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서 배워라 -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
해나 개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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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업 코미디언 스타 해나 개즈비만의 농담이 담긴 에세이 『차이에서 배워라』가 출간되었다.

1997년까지 호주의 태즈메이니아에서는 동성애가 범죄였다. 그런 '태즈메이니아 출신의 뚱뚱하고 뭘 해도 어색한 레즈비언' 인 그녀는 한때 ‘자기비하 유머’를 구사하는 코미디언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을 서슴없이 웃음거리로 삼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그러한 기존의 코미디 문법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렇게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게된 스탠드 업 코미디 쇼가 바로 「Nanette」(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이다.


이제 해로운 농담은 끝내야 한다.

그런 코미디는 하지 않겠습니다.

스텐드업 코미디 쇼, 나네트 中


스스로 '코미디 역사상 가장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웃기지 않는 한시간 짜리 무대'이자 '스탠드업 카타르시스', '트라우마 변환 실험' 이라고 평가한 이 무대는, 미투운동이 한창이던 시대 한가운데에 투척되었다. 가부장제를 비웃는 장광설을 시작으로 이 속에는 복잡한 모녀관계, 커밍아웃, 트라우마, 우울증, 성인 ADHD와 자폐 진단, 자기혐오, 그루밍 성폭행, 술과 마약 중독, 젠더퀴어라는 성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차이를 포용하지 못하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신랄한 코미디를 선보인다. 또한 창작자로서의 작품 창작 과정 등에 대한 경험을 섬세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경험과 상처들을 과감없이 드러내며 이를 농담으로 승화시키기에 우리는 그녀의 노련한 입담에 웃음, 분노, 성찰, 용기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 제 생각에 저의 문제는, 코미디때문에 아직도 청년기에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이 매번 농담이죠.

농담과 달리 이야기에는 3가지가 필요해요. 서론,본론,결론.

농담에는 2가지만 필요하죠. (배경과 펀치라인이 들어간) 서론, 본론이요.

저는 커밍아웃에 대한 코미디쇼를 진행하면서,

가장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성장의 시기를 상처로 남기고 농담으로 매듭짓고 말았어요.

그 이야기가 원동력이 되어 명성이 쌓였지만 결국 그건 농담으로만 남았고, 그 농담은 제 기억을 희석했죠. 제가 현실에서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데에는 역부족이었답니다.

펀치라인엔 상처가 필요해요.

펀치라인엔 긴장이 필요하고, 긴장은 상처로부터 나오거든요.

저는 동성애가 범죄로 치부되는 도시에서 자라면서, 저 자신까지 혐오하게 되고 말았죠.

뼛속까지 혐오했어요. 자존감은 외부로부터 오는데 한번 심어주면 울창한 숲이됩니다.

아이는 중력처럼 자기 혐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죠.

그렇게 수치심에 숨어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벽장 안에 숨어있었습니다.

숨는다는건 눈만 가릴뿐 수치심을 막지 못해요.

하지만 저는 제 이야기를 '제대로' '온전히' 전달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무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걸 저는 큰 대가를 치르고 배웠거든요. "


'나의 커밍아웃을 가지고 코미디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성장기의 아픈 경험을 상처로 남기고 농담으로 매듭지어버렸습니다. 내 이야기가 소재가 되어 반복되다 보니 내 실제 기억을 흐려버렸어요.' 라는 그녀의 말 속에서 자신의 소수자성을 농담거리 소재로 삼으며 코미디를 이어온 그런류의 농담이 결국에는 자기 존재를 해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상처와 수치심을 진정성 있게 털어놓으며 진정성 있는 새로운 코미디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새로운 농담을 발명했다.


