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서 배워라 -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
해나 개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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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업 코미디언 스타 해나 개즈비만의 농담이 담긴 에세이 『차이에서 배워라』가 출간되었다.

1997년까지 호주의 태즈메이니아에서는 동성애가 범죄였다. 그런 '태즈메이니아 출신의 뚱뚱하고 뭘 해도 어색한 레즈비언' 인 그녀는 한때 ‘자기비하 유머’를 구사하는 코미디언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을 서슴없이 웃음거리로 삼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그러한 기존의 코미디 문법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렇게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게된 스탠드 업 코미디 쇼가 바로 「Nanette」(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이다.


이제 해로운 농담은 끝내야 한다.

그런 코미디는 하지 않겠습니다.

스텐드업 코미디 쇼, 나네트 中


스스로 '코미디 역사상 가장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웃기지 않는 한시간 짜리 무대'이자 '스탠드업 카타르시스', '트라우마 변환 실험' 이라고 평가한 이 무대는, 미투운동이 한창이던 시대 한가운데에 투척되었다. 가부장제를 비웃는 장광설을 시작으로 이 속에는 복잡한 모녀관계, 커밍아웃, 트라우마, 우울증, 성인 ADHD와 자폐 진단, 자기혐오, 그루밍 성폭행, 술과 마약 중독, 젠더퀴어라는 성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차이를 포용하지 못하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신랄한 코미디를 선보인다. 또한 창작자로서의 작품 창작 과정 등에 대한 경험을 섬세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경험과 상처들을 과감없이 드러내며 이를 농담으로 승화시키기에 우리는 그녀의 노련한 입담에 웃음, 분노, 성찰, 용기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 제 생각에 저의 문제는, 코미디때문에 아직도 청년기에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이 매번 농담이죠.

농담과 달리 이야기에는 3가지가 필요해요. 서론,본론,결론.

농담에는 2가지만 필요하죠. (배경과 펀치라인이 들어간) 서론, 본론이요.

저는 커밍아웃에 대한 코미디쇼를 진행하면서,

가장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성장의 시기를 상처로 남기고 농담으로 매듭짓고 말았어요.

그 이야기가 원동력이 되어 명성이 쌓였지만 결국 그건 농담으로만 남았고, 그 농담은 제 기억을 희석했죠. 제가 현실에서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데에는 역부족이었답니다.

펀치라인엔 상처가 필요해요.

펀치라인엔 긴장이 필요하고, 긴장은 상처로부터 나오거든요.

저는 동성애가 범죄로 치부되는 도시에서 자라면서, 저 자신까지 혐오하게 되고 말았죠.

뼛속까지 혐오했어요. 자존감은 외부로부터 오는데 한번 심어주면 울창한 숲이됩니다.

아이는 중력처럼 자기 혐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죠.

그렇게 수치심에 숨어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벽장 안에 숨어있었습니다.

숨는다는건 눈만 가릴뿐 수치심을 막지 못해요.

하지만 저는 제 이야기를 '제대로' '온전히' 전달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무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걸 저는 큰 대가를 치르고 배웠거든요. "


'나의 커밍아웃을 가지고 코미디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성장기의 아픈 경험을 상처로 남기고 농담으로 매듭지어버렸습니다. 내 이야기가 소재가 되어 반복되다 보니 내 실제 기억을 흐려버렸어요.' 라는 그녀의 말 속에서 자신의 소수자성을 농담거리 소재로 삼으며 코미디를 이어온 그런류의 농담이 결국에는 자기 존재를 해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상처와 수치심을 진정성 있게 털어놓으며 진정성 있는 새로운 코미디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새로운 농담을 발명했다.


해나 개즈비는 2006년 호주 '맬버른 국제 코미디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으며 10년 넘게 영국과 호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스타였다. 「Nanette(2018)」로 코미디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평을 듣던 그녀는 그해 에미상 버라이어티 스페션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다른 나라에도 유명해 질 수 있었는데, 미국의 어느 토크쇼에서 '하루 아침에 유명해지니 어떤 기분이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미국의 무례함이 아니라, 뭔가 아시아인, 흑인, 성소수자, 여성, 흑인등에 대해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사전 조사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는 일종의 '주류 문화'의 거만한 시선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은 해나 개즈비의 비 전형적(atypical)인 두뇌가 들려주는 독특한 방식의 이야기 이다. 엉뚱하고 신선해서 도무지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결말은 어떻게 마무리 지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입담'이 담겨있다.

일본에는 '만담'이, 미국과 영국에는 '스텐드업 코미디' 라 장르가 우리나라에게는 사실 크게 익숙하지는 않다. '토크쇼' 정도로 생각하면 될런지도 모르겠다. 이번 책을 계기로 나네트를 챙겨보았는데, 뮤지컬이나 콘서트가 아닌 단 한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서서 한시간 동안 '말'만 하는 것을 보기위해(오락 도구가 오직 '언어'뿐) 그 비싼 티켓팅을 하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가득 매울정도로 사람들이 모이는 '스텐드업 코미디'가 우리 문화에 잘 정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마디 한마디 할때마다 꺄르르르 웃어주는 청중들의 모습도 신기했다. 처음엔 영어권의 농담과는 개그코드가 잘 맞는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몰라했지만, 중반부쯤부터는 그녀의 몇가지 말에 '오 좋은 말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마지막엔 '스탠드 업 코미디란 이런거구나' 라며 적응 하게 되었다.

