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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 진경산수를 개척한 우리나라 화성 ㅣ 새로 쓰는 화인열전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6년 2월
평점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 로 우리 국토의 명작과 명소를 알리며 한국 문화사의 기념비적 답사기를 남긴 유홍준 작가가, 조선시대 회화사를 연구한 『화인열전』(2001) 을 수정, 증보하면서 개정판으로 우리나라 진경산수를 개척한 『겸재 정선』을 출간하였다.

책의 목차는 총 6부로 겸재의 출생부터 84세의 나이가 될 때까지의 생애를 나누어서 소개하고 있다. 겸재는 비교적 장수했을 뿐만이라 엄청난 양의 다작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성품 탓인지 아니면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인지 문인의 주문이나 일반주문을 거쳐 상인들 손에 오갈정도로 주위에서 그림을 요구했을 때 거의 거부하지 않고 그려주었기에 엄청난 양의 그림으로 역대 조선화가 중 김홍도와 함께 가장 많은 유작을 남기게 되었다. 관직 생활을 했던 지역(하양과 청하의 현감, 양천현령을 지내며 영남 충청도 4군, 관동 8경등 산천을 두루 경험)의 사계절 풍경 및 관직 생활 후 서울로 돌아와 서울의 명소와 인곡정사에서 마음편히 지내던 시절의 그림, 금강산 여행을 남긴 화첩, 만년의 생활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 등 그 주제도 다양하다.
책의 서문에 적힌 집필 의도에 따르면, 인문학의 실천으로서의 미술사이자, 미술사가로서의 의무로 우리나라 화인들에 대한 인간적, 예술적 노력을 이해하고 우리의 옛 그림들을 온국민이 사랑하고 자랑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책은 겸재의 태생, 스승과 벗 등 교류한 인간관계, 관직생활과 은퇴생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던 '화인' 생활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였다.
" '화가'라는 말 대신 '화인'이라고 한 것은 '시인', '문인'처럼
사람인(人)자를 붙이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화인 열전의 첫번째 화인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이 스스로를 부르는 호(號)로로 정한 '겸재'는, '겸손할 겸(謙) + 재계할 재(齋)'의 한자어로 '겸손하면 형통하나니 군자는 유종의 미가 있다'는 주역의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겸재는 세가지 길 앞에 놓여있었다.
전통화의 길인 관념산수(대표 화원 안견), 신사조의 길인 실경산수(대표화원 이녕), 그리고 개성을 살리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
고려시대부터 불화의 배경으로서 존재하던 산수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곽파 화풍과, 남송대의 남송원체 화풍, 미법산수화풍 등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여 이를 한국적 화풍으로 발전해왔지만, 조선 초기의 안견까지만 해도 관념산수의 영역 안에 존재한 산수였다. 그러나 정선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린 회화의 대가가 아니라 조선 곳곳을 유람하고 조선만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아 그 진경을 그리고자 화법과 필법을 점차 조선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며 '조선적인 산수화풍'을 완성한 선구적인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보통 화가의 생에는 그의 예술세계를 설명할때는 초년, 중년, 노년, 말련작으로 나뉘어 각 대표작을 살펴 보기 마련인데, '조선적인 산수화풍'을 완성을 기준을 적용하면 겸재의 생애와 대표작은 여느화가와는 다르게 구분된다.

겸재의 생애 최고의 역작으로는 그의 진경산수를 대표하는 국보<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최후의 명작 <박연폭포>가 있다. 그의 대표적으로 꼽히는 이 작품들은 모두 60,70대의 노년기의 작품으로 겸제 예술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생에와 대표 작품은 조금 다르게 나뉘어 설명할 수 있다.
-모색기(60세 이전) : 진경산수 개척시기
-확립기(60대) : 진경산수 완성시기
-원숙기(70대) : 필법의 자유자재 구사시기
겸재는 문짝이나 부채 등의 다양한 소재에 그림을 그렸을 뿐만아니라, 자연의 서정성과 옛성현의 고사를 토대로 그린 관념산수 <고사 관폭도><설평기려도><어초문답도>나, 꽃과 풀의 이상의 서정일지인 <화훼화>, 자신이 근무하는 관아를 그린 <양천현아도>,자신의 여유있는 삶의 모습을 담은 <여가도>, 가까운 친구와 시와 그림을 맞추어 노는 <시화환상간도>, 유명한 시의 이미지를 그린 시의도, 중국의 정형화된 남종산수화는 물론 조선 팔도의 지역 절경을 담은 화첩과 명승첩, 한강유람도, 인왕산과 백악산 골짜기, 도산서원, 박연폭포, 금강산 등 전국의 명소를 과감한 구도로 재구성하고 원숙하고 개성적인 필치로 많은 명작을 남겼다. 그림 뿐만 아니라 주역도 가르쳤으며 그와 관련 <도설경해>를 저술하기도 했고 그가 스승인 삼연 김창흡에게 그림을 배웠던것처럼 겸재의 제일가는 그림 제자로는 현재 심상정을 남기기도 했다.

겸재는 70대에 들어와서 다시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겸재는 몇 번의 금강산 여행 경험이 있었고 나이가 들어가며 원숙미가 더해져 그림체가 달라진다.
풍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시 실경을 여실히 엿볼수 있게 하던 시기를 지나, 풍광의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하고 스스럼 없는 붓질로 주요 이미지만 보여주면서 노년으로 갈 수록 사실(寫實)보다 사의(寫意)로 나아가고 있는 진경산수의 화풍을 구사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경설색에서 나아가 회화적 재구성이 가미된 진경산수의 화풍은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 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초상화론인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뜻을 담아 그의 화첩은 <'사생'첩>이 아니라 <'전신'첩>이라 하였다. 전신 수법으로 그런다는 건, 산과 바다(해악)풍경을 실경을 바탕으로 하지만 때로는 단순화시키고, 때로는 과장하고, 나아가서는 왜곡시키면서 그 풍광에서 받은 감동을 전한다. 이는 이형사신(형상에 가초하며 정신을 그린다)는 사조에도 맞닿아있다. 때문의 그의 그림이 실경산수가 아닌 진경산수가 된 것이다.
겸재는 1759년 3월 34일 인곡정사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겸재의 묘소는 <광주정씨세보>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면 경기도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이라고 추정된다. 묘소 둘레에 그가 노년기 자주그렸던 노송들처럼 소나무와 나래가루가 많았고 북한산과 도봉산을 배경으로 한 양지바른 언덕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겸재의 묘소를 찾았던 유홍준은 이미 그 자리가 연립주택으로 가득 들어서 있어 정선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을 보고 허망하고 민망한 마음이 일었다고 한다. 작품 조차 개인 소장품과 여러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것도 안타까운데 국보 2건, 보물 7건을 비롯한 대작들을 남긴 화인의 기리는 비석조차 하나 없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결말이다. 그리하여 만약 유홍준 작가에게 비석의 비문을 쓰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이렇게 쓰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