해나 개즈비는 2006년 호주 '맬버른 국제 코미디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으며 10년 넘게 영국과 호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스타였다. 「Nanette(2018)」로 코미디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평을 듣던 그녀는 그해 에미상 버라이어티 스페션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다른 나라에도 유명해 질 수 있었는데, 미국의 어느 토크쇼에서 '하루 아침에 유명해지니 어떤 기분이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미국의 무례함이 아니라, 뭔가 아시아인, 흑인, 성소수자, 여성, 흑인등에 대해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사전 조사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는 일종의 '주류 문화'의 거만한 시선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은 해나 개즈비의 비 전형적(atypical)인 두뇌가 들려주는 독특한 방식의 이야기 이다. 엉뚱하고 신선해서 도무지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결말은 어떻게 마무리 지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입담'이 담겨있다.

일본에는 '만담'이, 미국과 영국에는 '스텐드업 코미디' 라 장르가 우리나라에게는 사실 크게 익숙하지는 않다. '토크쇼' 정도로 생각하면 될런지도 모르겠다. 이번 책을 계기로 나네트를 챙겨보았는데, 뮤지컬이나 콘서트가 아닌 단 한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서서 한시간 동안 '말'만 하는 것을 보기위해(오락 도구가 오직 '언어'뿐) 그 비싼 티켓팅을 하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가득 매울정도로 사람들이 모이는 '스텐드업 코미디'가 우리 문화에 잘 정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마디 한마디 할때마다 꺄르르르 웃어주는 청중들의 모습도 신기했다. 처음엔 영어권의 농담과는 개그코드가 잘 맞는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몰라했지만, 중반부쯤부터는 그녀의 몇가지 말에 '오 좋은 말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마지막엔 '스탠드 업 코미디란 이런거구나' 라며 적응 하게 되었다.

미술사학을 전공했던 그녀가 '남성들이 부흥시켰던 예술'로 인해 미술관에 발가벗고 있는 여자들에 대한 불편한 심리와 그속에도 레즈비언은 없었겠지 하는 생각, 고흐의 약물 복용과 예술의 상관성이라던가 피카소의 큐비즘과는 별개로 여성 편력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때는 매우 흥미롭기도 했다.


"(미투시대 이후) 지금이 격변의 시기라는거 압니다. 처음으로 주류에서 벗어났으니 당황했겠죠. (남성) 여러분도 이제 새로운 롤모델을 찾아야 될겁니다.

제가 인간대 인간으로 드리고 싶은 조언은, 방어적인 자세를 버리라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유머를 배우라는거죠.

웃음은 사람에게 좋은게 사실이에요. 긴장이 완화되죠. 웃음은 전염성이 짙어요.

사람들 많은곳에서 함께 웃으면 긴장의 완화력도 더 커지죠.

다른 사람들게 함께 웃는겉이 혼자 웃는것 보다 낫기도 하고요.

긴장은 인간을 고립시키고, 웃음은 소통의 장이 되어줍니다."

그녀는 웃음으로 소통하는 '웃음의 힘'을 믿으며 어떤 존재도 소외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양성의 가치와 다름을 존중받을 권리에 대해 논하며 자신만의 웃음 코드로 쉬온 농담 뒤에 존재하는 진실을 표현하려 했다. 그녀의 진솔함과 솔직함을 갖춘 이야기의 힘 덕분에 성소수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은 물론, 인생에서 실패를 겪어보거나 세상과의 불화로 자기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녀의 이야기에 웃고, 분노하고, 공감하며 대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속에는 어쩌다 이 모양으로 태어나 이해할 수 없는 사회에 내던져져

감당하기 벅찬 생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연약한 인간이 있다.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죽지 않고 버텨가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제보다 나아지려 몸부림 치는 사람.

이걸 생존본능이라 해야 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살고 있는것 같다.

