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

20240829-20250223





1. 서울 시립미술관의 영어번역은 국내 탑급이다. 예술계에 커리어가 있는 전문 번역가를 쓰고 영어권에서 교육받은 담당자가 감수하지 않으면 이정도 퀄리티가 나올 수 없다. 추측이지만. 


2.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전에 했던 전시에서도 영어설명이 좋았다. 호퍼는 그러려니 해도 스미스도 아주 좋았다. 물론 호퍼는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의 미술이지만 스미스는 다소 거북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현대미술은 영어가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어 제대로 된 영어설명없이는 그 매력이 반감이 된다. 스미스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늠좌로서 유려한 영어설명은 작품과 전시의 품격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키키 스미스-자유낙하

2022/12/15-2023/03/12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2023/04/20-2023/08/20





3. 논란과 경탄이 공존하는 천경자 컬렉션과 함께 있는 김인순 컬렉션. 지난 반년간 3번쯤은 들린 것 같다. 입구 앞에 있는 영상에서는 영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방금 시립미술관 유투브에 영어설명이 같이 있는 영상이 올라왔다. 여기서도 번역이 솜씨좋게 잘 되어있다.




4. https://www.youtube.com/watch?v=0tuGby0HIbI&list=TLPQMTgwMjIwMjWwpUL4jhqPDQ&index=10


● 0:07

1) 하게하다 요즘 용어로 prompt를 많이 쓴다. GPT 이후 거의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다.

이전에는 로켓공학자들을 위주로 launch(발사하다)가 start대신 쓰이다가 요즘에는 prompt를 많이 쓰는듯하다.

2)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to connect with people, 사람들과 연결되고로 잘 번역했다.



 1:03 

1) '아주 이게 철두철미했었어요' 같은 간투사를 

뒷 문장에 분사화해서 연결해서 "Inspired by his convictions,"(그의 신념에 감화되어서)로 이었다. 적절하다.



 1:26 영어의 문법대로 한국어를 잘 풀어낸 좋은 예시다.

1) with Noun + ving는 라틴어의 ablative absolute에서 유래된 표현기법으로 The Korea Times같은 영자신문의 기사에서 접속사의 빈번한 활용대신 많이 쓰인다.

그냥 느슨하게 문장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해서, ~하니까, ~하되 등 거의 아무거나 다된다.

with은 ~함께라는 전치사가 아니라 연결하는 기능을 할 뿐이며,

with Noun이 주어, ving는 동명사가 아니라 그냥 동사화해서 해석하면된다.


2) "at that time, with numerous protests happening and people being detained by the police"


"그때 with numerous protests 많은 데모가 happening 일어났고(and) people사람들이 by the police경찰에 의해 being detained 잡혀들어가고 이럴 때니까(이 표현은 앞으로 옮겨 at that time으로 풀었다.)


솜씨 좋은 번역이다.


 1:59 이 부분은 공부할 점이 있다.

1) "그때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 저 자신은, 사회가 요구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어요"

"back then, I pondered what defines true art"

pondered over도 되고 pondered + object도 된다.


그러나 자막 번역은 작가가 말한 '사회가 요구하는 일'에 대한 부분은 빼놓았다. 보완한다면 이정도가 되겠다.

"back then, I pondered over what defines true art and what society demanded from artists"


하지만 원어의 뉘앙스는 문장 요소를 다 정비한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이다. 말을 하다가 중간에 생각나는 것을 더한 것이고, 작가가 하려는 말을 완전히 전달하겠다면 숨은 함의를 끄집어내야한다.


만약 작가의 구어체 그대로만 기계적으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은데, 표현이 뭉개지고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옮기지 않음만 못하다.

"그때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 저 자신은, 사회가 요구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어요"

'Back then, when it came to true art, I personally pondered over what society expected."



보완하자면 이렇게 되겠다.


그 시절, 저는 종종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사회가 예술가에게 요구하는 바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죠.


