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 노부히로(諏訪敦彦)의 오늘 밤 사자는 잠든다(Le lion est mort ce soir, 2017) 보고 왔다


c'était un rêve. J'ai cru t'avoir vraiment vue 꿈이었구나 정말 널 봤다고 생각했는데


구로사와 기요시나 츠카모토 신야와 비슷한 세대 감독인데 덜 알려졌으나 영화가 훌륭하다. DVD소장하고 있는 곳이 별로 없어서 찾아가서 봐야하는 것이 흠. 흠.. 아직 스와 노부히로 필모를 다 보지 못해서 나는 아쉽다


장자의 호접지몽이 생각나는 액자구조를 취하면서 동양적 느낌을 풍긴다.


액자구조는 2개다. 촬영현장에서도 죽는 연기를 하고 별장에서도 영화키즈들과 함께 죽는 연기를 한다


수미쌍관이기도 하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모두 원경에 높은 산이 차경으로 잡히는 베이지색 유럽별장 루프탑에서 선베드에 누워 죽는 연기를 하는 장(누벨바그의 대표적 배우 장 피에르 레오 분)이 화면에 들어오는데


처음에도 꿈이었네(c’était un rêve)로 대사를 열고 마지막에도 꿈이었네라고 대사를 친다. 다만 마지막에는 정말 널(여자 너) 봤다고 생각했는데(Ah, c’était un rêve. J’ai cru t’avoir vraiment vue)가 추가된다. (t에 vu+e가 들어갔으니 여자다. 아부아르 뻬뻬에 직접대명사 전치일 경우만 분사에 성수일치)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70대 노배우 장은 죽는 연기를 할 수 없다. 감독 뱅상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Je ne suis pas du tout d’accord avec cette idée de la mort) 숱한 연기에서 죽어왔지만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 그는 이제 죽음을 어떻게 연기할 줄 모르겠다(J’ai un problème, je sais pas comment jouer la mort) 감독은 평화롭고 부드럽게 잠드는 연기를 하라고 하지만 장은 죽음이 만남이라고 생각한다(La mort, c’est la rencontre). 그래서 이틀사흘정도 쉬기로 하고 어렸을 때 사랑했던 줄리엣을 찾으러 간다.


줄리엣은 죽었다. 친구에게 스스로 죽었냐고 물어보고 사고라고 답한다. 그녀의 묘비명에 1949-1972라고 써있으니 23세에 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영화찍는 10대 초반의 아이들이 우르르 등장하고 어쩌다보니 그 아이들의 요청을 받아 영화를 찍게된다. 장난감총으로 죽는 플롯의, 아이들 기준에서는 공포인 영화다. 영화를 다 찍고 조금의 깨달음을 얻고 다시 촬영현장으로 복귀한다.


설정은 물론이거니와 히로인 이름부터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게 하는데 죽은 연인 줄리엣을 만난다는 설정이 서양문학의 느낌을 준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문을 뛰어넘는 동년배의 사랑은 아니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다. 이에 더해 저편에서 깨달음 혹은 죽음을 이해하고 돌아온다는 구조가 오뒷세이아의 키아스무스구조를 닮았다


이폴리트 지라르도와 함께 합작한 프랑스-일본 영화 유키와 니나(2009)에서 나왔던 10대 초반의 혼혈소녀 유키가 성장한 아가씨가 되어 잠깐 까메오로 등장한다. 유키(노에 상피)의 왓차피디아 필모에는 없지만 분명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러니 너무 DB나 인터넷 자료 믿지 말고 자기 스스로 작품을 봐야한다. 그리고 힘을 내어 끝까지 봐야한다.


노인과 바다도 다이제스트나 설명문으로만 읽으면 한계가 있다. 대충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직접 읽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직접 소설을 읽으면 중간에 양키에 대한 가십도 있고 출발할 때 적막이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모두 직접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AI시대에 가상공간에 업로드되지 않은 지식, 현장에 가야 알 수 있는 노하우, 관련없는 여러 지식을 연결하는 커넥팅닷의 능력이 각광을 받을 것이다. 피지컬 AI가 나온다고 해도 인간 스스로 가서 배우고 익히고 느끼는 경험적 지식이 중요하다. 그 경험은 대체불가능한 나의 것이다.


연출감각이 좋다. 유키가 3-4층 집에서 할머니를 부르고 카메라 틸트다운해서 밑에 있는 얼굴을 잡는다든지 거울에 반사된 면을 사용해서 피사체를 잡는다는지 하는 부분이 인상깊다.


사자는 두 컷 등장한다. 7살 때 아빠가 사고로 죽어 19시까지 통금을 강요하는 과잉보호 편부모 엄마 밑에서 자라는 남아의 앞이다. 이 아이가 그 무리 중에 가장 성숙한 편. 사자가 등장하는 한 장면은 호숫가 나무 사이에 쉬고 있는 장면이고 다른 한 장면은 도심사이를 걸어가는 장면이다(아마 CG). 사자는 노배우 자신을 상징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 제목은 노래제목이기도 하다. 두 번 정도 같이 부른다. 