해나 개즈비, 『차이에서 배워라』 서문 해나 개츠비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인 이유 中


우리가 타인의 삶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이나 영화 등의 창작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이유는 내가 겪은 생을 기준으로 비슷한 삶의 모습에 '공감'하거나, '홀로 있지 않음'에 안심하며 '연대'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한 인간을 깊이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은 여전히 가장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깊이 있게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외롭게 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매일 우울과 자책 속에서도 눈을 뜨며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하고, 사랑을 주고 받기 위해 노력하고, 아파하고, 치료하고, 그러다가도 가끔은 세상이 잠깐씩 환해져 행복해지기도 하고, 제자리걸음인것 같다가도, 어느순간 돌아보면 멀리 걸어온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렇게 삶의 모양은 제각각이여도 문득 드는 삶에 대한 생각은 비슷하다. 그럼에도 우린 '솔직'하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는 여전히 어려움을 느낀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과 생각들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될 때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되는것 같다. 유머와 분노의 그 어딘가 쯤에 존재하는 이 '블랙 코미디'에서 우리는 수치심을 성찰로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게 된다.


해나 개즈비는 '솔직함'이 가지고 올 역효과를 반복적으로 우려하고 있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너의 이야기가 결국 아니며 공감을 가져올 순 있지만 모든 트라우마들이 하나로 연결될 수는 없다고.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해 나간다.

이 책은 크게 두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코미디언이 되기 전의 초년 인생과 코미디 업계로 진출하기로 한 이후의 이야기다. 크게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성장기, 방랑과 자기비하의 세월, 신경다양인으로의 진단과 수치심에 대한 받아들임, 새로운 농담을 발명하며 젠더 퀴어 자폐인의 코미디를 만들어 내기, 나네트:나의 이야기의 완성까지의 이야기 단계를 밟는다.


예술가는 시대 정신을 창조하지 않습니다.

시대 정신에 응답하죠.

스텐드업 코미디 쇼, 나네트 中


그리고 그 시대정신에 응하는 예술가에는 '블랙 코미디'를 선사하는 코미디언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자랄 때 우리집 모든 여자는 '바늘'을 사용했다.

나는 그 '바늘'에 매혹되곤 했다.

바늘은 '마법'을 만들어냈다.

바늘은 구멍이나 찢어진 곳을 '수선'할 때 사용했다.

잘못을 '용서'하겠다는 뜻 같았다.

그리고 절대 공격적이지 않다.

'바늘'이지 '핀'이 아니니까.

루이즈 부르주아


말은 '바늘'같아서 '핀'처럼 사용하면 상대를 찔러 아프고 공격적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실을 꿰어 서로에게 이어주며 벌어진 상처를 '수선'하여 치유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유머' 한 꼬집이 더해지면, 우리는 웃으며 인생을 말할 수있을것이다. '그때'의 그 무엇이 '지금'의 그 무엇이 되었는지를.


차이에서 배워라를 읽으며 깊은 분노를 일으킬 만큼 웃긴 안티 코미디 를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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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에게 솔직하지 못할까
일자 샌드 지음, 곽재은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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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센서티브>, <서툰감정>을 집필한 심리상담사 일자샌드의 <컴 클로저>의 개정판으로 관계가 어렵고 자기 자신을 다루는 법도 잘 모르는 서툰 어른들에게 자신을 제대로 돌보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일부러 실수하기도 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위해, 삶을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피하기위해, 자기안의 생각과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하는 이런 행동을 우리는 오랫동안 여러이름으로 불러왔다. 방어기제(프로이트), 대처기술(인지치료사), 자기보호전략(심리학자) 등.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슬픔에서 우리를 구제할 좋은 수단이기도 하지만 결국 구체적 현실로 부터 다르게 인지하여 삶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하여 실제보다 더 좋거나 나쁘게 보게할 뿐이다. 성숙한 자기보호를 위해선 자기 스스로 어떤 감옷을 두르며 살았는지 알고, 지속과 중단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는것이 중요하다. 삶의 깊이감, 풍성함, 유대감, 기쁨 등을 온전히 누려 충실하게 삶에 임하고 더 큰 인생의 선물들을 받아갈수있도록 고민해볼 필요가있다.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첫째, 그동안 내가 어떤 자기보호 전략을 쓰고있었는지 점검해 볼 것.
둘째, 무엇이 잘못된 행동이었는지 알고 중단, 해방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것.
셋째, 성숙한 자기보호의 방법으로 감정과 관계를 회복하고 균형점을 찾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 이다.