번역하자면 

In those days, I often contemplated the true essence of art and wrestled with the expectations society placed upon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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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꼭두전에서 꼭두 대표의 인터뷰가 가장 감명 깊었다. 거대한 불상 도자기 그런 것은 다른 동아시아에 얼마든지 있다. 꼭두는 독특하고 처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박물관 미술관 대회에서 잠깐 15분 발표를 했는데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고 뉴욕 3년 전시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냥 청계천에 버리는 쓰레기 였다. 혹은 무덤에 묻어서 잊혀지고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꼭두에 세계의 관심이 있다. 


2. 그러나 전시 설명은 너무 아쉬웠다. 전시 개요를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했는데 외국인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안되는 설명방식이다. 한국어를 그냥 다른 외국어로 옮긴다고 내용이 다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외국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아무리 한국어로 읽고 있지만 뭔가 사고방식이나 설명방식이 다르다고 느낀 점이 없는가? 외국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말할 때 자세히 들어보면, 원어로 생각해서 한국어로 바꾸고 있는데 네이티브 같지는 않은 이질감이 든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나 생각 전개 방향도 우리가 원래 알고 있는 방식과는 다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유명한, 캐나다의 사회심리학자이자 문화 비평가인 조던 피터슨의 책을 읽어보면 분명 내용은 어디선가 읽어봤던 것 같은데 논리 전개 방식 같은 부분에서 조금 이물감이 느껴진다. 


위의 꼭두전 전시 설명이 대표적이다. 나는 이 전시의 영어설명이 아쉽고, 보완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번역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꼭두를 어떻게 외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까에 대한 문제이다. 꼭두를, 뉴욕 Met 뮤지엄, 테이트모던, 루브르에서 전시회를 한다면 어떻게 설명할까? 그들은 무엇을 알고 싶어할까?


사진 확대하면 한국어도 보인다.


3. 영어는 대략 이렇게 쓰여있다. 

Life ends, as it does for all living things. Death, a constant stranger to the living, is something we've never truly known. Death is whispered to be the beginning of a journey into the unknown. The living may feel deep sadness inthe face of death, but they cannot join the journey to the next world. All they can do is sending someone with those who must go. The only friend on the way to the other side is Kokdu. Just as the midwife welcomes us at birth and the parents care for us in life, when we exhale our last breath here and inhale the first in the afterlife, it is Kkodu who welcomes and guides us. And this exhibition invites you to meet Kkodu, a Korean carved wooden figure. Often vibrantly painted, Kokdu figures represent various roles, helping the transition peacefully to the afterlife. Korean ancestors would say "go back" instead of "die," believin that the place we go after death is where we first came from. As we journey through the world of the dead, returning to their spritual home, surrounded by the vibrant and colorful Kokdu, and with a piece of our cherished heritage, we hope you reflect on life and death through the lens of Korean tradition.


문제점은 네 가지다.

우선, 표현이 지나치게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처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뜬금포로 시작한다. 그러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 설명문은 전시회 개괄-배경-작품-의의 같이 구조적으로 작성된다. 표현하고자하는 바도 명확해야한다. 만약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다면, 죽음에 대한 의미를 성찰한다는 표현으로 족하지, 이렇게 "죽음을 바라보는 산 자들의 마음은 비통하지만 그 여행길을 할 수 없다. .. 길동무를 붙여줄 뿐이다... 꼭두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 더 지적할 부분은 "하지만"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역접의 표현도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비통한 마음의 반대항으로는 그나마 할 수 있는 행동이나 태도에 대한 부분이 나와야한다. 

예를 들어

떠나보내는 마음은 비통하지만,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떠나보내는 마음은 비통하지만, 남겨진 자들은 망자의 여정을 돕는다.

떠나보내는 마음은 비통하지만, 장례 의식을 통해 그들을 떠나보낸다.

같은 문장이다.


'산 자들은 죽은자들과 함께 하고 싶어도 죽음의 길로 직접 떠날 수 없지만,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전달하고자하는 바에 가깝다.


둘째, 주제의 초점이 모호하다.