자막이 없었다. 다행히도 오래 불어를 해서 반 이상은 알아들은 것 같다. 번역 자체도 힘들었을 것 같다. 아이들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를 일일히 다 잡아내 번역할 수 없었을 거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화면 안에서 연기하도록 하는 테크닉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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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화랑에 다녀왔다. 강철작가의 인연을 쌓다: 연적을 하고 있다


소형 사각 금박은박지를 캔버스에 다닥다닥 붙이는 그림노동 후 울트라마린계열의 아크릴을 부어 말리는 웻온웻 작업을 반복한 것처럼 보인다. 인내심을 요한다. 캔버스 위에는 그런 스밈과 말림의 반복이 남긴 흔적이 보인다


서양유화는 빛의 음영을 실험하고 원근법으로 깊이를 주며 점토운용을 빌어 마티에르를 통해 입체감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편 한국단청화는 빛과 시간을 물의 농담으로, 돋운 마티에르의 돌출감 대신 한지 등 재질 자체의 표면감으로 주는 것 같다

평면의 금은박은 빛의 방향에 따라 변하는 서양화와는 달리 빛의 초점을 산란시키며 캔버스 전체에 걸쳐 균일하게 빛나며 시간의 농도를 형상화한 아크릴-먹의 번짐과 스밈의 경계를 지운다


성스러운 광물의 찬란함에 양기의 금, 음기의 은이 녹청을 외연으로 인도하여 상선약수의 리듬와 기운생동의 확산을 시각화한다


주목할 점은 안료의 번짐의 금박의 구조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


금속박의 반사되는 빛의 윤슬 위에 올린 아크릴은 일견 서양의 도구지만 한국의 기법으로 만들어져 동서문화의 교차성과 기법의 혼종성을 표방한다.


인위적인 동심원이 아니면서도 중심으로 집중되는 안료의 흐름은 마치 기를 수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적 중심이 고정된 상태로 너무 깊지 않은 연못과 같다. 뿜어져나가는 발산이 아니라 색이 유동하며 응축된 에너지처럼 보인다. 장자의 허정, 비움과 고요함 속의 진실됨이다


선조들이 그토록 바랬던 동도서기의 지향이 시간의 세례를 입어 현대에 정착된 증거다. 서양의 기법과 동양의 유기적 세계관이 하나의 장에서 상호교차되어 지금-이-시공간에 존재하는 이들의 리듬을 감각하게 한다


재질 사이에 스며든 자연물감인 먹과는 달리 표면 위에 머무른 화학물감인 아크릴은 의미를 깊이에서 솟아나게 하기보다 표면에서 생성되게끔 한다. 고정된 단청문양이 아니라 발생하는 무늬로서, 물질적 실체로서 반사가 아니라 경험과 과정의 은유로서 새로운 물성의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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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 다녀왔다

서울 아라리오갤러리와 뮤지엄인스페이스

제주 아라리오동문모텔 3개관에 이어

아라리오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입구에 데미안 허스트의 <찬가>가 관객을 맞는다. <단다단>의 인체모형 캐릭터 타로를 닮았다. 안에는 인공바람으로 플라스틱 눈알공이 팅팅 휘날리는 허스트의 작품이 하나 더 있다

운보김기창전을 하고 있다. 수도권외곽지역은 땅값이 싸서 건물이 거대하고 전시장이 넓어 거닐기에 쾌적한 맛이 있다. 가는 거리를 제외한다면 전시경험의 퀄리티는 보장된다. 동선 초입에 회사 설립자가 삐뚤빼뚤 쓴 손글씨가 관객을 맞는다. 교정과 표현마저 날 것 그대로여서 김기창 작품을 좋아한다는 진심이 전해진다

털을 그리기 위한 0.1mm의 세필에서 산세를 표현하기 위한 부벽준까지 붓의 운용이 다양하고 자유롭다. 새눈, 꽃잎, 가지에 이르기까지 먹의 농담도 정교하여 가히 수묵도구의 마스터칭할만하다. 새의 정면샷이 인상깊다. 평면위 다람쥐와 말의 다중시점표현이 입체감을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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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고래책 - 고래가 들려주는 지구와 생명의 진화 이야기 사소한 과학 시리즈
김은정 지음 / 한권의책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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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33번째 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What Does That Nature Say to You 보고 왔다


권해준 부캐 최준이 배꼽냄새나는 병맛이라면 홍상수는 엄지와 검지발가락 가운데 낀 때 같은 시큼한 병맛에 가깝다. 아는 맛인데 어쩔 수 없이 매번 찾아본다. 일단 매몰비용이 아까워서다. 33번까지 봤는데..


하지만 지속적인 관람의 중요한 이유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소셜 코멘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훗날 예술작품의 하나로서 특정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 르포연구 사료가 될 것으로 본다. 있을 법한 캐릭터로 일반적인 마음을 그렸다. 일반적이라는 것은 대표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모습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군상의 일부를 포착했다는 뜻. 대표성이나 보편성이 아니라 부분집합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있을 법한 한 그 부분집합이 꽤 설득력 있는 편이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사료에 기반해 사실관계를 전달하려고 하는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플롯에 기반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픽션 네러티브가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영역, 즉 소셜 코멘터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진명 소설에는 늘 대학에 의지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독서하는 재야지성인 캐릭터가 나오듯 거의 대부분 홍상수 영화에는 꿍한 열폭 캐릭터와 별 생각 없이 말을 좀 밉게 하는 캐릭터가 나온다. 배우들에게 상황만 주고 알아서 대사를 만들어 연기하게끔하고 자신은 카메라 화면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한 대화가 가득한 롱테이크와 비디오 캠코더의 줌인줌아웃 사용도 변함없다.