진정한 내적 자아를 인식하지 못한채 습관적으로 자기보호만 하게되면, 스스로 보호해서 덜 다치긴 한 것 같은데 꼬리를 무는듯 비슷한 경험이 계속펼쳐지면서 주변 상황에 끌려다니고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들에 알수없는 불쾌한 감정들이 계속해서 쌓이기만 할것이다. 해결되지 못하고 회피했던 감정들은 의식아래에 남아 눈치채진 못하지만 계속 짊어지고 가기 때문이다. 경우에따라 그 짐은 계속 커지며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는다.

미성숙한 자기보호전략으로 동일한 패턴에 갇히는 대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자기보호전략을 써왔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하거나, 지속하거나, 포기할줄 알아야한다.

나 자신을 포용하여 나 자신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신과, 세상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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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저자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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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기도 한 이길보라 작가 역시 '코다'이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아이로서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와 관련된 '영화'와 '도서'를 많이 접했을 뿐만아니라 자신 역시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에 있다. 간결하지만 강렬한 작가 소개글부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소개글만으로도 작가가 어떤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부모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부모는 나에게 수어를 가르쳤고, 나는 눈을 마주치며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장애'가 된 건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딸인 '코다'로 살고싶다.

이것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편찬된 역사가 아닌 '장애의 역사'이자,

'나의 역사'이다.

이길보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中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가르쳐준 가족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한 사랑하는 '내 사람'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외부 사람들'에 의해 우리 가족은 '장애인 가족'이 되었다. '눈을 마주치며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가족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될때 세상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편찬되고 있는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 초반의 이 부분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내가 가족의 품에서 '안전'하게 자라다가, 세상이란 위험한 곳으로 한발걸음 걸었더니 세상은 내 가족을 '불완전'하게 바라 보았다. 그나마 자녀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보라네 어머니'라는 학부모의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다시 학생이 아니게 되었을때, 그러니까 자녀가 사는 공동체 세계가 '사회'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었을때 내 부모는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고졸, (호떡,와플,풀빵 등을 파는) 자영업자, 청각장애인.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는 말들 사이에서 이것이 그들의 '이력'이자 '특이사항'이 되었다.


뒤늦게 엄마의 생을 가늠해 본다.

농인이자, 여성이자, 비장애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온 삶을.

나는 아직도 모르는게 많다.


그리고 농인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신이 삶을 반추해본다. 그렇게 '장애의 역사가 곧 나의 역사이다.' 라고 당당히 말하며 비장애인 중심으로 편찬된 역사가 아닌 '장애의 역사' 그대로가 필요하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인상깊게 본 부분들은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통념의 프레임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장애인은 불쌍해', '장애인들은 다 똑같은 장애인들아닌가' 라던가

'장애인들은 (우리의 도움을 받는 존재들이니 다) 착할거야'라는 것들이다.


모두의 인생이 그렇듯 기쁘고 가슴 벅찰때도 있고,

화가나고 속상할 때도 있다.

대게 후자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그럴줄 알았다'고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찬다.

자신의 삶의 '서사'를 구축하는 소유권과 주체성을 꺾어버린 채

나와 부모님을 그저 '불쌍한 사람'으로 '대상화' 한다.

장애인의 고통과 상실에만 집중할 때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영화 감독이기도 한 작가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인터뷰 질문이 있다.