글의 초반부에서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길게 이어지다가 전시의 핵심 주제인 ‘꼭두’가 늦게 등장한다. 일본의 전시 설명에는 반드시 처음부터 단어 설명이 있다. 어려운 한자라면 요미가나도 달아둔다. 왜냐? 핵심 용어에 대해 정박시키고 공유해야 탄탄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시 설명에서는 꼭두에 대한 개념이 낯선 방문객들에게 기본 개념이 너무 늦게 등장한다. 이런 표현 방식이 한국에는 너무 만연하다. 오랫동안 그 화두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한글의 우수성 때문인 것 같다. 너무 가독성이 좋고 외국의 표현들을 원문 그대로 흡수할 수 있어서 설명 없이 지나치는 것이다. 이 점이 확대되어서 한국의 대부분의 업계에 메뉴얼도 없고 데이터베이스도 없고 사수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문화가 너무 만연하다. 이 이야기를 하면 길어지므로 일단 여기서 중단.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같은 표현은 문학적으로는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전시 설명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명확성이 부족하고 비슷한 표현이 반복되는데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변죽만 울린다. 이 문제는 다음으로 연결된다.


셋쨰, 꼭두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부족


꼭두가 사후 세계로 안내하는 존재라는 점은 언급되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예술적, 의례적 중요성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습니다. 아직 학술용어가 정비되지 않아서 그럴 수는 있으나, 서양미술에서 보이는 온갖 의복, 안료, 기법에 대한 용어들, 일본장식예술에서 보이는 온갖 부분에 대한 한자용어들이 없다. 이 전시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모호한 "꼭두"라는 말 하나 뿐이다.




4. 만약 나라면, 꼭두를 뉴욕이나 영국의 세계 최고의 전시회에서 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겠다면 이렇게 하겠다.

서양인들은 선진국인들은 일단 처음에 포커스를 딱 잡는다. 그래 박물관 안으로 들어왔다. 전시회의 주제는 무엇인가? 꼭두다. 그래 그럼 꼭두는 무엇인가? 그럼 이제 꼭두를 설명해야한다. 꼭두가 뭐지? 하고 들어온 외국인들에게 밑도 끝도 없이 삶은 끝이 없고.. 죽음은 우리의 곁에 있고.. 이런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밀한 용어 제시해서 닻을 내려주듯 고정시켜줘야한다. 

1. 용어 정의 및 기능 (당신이 보고 있는 바로 그 것, 꼭두란 무엇인가?)

2. 신앙, 상징 (꼭두의 기원, 배경은 무엇인가? 왜 만들었고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 꼭두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

3. 예술적 문학적 가치 (꼭두라는 작품을 통해 읽을 수 있는 한국 전통 사회에 대한 설명, 2단락에서 3단락으로 넘어가며 미시에서 거시로 시각이 확장된다. 마이크로에서 매크로로.)

4. 전시 의의 (그래서 이 전시의 의도는 무엇인가, 왜 꼭두를 전시했는가, 3번을 거쳐서 큰 맥락을 설명해야 확장한만큼 4번의 의의에서 전시회의 가치가 커진다.)



Kokdu: Guardians of the Afterlife

꼭두: 사후 세계의 수호자


In traditional Korean funerary rites, death was not considered the end but rather a passage—a journey requiring both guidance and protection. At the heart of this transition stands kokdu (꼭두), intricately carved and vividly painted wooden figures that accompanied the deceased on their final procession. Adorning funeral biers, these figures served a dual role: providing spiritual guardianship and offering companionship to ease the soul’s journey into the afterlife.

한국의 전통 장례 의식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에는 길잡이와 보호자가 필요했으며, 바로 그 역할을 맡은 것이 꼭두(꼭두)입니다. 정교하게 조각되고 화려하게(생생하게) 채색된 이 나무 인형들은 상여에 부착되어 망자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며, 영혼이 사후 세계로 평온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영적인 수호와 동반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의 전통 장례 의식에서 사용되는 도구로서 역할을 밝히고, 꼭두에 대한 용어정의를 바로 동격(apposition)으로 넣음. 이렇게 용어를 정박시키는 순간 꼭두는 청계천과 시골 마을에서 버려지는 쓰레기가 아니라 "정교하게intricately 조각되고carved and 생생하게vividly 채색된painted 목각wooden 인형figures"로 재탄생됨. 