미술사학을 전공했던 그녀가 '남성들이 부흥시켰던 예술'로 인해 미술관에 발가벗고 있는 여자들에 대한 불편한 심리와 그속에도 레즈비언은 없었겠지 하는 생각, 고흐의 약물 복용과 예술의 상관성이라던가 피카소의 큐비즘과는 별개로 여성 편력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때는 매우 흥미롭기도 했다.


"(미투시대 이후) 지금이 격변의 시기라는거 압니다. 처음으로 주류에서 벗어났으니 당황했겠죠. (남성) 여러분도 이제 새로운 롤모델을 찾아야 될겁니다.

제가 인간대 인간으로 드리고 싶은 조언은, 방어적인 자세를 버리라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유머를 배우라는거죠.

웃음은 사람에게 좋은게 사실이에요. 긴장이 완화되죠. 웃음은 전염성이 짙어요.

사람들 많은곳에서 함께 웃으면 긴장의 완화력도 더 커지죠.

다른 사람들게 함께 웃는겉이 혼자 웃는것 보다 낫기도 하고요.

긴장은 인간을 고립시키고, 웃음은 소통의 장이 되어줍니다."

그녀는 웃음으로 소통하는 '웃음의 힘'을 믿으며 어떤 존재도 소외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양성의 가치와 다름을 존중받을 권리에 대해 논하며 자신만의 웃음 코드로 쉬온 농담 뒤에 존재하는 진실을 표현하려 했다. 그녀의 진솔함과 솔직함을 갖춘 이야기의 힘 덕분에 성소수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은 물론, 인생에서 실패를 겪어보거나 세상과의 불화로 자기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녀의 이야기에 웃고, 분노하고, 공감하며 대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속에는 어쩌다 이 모양으로 태어나 이해할 수 없는 사회에 내던져져

감당하기 벅찬 생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연약한 인간이 있다.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죽지 않고 버텨가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제보다 나아지려 몸부림 치는 사람.

이걸 생존본능이라 해야 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살고 있는것 같다.

해나 개즈비, 『차이에서 배워라』 서문 해나 개츠비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인 이유 中


우리가 타인의 삶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이나 영화 등의 창작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이유는 내가 겪은 생을 기준으로 비슷한 삶의 모습에 '공감'하거나, '홀로 있지 않음'에 안심하며 '연대'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한 인간을 깊이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은 여전히 가장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깊이 있게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외롭게 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매일 우울과 자책 속에서도 눈을 뜨며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하고, 사랑을 주고 받기 위해 노력하고, 아파하고, 치료하고, 그러다가도 가끔은 세상이 잠깐씩 환해져 행복해지기도 하고, 제자리걸음인것 같다가도, 어느순간 돌아보면 멀리 걸어온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렇게 삶의 모양은 제각각이여도 문득 드는 삶에 대한 생각은 비슷하다. 그럼에도 우린 '솔직'하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는 여전히 어려움을 느낀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과 생각들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될 때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되는것 같다. 유머와 분노의 그 어딘가 쯤에 존재하는 이 '블랙 코미디'에서 우리는 수치심을 성찰로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게 된다.


해나 개즈비는 '솔직함'이 가지고 올 역효과를 반복적으로 우려하고 있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너의 이야기가 결국 아니며 공감을 가져올 순 있지만 모든 트라우마들이 하나로 연결될 수는 없다고.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해 나간다.

이 책은 크게 두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코미디언이 되기 전의 초년 인생과 코미디 업계로 진출하기로 한 이후의 이야기다. 크게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성장기, 방랑과 자기비하의 세월, 신경다양인으로의 진단과 수치심에 대한 받아들임, 새로운 농담을 발명하며 젠더 퀴어 자폐인의 코미디를 만들어 내기, 나네트:나의 이야기의 완성까지의 이야기 단계를 밟는다.


예술가는 시대 정신을 창조하지 않습니다.

시대 정신에 응답하죠.

스텐드업 코미디 쇼, 나네트 中


그리고 그 시대정신에 응하는 예술가에는 '블랙 코미디'를 선사하는 코미디언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자랄 때 우리집 모든 여자는 '바늘'을 사용했다.

나는 그 '바늘'에 매혹되곤 했다.

바늘은 '마법'을 만들어냈다.

바늘은 구멍이나 찢어진 곳을 '수선'할 때 사용했다.

잘못을 '용서'하겠다는 뜻 같았다.

그리고 절대 공격적이지 않다.

'바늘'이지 '핀'이 아니니까.

루이즈 부르주아


말은 '바늘'같아서 '핀'처럼 사용하면 상대를 찔러 아프고 공격적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실을 꿰어 서로에게 이어주며 벌어진 상처를 '수선'하여 치유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유머' 한 꼬집이 더해지면, 우리는 웃으며 인생을 말할 수있을것이다. '그때'의 그 무엇이 '지금'의 그 무엇이 되었는지를.


차이에서 배워라를 읽으며 깊은 분노를 일으킬 만큼 웃긴 안티 코미디 를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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