비디오가 없던 조선시대와 있어도 기록매체로서 일부만 사용했던 개화기, 일제시대에 당대 사회상을 기록하 것은 텍스트였다. 그래서 대화와 인물이 있는 문학작품을 토대로 한국문학사를 쓰고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미술사도 미술작품으로 통사를 써서 트렌드의 부침을 일변한다. 영화도 영화사가 있으나 이때 범죄도시나 부산행, 신과함께 같은 과장된 픽션이 우리사회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일부 읽어낼 수 있겠지만 제한적이다. 한편 홍상수 영화는 인간군상, 양질의 대화 같은 소재가 한국예술문학사를 쓰기에 사료로 적합한 소셜 코멘터리다


만약 홍상수 영화의 관객이 하보우만이나 건국전쟁이나 일본애니나 공포나 퀴어처럼 특정 연령, 성별, 지역에 몰려있다면 영화의 소구력에 대해 의심해볼만할텐데 내가 지금까지 그의 영화를 봤던 영화관 건국대 시네마테크,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 명동역 시네라이브러리 등등에서 20대 여성에서 60대 남성까지 다양한 카테고리의 사람들을 보았었다. 물론 이것도 지역은 서울한정이며 내 개인경험에 의존한 것이지만 홍상수 감독이 그리는 캐릭터가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아예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너무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놀랄 수는 있어도.


대부분 롱테이크로 구성된 컷에 로케도 개인 자택(강성희네집?)과 신륵사와 보리밥집 세 개다. 컷은 총 35개로 셌다. 음악은 산정상 벤치에 누워 달보며 담배피우는 32번과 국도에서 프라이드 자동차 퍼져서 보넷 올려둔 35번에만 삽입되어 있다. 권해효가 기타치는 두 컷 제외.


컨테이너 아지트에서 부부가 동화의 부족함을 논하는 26, 28번 컷 사이로 25,27,29번은 동화가 술에서 깨어 화장실 갔다가/나왔다가/컨테이너 지나가는 컷인데 부부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새로운 갈등관계가 만들어질 것을 그렇지 않아서 기승전결의 네러티브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술깸-부부 뒷담-화장실찾아들어감-부부 뒷담-화장실에서나옴 이런 순서로 삽입되었다는 것은 묘한 일이다. 3막 신륵사 앞 준희가 지나가는 16번 장면이 가장 짧은 컷이다.


부르디외의 제자 지젤 샤피로가 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라는 책을 감명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홍상수 감독의 사적생활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고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비슷한 캐릭터에 비슷한 영화를 찍어낸다는 진부함, 호불호가 갈리는 캐릭터, 시큼한 병맛에 더해 감독의 여러 논란까지 합쳐서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릴 것 같다. 좋다 나쁘다를 넘어 내가 조금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영화의 소셜 코멘터리로서 기능에 국한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홍상수의 영화가 이 사회의 보편성을 다룬다고 보지 않고 외려 특수성을 다룬다고 보고 있으며, 캐릭터가 대표성을 지닌다기보다 개별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러하기에 설득력을 지닌 특수성과 개별성이 일반적인 마음을 다루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마음의 순간들은, 특히 독일 같이 그에게 각본상, 감독상, 심사위원대상 등을 준 외국에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한국학과와 영화과가 설치된 대학에서 그의 작품을 토대로 한국을 들여다보려고할 것이다. 그정도로 대화나 상황은 정말 있을 법한, 베리시밀리튜드(verisimilitude, 핍진성)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말 편하게 놓으세요 그럴까? 하는 장면에서

프랑스관객은 vous→tu로 변환하는 tutoyer의 모먼트를 볼 것이다. 독일관객은 Sie→du로. 유럽사회의 존칭 전환은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고 자신을 기준으로 친하냐 안 친하냐의 심리적 거리가 기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일단 위치, 나이, 계급이 기준이 되기도 하거니와 상호 친근함이 아니라 위가 아래를 향해 말 편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 On se tutoie, non ?

독: Wir duzen uns, oder?

같은 번역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둘 다 우리 "서로" 말 놓을래? 이지 "나보다 나이 많은 아버님'만' 저에게 말 편하게 하세요 저는 계속 존칭쓸게요"라는 말이 문화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준희가 아빠한테 쓰는 어투와 표현의 다름, 아내가 남편과 딸남친에게 쓰는 어투와 표현의 다름, 남편이 딸과 아내에게 쓰는 어투와 표현의 다름, 술문화, 제사문화, 기와불사 같은 것도 모두 공부대상이다. '그럴 것 같습니다' 라는 요즘의 말투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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