"농인의 자녀로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라는 이 말은 작가가 지겹도록 들어왔던 질문이다. 질문이 내뱉어 지는 순간 세상이 그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들 멋대로 동정과 연민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그래서 작가는 장애인들에게 자신의 '원치 않는 순간들'과 '고통들'에 대해 스스로 말할 권리를 쥐고 있다기 보다,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의 고통과 상실에만 주목하려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다.

이렇듯 에이블리즘(Ableism, 장애 차별주의, 비장애중심주의)과 오디즘(Audism, 청인 우월주의로 농인에게 청인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이 만연한 사회에서 포용되기보다 차별받고 거절당한 경험이 더 많았던 작가지만, 이런 질문에는 부모님이 농인이라서 불편한점보다 자신이 코다여서 좋았던 점을 강조해서 대답하는 쪽을 택한다.


누군가를 '대상화' 하여 항상 밝고 아름다울거라고 생각하는건 위험해요.

실제로 농인이 농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와 사기행위도 많아요.

착한 장애인만 존재해야 한다는 그런 통념은 또 하나의 선입견 아닐까요?


우리는 '장애인들'이는 한 범주를 대상화시킨 후 그들의 세계나 성격, 태도들에 대해 '이럴 것이다'라는 수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사건 사고에서는 '약자'인 장애인에게 성적, 금전적으로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사이의 범죄나 그들이 주가 된 사건들도 더러 있어왔다. '대상화' 시킨 그들에 대한 전형적인 편견이기도 어찌보면 '너네는 약자니까, 우리가 도와주면 고마워하기만 하고 그냥 착하고 얌전하게 있어'라는 더 폭력적인 시선이 그 안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같은 농인이라도 인종, 잔존청력, 수어 습득 시기 등에 따라 '엘리트'와 아닌자 들로 '계급'이 나뉘기도 하고 그들 사이에서 조차도 경쟁과 차별이 있어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할 것이다. 우리가 '장애인들'이라는 단어와 '그들'이라는 대상화로 개개인의 개별성과 각기다른 정체성들을 너무 쉽게 외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계급차이도 그러하지만, 생각의 차이는 더욱 심하다.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타인의 경험과 감각을 상상하며 말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나의 위치가 아닌 너의 위치에서 듣고 있는지,

어떠헥 하면 다르게 생각하고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작가는 '장애인의 날'에만 두각을 받는 것이 싫어 차라리 이럴거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달라고 생각했다. 이후 사회의 인식이 바뀌어 이날이 동정의 날이 아닌 장애인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알리고 공감대를 확장하는 의미로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부르자고 투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그 뒤로 한참 후의 일이었다.


작가가 '장애인의 날'이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바뀌는 과정을 주목한것 만큼 관심을 보였던 또 다른 주제는 '지하철 장애인 시위'에 대한 생각이었다. 작가는 <썰전>프로에서 팽팽하게 나누었던 담론을 거론하였다. 청인인 장애인 차별철폐 대표가 나와서 하는 담론이였기에 '수어'나 '자막'통역 하나 없었던 방송, 그리고 '말'만 오갔던 '방송 프로그램'의 특성. 2001년 장애인 이동권 연대의 투쟁에서 20년이 지난 2022년 전장연의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이르기까지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해보도록 했다.

이 투쟁이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이라는 외침과 함께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 권리와 이를 위한 권리 예산 확보를 주장하고 있다는 부분에 주목한다. '탈시설권리'란 시설에서 나와야 지역사회에서 '이동'받고 '교육'받고 '노동'할 수 있다는 모든 권리의 바탕이 되는 개념이다.


환경이 바뀌면 관계망이 변하고 활동범위가 달라지고 삶이 변한다.

'향유의 집' 사무국장 강민정


이런 말들을 보면, '이동권'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 투쟁의 과정에서 얼마나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지도 돌아보게 만든다.