The origins of kokdu are deeply rooted in Korean folk beliefs, where death was seen as a return rather than an absolute departure. These wooden effigies embodied this worldview, often appearing in anthropomorphic or zoomorphic forms—jovial jesters, fierce warriors, benevolent caretakers, mythical beasts—each fulfilling a specific function. The jester alleviated sorrow through humor, the warrior warded off malevolent spirits, and the caretaker ensured the deceased did not embark on their journey alone. This fusion of solemnity and playfulness reflects the uniquely Korean approach to mortality: a reverence for the dead, tempered with a belief in the continuity of life beyond death.

꼭두의 기원은 죽음을 절대적인 이별이 아니라 ‘귀환’으로 바라보는 한국 민속 신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을 반영하듯, 꼭두는 인간 또는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익살스러운 광대, 사나운 전사, 자애로운 시중꾼, 신화 속의 짐승 등 각각의 형상은 저마다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광대는 유머로 슬픔을 덜어주고, 전사는 악령을 물리치며, 시중꾼은 망자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보살폈습니다. 이처럼 장엄함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꼭두는 한국인 특유의 사후관을 상징합니다. 죽음을 두려운 단절이 아니라 삶의 연속으로 바라보며, 죽은 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믿음이 이 목각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Beyond their ritualistic function, kokdu also offer insight into Korea’s artistic traditions and social values. Their dynamic compositions, exaggerated expressions, and unrestrained use of color situate them within the broader context of Korean folk art, where spontaneity and emotional immediacy take precedence over rigid formality. The craftsmanship evident in these figures suggests not only their role as sacred objects but also their connection to popular entertainment, particularly kkokdugaksi noreum, a form of puppet theater that brought both satire and spiritual reflection to funeral rites.

의례적 기능을 넘어, 꼭두는 한국의 예술 전통과 사회적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생동감 넘치는 구성, 과장된 표정, 자유분방한 색채 사용은 한국 민속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이러한 자발성과 정서적 직접성은 장례 의식에서 형식적 엄숙함보다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것을 중시했던 한국적 미의식을 반영합니다. 나아가 꼭두의 제작 기법과 디자인은 단순한 장례 용품을 넘어, 풍자와 영적 성찰을 담은 전통 인형극 꼭두각시 놀음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This exhibition presents a rare opportunity to explore kokdu not merely as funerary artifacts but as cultural symbols that encapsulate Korea’s perception of life, death, and the unseen world beyond. By engaging with these vibrant figures, visitors are invited to reflect on the ways in which art, belief, and ritual converge to shape our understanding of mortality across cultures.

이번 전시는 꼭두를 단순한 장례 공예품이 아니라 삶과 죽음,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저세상에 대한 한국인의 독특한 시각을 담은 문화적 상징으로서 조명합니다. 이 생동감 넘치는 목각상들을 통해, 예술과 신앙, 의례가 어떻게 결합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문화를 형성해왔는지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결국 하고 싶었던 죽음에 대한 성찰은 "인간의 유한성mortality"라는 명사 하나로 족하다. 서양은 명사중심의 언어이기 때문. 명사를 중심으로 형용사와 분사화된 동사로 압축해서 하나의 개념 세트를 만든다.


5. 책은 평점을 남길 수 있으나, 전시, 영화 같은 집단예술은 평점을 매기는 것은 복수의 창작자들의 노고를 폄하하고 의욕을 꺾는 일이다. 그리고 혹여 비판을 했다면 반드시 대안을 남겨야한다.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일 뿐이기 때문. 그래서 나라면 이렇게 쓸 것이라고 대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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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을 다닐 때 내 전공은 아닌데 우연히 기회가 되어 미술사 수업을 들었다. 학부수업도 대학원수업도. 어느 유명 교수님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미술관 박물관 명승지를 다녔다. 교수님은 따로 아무 설명도 안했다. 그런 교조적이지 않은 태도가 참 좋았다. 선생님은 그냥 기회를 주었고 함께 하셨고 학생들은 천둥벌거숭이처럼 알아서 돌아다녔다. 그때 나는 비로소 미술관에서 보면서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왜 그런 기회가 그때 내 앞에 주어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때론 인생에서 홀린 것처럼 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보물처럼 선물처럼 주어지는 기회가 있고 그 기회를 추수했을 뿐이다. 추수하는 것도 운이다. 그러다가 미국 수능이라고 할 수 있는 AP 미술사를 가르치는 기회가 있었고 미국 교사들과 전문 교수워크샵 과정을 이수하고 나서 칭찬도 받고 하면서 왜 선진국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지, 왜 유럽 미국인과 각 나라의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술관 박물관을 많이 가는지 깨달음이 생겼다. 책을 쓰고 싶어졌다. 


