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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연인들 ㅣ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평점 :
(명사로서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소멸되지만,
(동사로서의 '사랑하는') 사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하다.
사랑의 사건이 '함께 있음'의 '행위'라면,
장소는 '함께 있음'이라는 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졌음을 '증거'한다.
'공간'이 연인들이 '장소'가 된다는것은 사랑이라는 '사건'의 개입 때문이다.
연인들의 장소는 '임의적'으로 탄생하기에,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고 할 수 있다.
연인들의 장소는 사회적 몫을 갖지 않는 세상의 바깥이다.
연인들은 사랑의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를 독창적이고 정체가 불분명한곳, 촉각적인 에로스의 자리로 만든다.
'연인'이라는 이름의 이 '최소 공동체'는 '함께 있음' 자체가 '목적'이고 사회가 승인하는 수준의 '열정'을 관리하며, 사회가 인준하는 장소에 머문다.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장소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가족'에게만 허락되어 있기에,
그러나 사랑의 '사건'은 아무리 강렬해도 '일회적'이며 되돌릴 수 없으며, 너와 나를 '우리'라는 감각으로 묶어서 함께 어울어지던 '감정'은 '소멸'하고 만다. 감정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 역시 아무리 강렬하였다 한들 '지속성'을 담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함께 했음의 '증거'가 되어 남아 있다.
즉 '사랑하다'와 '장소하다'는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연인들에게 장소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여기서 재미있는건, 이 '장소'의 개념이 확장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이 아니라 축소적이고 개별적인 '방'이라는 좁은 개념으로 보고 있는 점이다.
연인들이 머무는 장소의 기본 단위는 집이 아니라 방이다.
방은 현재적인 체류의 지점이지만 카페나 숙소처럼 소유한 곳은 아니다.
연인들은 이 방에 머물때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그 방에서 잠시 바깥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방은 외부의 소음에 노출된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들 그들이 함께한 '방(공간)'이 없었다면
겪은 시간들은 추상성 속에서 떠돌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방'은 소유의 장소가 아닌 '임시적 선물'로
'지속성'과 '영원성'을 보장해 주진 못한다.
어떤 장소에 머물렀던 그것은 임시적이다.
우리들의 역사는,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실존'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추억을 쌓고 기억을 되내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곳에서 어떤 추억을 쌓았던간에 '시간의 흐름' 앞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연인들이 함께 보낸 '시간'과 '기억'은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들 '만'의 약속도, 고백도, 다짐들도 돌이켜 볼때마다 똑같이 상영되고 재연되는 '필름'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의 머물렀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한다는 것은 전부 끊임없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아름다웠다'고 말하지만 '암기할 수 없는 문장'처럼 잊히는 '파괴된 잔해'들과 같다. 이런 기억의 '망각'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붙잡고 끊임없이 '의심'과 '상상력' 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장소의 멜랑콜리'라고 한다.
연인들은 흘러가야만 하는 '실존' 앞에서 잠시 '유예'를 선언하며 시간을 붙잡기 위해 그들만이 숨어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다니며 계속해서 장소를 '발명'한다.
소유의 장소가 아닌 임시적인 그 장소에서, 내적이며 우주적인 장소로 만들 그 곳을 계속해서 '발명'하고 '재발명'하며 고군분투한다.
이 소유할 수 없는 장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물질성'과 '사실성'을 비켜간다. 장소는 명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동사'이기에 늘 다른 공간으로 변환 될 수 있다. 권력과 통치도, 대립과 위계도, 공적이고 사적인 곳이나 고급스럽냐 저급스럽냐 하는 장소의 '위치'와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우산'은 매력적인 사물이다. 우산이 펼쳐지는 순간 두사람의 최소 공간이 만들어 지면서 순식간에 내밀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공원에 있는 '벤치'는 연인들을 손가락에 닿는 최단 거리에서 '옆'으로 나란히 앉게 만든다. 거리의 복잡함과 소음은 제거되고 가볍고 부드러운 침묵의 공간으로 만든다.