이 책에는 수많은 '다름', 그러니까 장애와 질병을 겪는 사람들, 재일조선인, 다문화가정, 미등록 이주 아동, 불법체류자와 난민,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기후위기 활동가 등 수많은 '소수자'의 삶을 다룬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 '다름'을 마주하는 자세를 정확하게 짚어준다. 손쉬운 연민, 구분, 단순하고 납작한 공감, 그뒤에 따라오는 편견, 차별, 거절까지.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장애를 경험하는데서 비롯되는 가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고통이 가져다 주는 가치나아가야 할 확장적 가치관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넓어진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한 이해와 납작하게 눌린 공감이라는 착각을 넘어설때 비로소 더 넓고 깊은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공감과 이해가 전부가 아니라,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하며 그러한 경험에 우리가 어떻게 연대하고 연결될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권리를 찾는 과정은 자신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회는 동등한 출발점을 만들 준비가 되어있는가. 우리는 어떤 몸과 언어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세상을 바라보는가. 당신과 나의 고통은 보다 적극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거기서부터 다시 쓸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질문과 그에 따른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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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 분단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김성경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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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냉전 이후 북조선은 경제적,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개발'에 매달리게 되었고 남한은 이에 대응하기위해 미국과 안보동맹 강화 및 군사력 확장에 나서면서 '안보' 앞에서 대결과 적대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왔다. 핵실험과 잦은 미사일 발사로 남한의 '안보'가 위협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남한사회에서 북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감각은 증폭되어 갔으며,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었으며, 경제주의적 사고가 사회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경제적 실효성과 실익에 대해 따지는 통일 회의론까지 고개를 들며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평화와 통일에 대한 관점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작가 김성경은 군인인 아버지로 인해 군부대 안에서 자라오면서 누구보다 군대, 안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고, 결국 북한 사회문화와 이주민, 여성, 청년 등을 주로 연구 주제로 다루는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자리매김 하였다.  

작가는 150명을 훌쩍 넘기는 북조선 여성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한반도를 옥죄고 있는 분단의 현실이 책에서 배운것보다 훨씬 더 일상과 의식을 장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녀들을 만나면서 분단 반대편의 존재가 아닌 '사람'으로 인터뷰가 가능하기까지 시간이 걸렸기에 그녀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산문, 편지, 소설과 영화의 재구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하면서 가장 그녀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할 수 있었다. 

식민과 전쟁, 분단, 냉전과 탈냉전, 지역화와 세계화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중첩되어 있는지, 이 역사적 소용돌이속에서 '남겨진 사람들도 뭐든 해야했다, 살아야지 어쩌겠는가'라는 선택이 아닌 필연적인 억척스러움과 절실함을 보여준다. 때문에 전쟁과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극복하는 여성들의 행동적 실천은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분단 체제 앞에서의 한국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기도 하고, 남북 공통으로 적용되는 가부장제의 민낯을 보여주기도 하며 노동자로 내몰린 여성들의 고된 경험과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억압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자신의 존엄도 지키려 노력했던 여성들의 삶은 기적과도 다름 없었다. 

남한 사회는 북조선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다. 식민과 분단 구조에서 가장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북조선 여성, 조선족 여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손쉽게 떠올리는 북조선 여성들의 이미지나 서사와는 사뭇 다르며, 북한에서 선전하고자 했던 모습과도 거리가 있다. 가장 낮은 서열에서 자매애와 가족애를 실천하는 여성들의 행위주체성은 전복과 해방의 실마리를 안겨준다. 전쟁, 냉전, 분단 체제 속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의 역사는 현재를 규정짓고 미래로 전수될 것이기에 우리의 이해가 더 필요하며  우리 사회가 함께 숙고해야할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북조선과 마찬가지로 분단에서 자유롭지 못한 남한사회를 한번쯤 되짚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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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연인들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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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로서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소멸되지만,

(동사로서의 '사랑하는') 사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하다.

사랑의 사건이 '함께 있음'의 '행위'라면,

장소는 '함께 있음'이라는 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졌음을 '증거'한다.