당장 먹고 사는데 도움도 돈도 안되는 미술, 이해도 안되는 미술을 그렇게 보러 다녀서 무슨 소용있는가? 그것이 선진국의 연습문제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일부를 위한 미술인 것 같지만,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미술관 박물관 방문 티켓 가격이 가장 낮다. 그림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보는 것'이라면 가난해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왜 그렇게 허들을 낮추는가? 미술관 박물관이 시민교육의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미술관 박물관에서 사람들은 창의성을 기르고 뇌훈련을 하고 사고의 업그레이드을 한다. 그렇기에 무료이거나 티켓이 싼 미술관 박물관이 많다. 상하이 미술관도 무료이고 The Met, 테이트, 내셔널갤러리도 국립현대미술관.. 모두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다. 콘서트 티켓이 오히려 훨씬 비싸다. 태국에서는 케이팝 콘서트 티켓 하나가 월급과 맞먹는다고 하는데 누구도 아이돌 콘서트를 엘리트 문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왜 미술은 엘리트의 전유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가? 실제로는 가장 허들이 낮은데, 사실 모든 시민을 위한 예술인데.


화가여야만 미술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전문가여야만 미술관에 가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도 미술작품을 보면서 영감을 얻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술안료의 화학성분 분석 같은 것인가? 얼굴의 골상 분석? 아니다. 그런 전문지식을 얻는게 아니라 더 큰 메타적 인식방법에 가깝다. 사물을 보는 시각을 배우는 것이다. 미술작품을 예제로 상상과 창의를 연습하는 것이다. 과학자의 역할은 결과물만 보고 그 과정을 가설을 거쳐 복원해내는 것이다. 미술작품도 화가가 그린 결과물만 보고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시회의 배치만 보고 전시를 기획한 학예사의 생각이 무엇인지 출제자의 의도를 하나씩 톺아보는 생각의 훈련을 한다. 


유투브를 통해 무슨 돈을 번다고? 하면서 콧방귀던 시절이 불과 10년 전이다. 20년 전 굴지의 케이팝 기획사 초창기에는 딴따라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영화쟁이가 굶지 않고나 살 수는 있는지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는 누구나 그들의 작업에 함께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돈을 그 업계 주식에 투자하고 싶어한다. 문화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멀리는 외국의 잘 나가는 작품을 학습하고 서로 서로 참조해가면서 업계를 성장시켰는데, 정말 아무 것도 없던 맨땅에 헤딩하면서 성장시킨 것이다. 예외적인 개인, 신데렐라, 메시아에 가깝다. 선진국은 그 저변이 넓다. 선수가 될 사람만 스포츠 하는게 아니라 생활체육의 저변이 넓고, 콩쿠르에서 이기기 위한 음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음악을 조금씩 하면서 삶의 질이 향상되는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미술관 박물관에서 배우는 연습문제.


사실 예술은 본래 부질 없는 것이다. 먹고 사는데 관련없다. 그러나 부질 없는 예술이 바로 선진국으로 진입한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모두가 새마을운동하면서 으쌰으쌰 조국은 건설하던 시기에는 예술은 사치라는 국민적 합의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당장 내일의 끼니를 굶고 깨끗한 물과 더위와 추위를 막을 집을 고민해야하는 상황에서 예술은 당장의 고민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고민에서 상당히 많은 인구가 벗어나게 되고(가난을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으니까) 등따숩고 배부르게 된 오늘날에서 한국은 예술을 고민해야한다. 바로 그 문화가 우리의 부와 평화를 지속가능하게 해줄 것이고 부가가치를 올려줄 것이고, 김구가 그리던 문화의 힘을 세계에 떨치게 해줄 것이다. 예술과 문화는 선진국이 된 오늘날 한국의 화두이다. 그러나 누구도 어떻게 예술과 문화를 익히고 배워야할지 알려준 적이 없다. 그러니 이제 선진국의 시민들이 미술관 박물관에서 무엇을 감상하고 배우고 그 인사이트가 그들에게 어떻게 활용되는지 조금 생각해보자. 배부르고 먹고 살만하게 되었으니 이제 다음 세대는 문화와 예술을 배워보자. 쓸데없는 것을 배우고 익히자. 주변에는 쓸데없는 것들 하는 사람들 투성이다. 피규어 만드는 사람 게임 하는 사람... 그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 중에 연봉 5-70억원인 페이커도 나오고 원피스 피규어 만들어 천만원에 파는 사람도 있다.