'카페'는 연인들의 둘만의 공간에 무대가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소란스러운 공간도 둘이 앉은 공간만큼은 다른 조명을 비추는 방이 된다. 책상을 두고 얼마만큼 가까이 앉아있느냐에 따라서도 둘 사이의 거리를 말해줄 수 있다.
갈곳이 마땅치 않은 연인들은 공원의 '계단'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때 계단은 오르내리는 장소가 아니라 쉼터이고 작은 방이 된다. 복층 구조의 펜션에 있는 계단은 침대에 오르기 위한 은밀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침대'는 그 자체로 방이 된다. 탄생과 죽음을 맞이하는 이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체류지가 된다. 때때로 영원에 닿을 수 없는 하룻밤의 공기가 잠시 머물다 우회하는 뗏목이 되기도 한다.
'욕조'는 연인들이 몸을 담는 순간 이륙하는 우주선이 된다.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우주선이자, 어디로든 유영할 수 있는 좁고 따뜻한 바다가 되어 연인들을 안내한다.
'창문'과 '테라스'가 있는 방은 우리를 외부와 내부로부터 단절시키기도 하지만 연결시키기도 한다. 외부로 부터 보호되고 있다는 안도감과 친밀감,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안밖을 가르며 그 속에 연인들의 사건을 일으킨다.
'자동차'는 움직일 때와 움직이지 않을 때 전혀 다른 공간을 연출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 정차한다면 자동차는 기계가 아니라 방이 되기를 바란다. 이 지붕이 있는 완벽한 주차장이 연인들의 성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리' 위에서 우리는 이 다를 끝까지 함께 걸어 갈 수 있을 것인지 없을지를 예감하게 된다.
'기차역'과 '공항'은 연인들에게 아주 먼 곳에 데려다 줄 수 있다는 희망을 약속한다. 지역과 국경을 옮겨다니는 이곳에서의 시간성은 가독성이 없다. 하나의 장소에 무수한 시간의 주름을 품고 있다.
'낮'의 햇빛과 '밤'의 불빛은 공간에 다른 느낌을 준다.
'극장'의 스크린과 무대는 삶 너머를 비춘다. 공터, 광장, 산, 바다 그리고 그 어떤 곳들 모두 연인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연인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함께하자는 약속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어떤 것을 하자' '무엇을 먹자' '어디에 가자' 여기에는 모두 '둘'이여야 한다는 것과 '장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과거형'도 있고 '진행형'도 있고 '미래형'도 있어서, 장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여 의미를 갖게된다.
장소에 대해 이야기 할때, '우리가 ~했던 곳'이라며 지난 시간에 머물러 있을수도 있고, '우리가 ~했었고, ~했었고, ~해왔던 곳'으로 계속해서 덧씌워 질 수도 있고 '우리가~하려 했지만 하지 못한 곳'도 포함된다.
따라서 장소를 '발명'해서 찾는 것도 일종의 연인들의 '여행'이고,
그곳에 대한 '추억'을 더듬거리며 기억을 더듬거리는 것도 하나의 추억 '여행'이다.
장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지나간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도 우리의 실존적 시간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여행'인 것이다. '증거'로 남아 있는 장소에 대해 '상상력'을 가미하여 기억하는 것을 '여행에 대한 여행'으로 볼 수 있다.
더듬더듬 되짚어 보며 그 순간 놓쳤던 순간적인 연인의 표정을 다시 기억하고, 그땐 보이지 않았던 장소의 세부가 뒤늦게 떠오르기도 한다.
시간의 '바깥'에 있으면서 시간이 '부식'되지 않도록 담아두는 것이 '장소'이다.
장소는 '지금' 없음이자 '아직' 없음이며 본질적으로 '가질 수 없음'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설명하자면, '홀로'였던 우리가 '연속성'을 경험했지만 영원에 닿을 수 없는 공기가 잠시 머물렀다 우회하는 곳, 그 환각들이 생에서 계속 반복되게 하는 곳, 독창적이고 정체가 불분명한 곳, 촉각적인 에로스의 자리.
이것은 그러한 장소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