'공간'이 연인들이 '장소'가 된다는것은 사랑이라는 '사건'의 개입 때문이다.

연인들의 장소는 '임의적'으로 탄생하기에,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고 할 수 있다.

연인들의 장소는 사회적 몫을 갖지 않는 세상의 바깥이다.

연인들은 사랑의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를 독창적이고 정체가 불분명한곳, 촉각적인 에로스의 자리로 만든다.


'연인'이라는 이름의 이 '최소 공동체'는 '함께 있음' 자체가 '목적'이고 사회가 승인하는 수준의 '열정'을 관리하며, 사회가 인준하는 장소에 머문다.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장소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가족'에게만 허락되어 있기에,

그러나 사랑의 '사건'은 아무리 강렬해도 '일회적'이며 되돌릴 수 없으며, 너와 나를 '우리'라는 감각으로 묶어서 함께 어울어지던 '감정'은 '소멸'하고 만다. 감정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 역시 아무리 강렬하였다 한들 '지속성'을 담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함께 했음의 '증거'가 되어 남아 있다.

즉 '사랑하다'와 '장소하다'는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연인들에게 장소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여기서 재미있는건, 이 '장소'의 개념이 확장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이 아니라 축소적이고 개별적인 '방'이라는 좁은 개념으로 보고 있는 점이다.


연인들이 머무는 장소의 기본 단위는 집이 아니라이다.

방은 현재적인 체류의 지점이지만 카페나 숙소처럼 소유한 곳은 아니다.

연인들은 이 방에 머물때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그 방에서 잠시 바깥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방은 외부의 소음에 노출된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들 그들이 함께한 '(공간)'이 없었다면

겪은 시간들은 추상성 속에서 떠돌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방'은 소유의 장소가 아닌 '임시적 선물'로

'지속성'과 '영원성'을 보장해 주진 못한다.


어떤 장소에 머물렀던 그것은 임시적이다.

우리들의 역사는,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실존'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추억을 쌓고 기억을 되내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곳에서 어떤 추억을 쌓았던간에 '시간의 흐름' 앞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연인들이 함께 보낸 '시간'과 '기억'은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들 '만'의 약속도, 고백도, 다짐들도 돌이켜 볼때마다 똑같이 상영되고 재연되는 '필름'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의 머물렀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한다는 것은 전부 끊임없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아름다웠다'고 말하지만 '암기할 수 없는 문장'처럼 잊히는 '파괴된 잔해'들과 같다. 이런 기억의 '망각'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붙잡고 끊임없이 '의심'과 '상상력' 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장소의 멜랑콜리'라고 한다.


연인들은 흘러가야만 하는 '실존' 앞에서 잠시 '유예'를 선언하며 시간을 붙잡기 위해 그들만이 숨어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다니며 계속해서 장소를 '발명'한다.

소유의 장소가 아닌 임시적인 그 장소에서, 내적이며 우주적인 장소로 만들 그 곳을 계속해서 '발명'하고 '재발명'하며 고군분투한다.

이 소유할 수 없는 장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물질성'과 '사실성'을 비켜간다. 장소는 명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동사'이기에 늘 다른 공간으로 변환 될 수 있다. 권력과 통치도, 대립과 위계도, 공적이고 사적인 곳이나 고급스럽냐 저급스럽냐 하는 장소의 '위치'와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우산'은 매력적인 사물이다. 우산이 펼쳐지는 순간 두사람의 최소 공간이 만들어 지면서 순식간에 내밀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공원에 있는 '벤치'는 연인들을 손가락에 닿는 최단 거리에서 '옆'으로 나란히 앉게 만든다. 거리의 복잡함과 소음은 제거되고 가볍고 부드러운 침묵의 공간으로 만든다.

'카페'는 연인들의 둘만의 공간에 무대가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소란스러운 공간도 둘이 앉은 공간만큼은 다른 조명을 비추는 방이 된다. 책상을 두고 얼마만큼 가까이 앉아있느냐에 따라서도 둘 사이의 거리를 말해줄 수 있다.