예술만 쓸데 없나. 교육도 그렇다. 쓸데 없고 부질 없다. 고등학생 눈에 구구단 배우는 학생이 얼마나 한심해보일까. 프로 선수의 눈에 초급반 학생의 움직임이 얼마나 한심해보일까. 그러나 모든 학습자는 자신만의 엄청난 분투를 하고 있다. 고귀하지 않은 학습은 없다. 누군가에게 한심하게 쉬운 내용이 누군가에게는 뇌가 쫄깃할 정도로 큰 에너지를 사용하는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그러나 누가 교육이 쓸데 없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가. 


대학 교수의 눈에 초등학교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은 지나치게 쉬워보일 수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의 본분은 전문지식 학습이 아니다. 훌륭한 초등교사는 학생들에게 맞고 틀리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북돋고 자신감을 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회에는 초등 교육을 가르칠 사람이 가장 많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미술사학자는 영관급, 도슨트는 소위 중위 등 초급장교라고 할 수 있겠다. 미술사학자는 전문가로서 그 나름의 본분이 있다. 누군가는 평생 반 고흐의 작품만 연구해야한다. 최근에는 미발견 작품이 6400억원에 팔렸는데 온갖 복원, 감식 전문가가 있어야 작품의 진위를 판명할 수 있다. 고독한 학문의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누군가는 디테일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 평생 기와, 꼭두, 칠기, 탱화를 연구해야만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미술사학자가 되기 위해 미술관을 가고 미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도슨트의 숫자가 학자보다는 훨씬 더 많이 필요할 수 있다. 훌륭한 도슨트가 많아지면 미술작품을 향유하는 계층의 저변이 넓어질 것이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이 작품 저 작품 다양한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도슨트가 되어 매번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며 미술작품에 담긴 재미난 스토리를 들려주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나의 관심은 선진국 사람들은 왜 미술관 박물관을 그렇게 자주가는가? 그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는가? 좋은 미술관 박물관의 설명들은 우리를 어떻게 고양시키는가? 그러한 인사이트들은 우리를 어떤 넥스트레벨로 데려다주는가? 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최신의 전시를 빠르게 취재하고 알맞은 형태로 재가공하는 데 있다. 


박사가 되면 논문을 쓰고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갖게 되고 아주 세밀한 자기 전공에 도덕적인 윤리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 나는 그정도까지 하나만 파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리 도슨트라고 해도 하나의 전시에 매여있게 된다. 나는 이 전시도 저 전시도 다 관심있었다. 새로 신메뉴가 나오면 먼저 먹어보고, 새로 영화가 나오면 꼭 챙겨보고 새로 전시를 하면 꼭 가보는 내 라이프스타일에 가장 맞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조금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롤모델이 많지 않았다. 오래 전의 롤모델, 고희동 같은 평론가, 외국의 롤모델, 전문적으로 미술 전시를 가고 리뷰하는 사람들, 더 뉴욕커, 뉴욕타임즈, Best American Food/Travel Writing같은 저널리스트들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최종적으로 닮고 싶은 글은 Laurie Schneider Adams와 Dr.Beth Harris이다. Laurie Adams는 르네상스-19세기 서양미술에 관해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글솜씨를 자랑하는 교수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잡지식을 자랑하지도 않고 너무 전문적인 역사용어로 압도하지 않고 전달한다. 25만원에 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책은 가격이 전혀 아깝지 않다. 조금 더 가성비 있는 만8천원짜리 19세기 서양미술 교양서는 몇 번이고 읽어도 간결한 학술영어의 매력이 살아있다.


