증가할 수록 더 다양하고 변칙적인 글로벌화가 만들어진다. 한국인 엄마와 미국이 아빠 사이에 태어난 교차적 한국인(혼혈은 차별적 표현이라 생각해 교차적intersectional이라는 말을 씀)은 토종 한국인은 생각하지 않는 접근방식으로 한국을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엄마와 자주 갔던 미국의 한아름 마트에서, 죽은 엄마를 생각하며 쓴 미셸 자우너 뮤지션/작가의 Crying in H Mart라는 책에선 미역국을 기름진 해초수프(a hearty seaweed soup), 짬뽕을 스파이시 시푸드 누들 수프, 설렁탕을 소뼈수프(ox-bone), 뚝배기는 전통 도기 냄비하는 식으로 재서술하는데 이런 표현방식은 한국인에게는 딱히 틀리지는 않지만 굳이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기에 낯설고 신선한 표현방식이다. 대략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게 또 다른 방식의 새로운 한국에 대한 표현이다. 이런 재서술은 이국에서 다시 뿌리를 내린 고향없는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표현이기도 하다. 잃어버리 한국적인 것을 재발견한다랄까. 이피작가에게서 그런 감성이 보인다. (나중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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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마석에 있는 모란미술관에 다녀왔다. 모란미술관의 조각공원은 잠실 소마미술관 올림픽조각공원, 종로 성곡미술관 뒷마당, 양주장욱진미술관 장흥조각공원과 더불어 5대 조각공원이다. 작품 수와 다양성으로는 손에 꼽을 수 있다. 시간의 세례를 입어 풍화되고 부식된 조각이 마치 적당히 헤져서 멋이 나는 가죽재킷과 닮았다.


김신일의 음각으로 글씨를 파내 조명빛으로 윤곽을 대신한 마음(2024)과 고근호의 바다쓰레기와 폐지로 만든 쓰레기반가사유상(2024)과 대웅전에 설치된 폐지지장보살상(2024)이 인상깊다. 부처는 깨달은 자의 통칭이니, 쓰레기에도 당연히 있는 법. 불교의 정수를 정확히 캐치해냈다. 버려진 것에도 부처의 마음이 깃들며, 생태를 아끼는, 환경을 보존하는 마음도 부처의 마음과 진배없다.


오른손의 시무외인(두려워말라)과 왼손의 여원인(소원들어주겠다)를 부서진 쓰레기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지장보살의 곁으로 순천만 갯벌의 공존라는 이름의 쓰레기 종이 물고기가 걸려있다.


배의 앞쪽 선교, 조타실 혹은 잠수함의 미스트 부분에 눈이 전방정렬되어 있고 미끈한 몸체는 에일리언을 닮은 이 물고기는 짱뚱어로 보인다. 귀엽고 재미난 순우리말이다. 눈이 튀어나온 물고기라는 뜻에서 한자로 철목어(凸目魚)라고도 하는데 썰물이 되면 광활한 갯벌에서 몸을 튕겨내며 영역 다툼을 하며 짱뚱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는 속담의 어원이 되었다.


아울러 그 멍텅구리한 모습을 본 전라도사람들이 수고스러울 뿐 결과도 목적도 없는 일을 한다는 뜻으로 뻘짓한다는 말을 만들어냈다. 참 맛깔난 방언이다. 짱뚱이와 망둥이가 펄떡펄떡 뛰는 것 말고 또 다른 뻘짓의 예시로는 나의 미술관 탐험기가 있다.


고근호의 이 환경중심적 테마 작품 옆으로 이용덕의 마주하기-만남(2000) 작품이 있다. 중밀도 섬유판(MDF) 즉 Medium Density Fiberboard를 122장 겹쳐 홈을 파내어 사람의 형상을 만들거나, 형상의 여집합을 제거해 레이어의 깊이를 드러내고 물성적으로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의 마주함을 시사한다. 이 역시 김신일의 음각 조명 마음처럼 파냄과 드러냄의 기법적 아이디어를 활용한 작품이다. 조각제작의 착상과 같다. 무엇을 생성할까? 보다 무엇을 제거해서 안에 숨겨진 것을 드러내게 만들까? 라는 것. 훌륭한 조각가는 물성의 덩어리에서 내면의 디자인을 긁어내는 자다.


이 중밀도 섬유판 말고 역상조각도 여러 번 봤는데 다시 보니 반갑다. 이용덕 작가의 역상(inverted)조각 시리즈는 입체적인 형상을 역으로 뒤집어 음각기법으로 안을 파내 부피감을 제거한 작품이다. 분명히 안이 파였는데 밖으로 돌출된 양각 효과를 내고 시선에 따라 사물이 자신을 따라오는 듯한 착시효과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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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곰은 마늘은 먹은 게 아니라 달래를 먹었는데

삼국유사에서 '산'이라는 한자는 달래, 즉 쓴 채소를 의미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마늘, 또 다른 쓴 채소가 들어와

원래있던 달래는 산 혹은 소산, 수입채소는 대산(큰 쓴 채소)이라고 했는데

번역과정에서 산을 마늘로 잘못해석했다는 것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5/06/07/WKAG32B54JHN5HGAQDO27N45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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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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