갈곳이 마땅치 않은 연인들은 공원의 '계단'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때 계단은 오르내리는 장소가 아니라 쉼터이고 작은 방이 된다. 복층 구조의 펜션에 있는 계단은 침대에 오르기 위한 은밀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침대'는 그 자체로 방이 된다. 탄생과 죽음을 맞이하는 이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체류지가 된다. 때때로 영원에 닿을 수 없는 하룻밤의 공기가 잠시 머물다 우회하는 뗏목이 되기도 한다.

'욕조'는 연인들이 몸을 담는 순간 이륙하는 우주선이 된다.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우주선이자, 어디로든 유영할 수 있는 좁고 따뜻한 바다가 되어 연인들을 안내한다.

'창문'과 '테라스'가 있는 방은 우리를 외부와 내부로부터 단절시키기도 하지만 연결시키기도 한다. 외부로 부터 보호되고 있다는 안도감과 친밀감,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안밖을 가르며 그 속에 연인들의 사건을 일으킨다.

'자동차'는 움직일 때와 움직이지 않을 때 전혀 다른 공간을 연출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 정차한다면 자동차는 기계가 아니라 방이 되기를 바란다. 이 지붕이 있는 완벽한 주차장이 연인들의 성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리' 위에서 우리는 이 다를 끝까지 함께 걸어 갈 수 있을 것인지 없을지를 예감하게 된다.

'기차역'과 '공항'은 연인들에게 아주 먼 곳에 데려다 줄 수 있다는 희망을 약속한다. 지역과 국경을 옮겨다니는 이곳에서의 시간성은 가독성이 없다. 하나의 장소에 무수한 시간의 주름을 품고 있다.

'낮'의 햇빛과 '밤'의 불빛은 공간에 다른 느낌을 준다.

'극장'의 스크린과 무대는 삶 너머를 비춘다. 공터, 광장, 산, 바다 그리고 그 어떤 곳들 모두 연인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연인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함께하자는 약속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어떤 것을 하자' '무엇을 먹자' '어디에 가자' 여기에는 모두 '둘'이여야 한다는 것과 '장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과거형'도 있고 '진행형'도 있고 '미래형'도 있어서, 장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여 의미를 갖게된다.

장소에 대해 이야기 할때, '우리가 ~했던 곳'이라며 지난 시간에 머물러 있을수도 있고, '우리가 ~했었고, ~했었고, ~해왔던 곳'으로 계속해서 덧씌워 질 수도 있고 '우리가~하려 했지만 하지 못한 곳'도 포함된다.

따라서 장소를 '발명'해서 찾는 것도 일종의 연인들의 '여행'이고,

그곳에 대한 '추억'을 더듬거리며 기억을 더듬거리는 것도 하나의 추억 '여행'이다.

장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지나간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도 우리의 실존적 시간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여행'인 것이다. '증거'로 남아 있는 장소에 대해 '상상력'을 가미하여 기억하는 것을 '여행에 대한 여행'으로 볼 수 있다.

더듬더듬 되짚어 보며 그 순간 놓쳤던 순간적인 연인의 표정을 다시 기억하고, 그땐 보이지 않았던 장소의 세부가 뒤늦게 떠오르기도 한다.

시간의 '바깥'에 있으면서 시간이 '부식'되지 않도록 담아두는 것이 '장소'이다.

장소는 '지금' 없음이자 '아직' 없음이며 본질적으로 '가질 수 없음'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설명하자면, '홀로'였던 우리가 '연속성'을 경험했지만 영원에 닿을 수 없는 공기가 잠시 머물렀다 우회하는 곳, 그 환각들이 생에서 계속 반복되게 하는 곳, 독창적이고 정체가 불분명한 곳, 촉각적인 에로스의 자리.

이것은 그러한 장소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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