원래 쓰고 싶은 글이 있었다. 그 글의 내용은 비밀. 캐나다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한 사람이 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편집자를 하고 싶다고 했고 외국에서 먼저 출판을 하려고 했지만,  외국 출판사에서 무명작가가, 그것도 논네이티브 잉글리시 스피커가 책을 출판하는 것은 너무 쉽지 않다고 하였고, 오히려 한국에서 먼저 출판해서 출판시장에서 조금씩 네임밸류를 올려야한다는 데 서로 동의를 했다. 동아시아인이 동아시아를 다루는데 동아시아에서 먼저 출판하는 게 외국출판사들에게도 더 설득력이 있겠지. 그래서 일단 영어로 쓰던 글은 잠시 멈추고 2023년부터는 이 책을 쓰려고 지난 1년간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미술관 박물관을 다녔고 이제 자료는 충분히 모으고 어떻게 쓸지 구상이 끝났다.


이제 매일 쓰면 된다. 일간 발행! '미술관에서 외국어 공부하기'를 매일 써서 알라딘에 올리고 편집해서 책으로만 만들면 된다.


미술작품을 보는 방법을 캡션을 통해 외국어 비교 설명하는 방식으로. 

미술관 박물관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읽는지 공유하는 글을 퍼블리시한다. 



미술관 박물관에서 외국어 공부하기 - 

이과에게 수학문제가 있다면 문과에게는 예술작품이 있다!

수학자가 될 것도 아닌데 왜 이과는 수학문제를 그렇게 열심히 풀까? 과학분야에서 필요한 논리적 사고과정을 연습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문과는 무엇을 통해 연습해야하나? 그 연습문제는 바로 미술관 박물관에 있다.

왜 화가도 아닌데 미술사학자도 아닌데 선진국에서는 그렇게 미술관 박물관을 많이 갈까?

미술사학여자여만 관련분야 전공자여만 미술을 감상할 수 있을까?

미술관 박물관을 습관적으로 다니는 유럽인, 미국인들은 무엇을 보는 것일까?

미국의 수능 AP 미술사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가 되려는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반드시 배워야하는 것은 크리에이터를 위한 미술감상교육

선진국 22세기형 창의형 인재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는데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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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이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는 The Pianist에 이어 홀로코스트를 다룬 연대기적 영화에 나왔다. 적절한 캐스팅이다. 


2. 중간에 인터미션이 있는 영화는 비비안 리Vivien Leigh가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로 분했던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였다. 중간 휴식이 있는지도 모르고 갔는데 러닝타임이 3시간 48분에 달하니 필요했을 것 같다. 긴 영화라 하면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Offret, 1986)가 러닝타임 2시간 29분이고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4시간 2분이다. 그런데 둘 다 별로 긴지 모르고 봤었는데 오히려 인터미션이 있으니까 길다고 느껴진다. 한 호흡에 쭉 끝까지 가느냐 아니냐의 문제인듯하다. 요즘 관객들은 OTT의 보급으로 인해 드라마 정주행하는 경우가 많아 6시간이고 앉아서 보지만 1시간마다 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으니 다음화 버튼 클릭하는 자체가 1시간 인터미션이라 볼 수도 있겠다.


3. 많은 사람들이 너무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너무 적나라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편집을 조금 경제적으로 끊으면 더 흡입력이 있을텐데 왜 이렇게 굳이 길게 자잘하게 보여주나, 너무 젊은 감독(88년생)이라 모든 테이크가 소중해서 그런건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감독의 영리한 연출방식인 것 같았다. 건축의 브루탈리즘(Brutalist movement)에서 추구하는 바를 영화의 문법에 맞게 구현했다. 영화의 메시지와 영화의 연출방식이 호응하느냐? 그렇다. 가공하지 않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내고, 필요없는 장식은 덜어내고, 내부 구조를 다 드러내되, 자랑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 존재감으로 드러내는 브루탈리즘의 사조를 그대로 영화에 옮겨두었다. 


4.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The Oppenheimer의 청문회에서 알몸으로 벗겨진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한 신이 생각난다. 시간 속에 풍화되어 삭아 낡아가는 고전시대의 영광스러운 건축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고양감보다는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젊은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산업발전단계나 인구구조 측면에서 혈기왕성한 젊은 사회에서는 애국심, 가족애, 할 수 있다는 진취감을 드러내는 서사, 딱 보면 무슨 말인지 아는 스토리가 흥행한다. 인도네시아에서 7번방의 선물이 흥행하듯이, 우리나라의 90-00년대가 그랬듯이.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 그전에는 용납할 수 없었던 자신의 부족함,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의 아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던 주변인들과의 소통 등이 모두 복구가 되어가며 사태의 이면을 보는데 더 큰 관심을 헤아리게 된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 맛보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자가 소비하느 서사는 다르다. 베를린 황금곰상 수상작을 보면 알 수 있다.


5. 실화는 아니다. 라즐로 토스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 배우는 아니다. 그러나 있음직한 캐릭터이고, 역사적 사건과 배경에 밀접하게 기대어있다. 팩션이라고 봐도 되겠다. 홀로코스트+음악가=피아니스트, 홀로코스트+기업인=쉰들러리스트, 홀로코스트+건축가=브루탈리스트라고 거칠게 분류해 봐도 되겠다. 쉰들러리스트나 사울의 아들도 잘 만든 영화였고, 최근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있었다.


6.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는 장면같이 감정이 고양이 되어야할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사운드를 미스매칭한다. 

에필로그가 너무 갑툭튀다. <1947보스톤> 같은데서 볼법한 영화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설교하는 연설신이다.


7. 교포 배우들이 영어를 잘하는데도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스테레오타입에 경도되어 아시아계 못난 발음으로 해달라는 것을 차별이라고 생각해서 불편해한다는 여럿 접했다. 분명 미국인이 부탁하는 태도에서 미필적 무시나 뇌맑은 편견이 있었을 수 있다. 원래 잘 모르니까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구는 알고도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발음이 미숙하 아시아인을 연기하는데 너무 능숙하게 하는 것도 캐릭터의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 스페인계나 인도계나 다른 인종들은 자기 인종그룹을 연기하면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아시아계만 유독 백인들이 무시한다고 여긴다. 아시아계의 하나가 아니라,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아시아계는 자기가 주류라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 뉴욕 퀸즈에서 태어난 미국 네이티브 에이드리언 브로디도 헝가리 출신의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그 악센트를 따로 연습했다. 영화 안에서 부자이 해리슨 밴 뷰런(van이 붙었으므로 조상은 네덜란드계였을 것이다. New York의 전신은 New Amsterdam인 것을 기억하자)이 악센트에 대해 트집잡는데 그는 솔직히 조금 심한 편이다. Over을 오버가 아니로 오베르라고 발음한다. 아내는 옥스포드에서 영어를 공부한 헝가리 기자인데, 밴 뷰런은 아내의 영어를 칭찬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들었을 때 영어 악센트가 네이티브는 아니다. 그러나 큰 무리 없이 들어줄만하고 오히려 순발력 전달력 관습적 표현에 익숙한 정도가 더 중요한 것 같다. 


8. 마지막 엔딩 크레딧은 45도 각도로 상향하며 움직이는데, 이는 45도 각도로 서재를 낸 것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은 점은 각도만 틀었을 뿐인데 애니메이션적 효과를 주었다는 점이다. 아래쪽을 주목해보면 올라오는 글자들이 마치 매트릭스의 글자가 흘러내리듯, 글자가 옆으로 써지는 것 같은 효과가 있다. 각도로 하나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표현기법을 자아낸, 아주 조그마한 하나를 바꿈으로써 전체에 새로운 효과를 주는 브루탈리스트 무브먼트의 은유다.

9. 초반에 홀로코스트를 피해 탈출에 성공해 뉴욕에 도착한 주인공이 배가 정박하자 잠에서 깨 도착한 미국을 보기위해 허겁지겁 갑판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휩패닝샷으로 반전해서 찍고, 다시 그 화면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보이는 카메라 워크가 인상 깊다. 자기가 그리던 아메리칸 드림도 반전되었고, 심지어 그 반전된 장면도 거울에 비친 허상에 불과하다는 영화적 연출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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