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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초, 인종 차별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미국 미시시피 주 잭슨을 배경으로 그 도시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갓 졸업해 고향으로 돌아온 농장주의 딸 스키터는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하다. 그녀가 대학원까지 다녀온 동안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안방마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키가 크고 선머슴처럼 뻣뻣한 그녀의 연애 경력은 고작해봐야 단 한번의 키스가 전부... 불러주는 곳은 없지,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엄두는 안 나지, 사귀는 사람마저 없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그녀는 주변의 걱정도 짜증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그간 어릴적 자신을 키워준 흑인 가정부 콘스탄틴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녀의 슬픔을 가중시킨다. 그녀가 자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그만 두었다는 것이 못내 섭섭한 스키터는 그리운 마음에 계속 콘스탄틴의 소식을 수소문해 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상관하지 말라는 것. 친구 엘리자베스의 가정부인 아이빌린에게선 아예 묻지도 말라는 말을 듣게 되자 스키터는 모종의 사연이 있음을 짐작한다. 하나, 당사자는 여기 없고 사정을 설명해줄 만한 사람들은 입을 다무는 형편이니 갑갑할 뿐이다.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 스키터는 뉴욕의 유명 편집자로부터 작은 일부터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편집자로부터 눈에 띄는 기사를 써오면 봐주겠다는 말에 기삿 거리를 찾던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들의 속마음을 들어보는건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당시 백인들은 급해서 주인집 화장실을 썼다는 이유로 흑인들을 폭행하고, 더럽다는 이유로 같은 식탁에 앉지 못하게 하며,--바로 그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말이다.-- 다양한 이유로 도둑이라는 누명을 씌워 내쫓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 일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면서도 바꾸기 위한 아무런 시도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이번에야 말로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곧 난관에 부딪힌다. 가정부들이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믿을 수도 없지만, 만약 자신들의 주인에 대해 떠들어댄 것이 알려진다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다. 간신히 아이빌린에게 인터뷰 허락을 받아 낸 스키터는 백인 우월주의자 친구인 힐리가 자신의 가정부를 절도죄로 4년형 선고 받게 하자 분노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그 사건은 스키터에게 유리하게 전개 된다. 분기탱천한 다른 가정부들이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한 것이다. 두렵다고 침묵 할 수만은 없다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앞다투어 달려온 가정부들에게 스키터는 감동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받아적는다. 그들의 각각의 사연을 들으면서 점점 미안해진 스키터는 린치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야기를 들려준 그들을 위해 반드시 책을 출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는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책이 출간되자, 책의 내용을 둘러싸고 마을은 분란에 휩싸이는데...  

 

백인 여주인과 흑인 가정부 간의 우정과 오해와 갈등, 인종 차별에 따른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 보여주던 소설이다. 작가가 어렸을 적 흑인 가정부 손에 자랐다고 하는데, 그 영향이 크지 싶었다. 자신의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살갑게 자신을 키워준 가정부,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이등 시민으로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었고, 아이가 어느정도 크면 아무리 애정을 쏟아 키웠어도 손을 떼야만 했다. 그런 가정부들의 수고가 한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감사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흑인에게 동정적인 눈길로 글을 쓴게 뚜렷해 보였다.  

 

작가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를 설명한다. 백인들에겐 좋은 친구지만 흑인들에겐 최악의 주인인 친구 할리, 자신의 아이조차 건사 못하는 엘리자베스, 친구들에겐 멍청이로 통하지만 흑인 가정부에겐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대하는 루앤등 당시 백인들을 상징하는 스키터의 친구들과 평생 별별 사건들을 눈뜨고 다 지켜본 탓에 현자처럼 되어버린 흑인 가정부 아이빌린, 그녀의 친구로 입바른 소리를 참지 못하는 결과 늘 사태를 악화 시키는 미니등 흑인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작가는 묻고 있었다. 과연 타인을 피부색이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고. 1960년대 미국 남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데는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 라고... 일단 작가의 의도는 좋았다고 본다. 자신의 아이를 제껴두고 백인의 아이를 키워야 했던 흑인 가정부들의 애환을 잘 포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묻는다. 도무지 그들은 어떻게 그런 시절을 참고 견디었던 것일까 라고... 우리 같으면 어림없었을텐데, 라는 뉘앙스를 담아서 말이다. 여기서 무언가 불편한게 느껴지시는가?  

 

그렇다. 문제는 이거다. 그녀의 머리속엔 어린 시절부터 간직된 백인과 흑인에 대한 편견이 고스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하여, 아무리 그녀가 흑인 가정부가 불쌍해, 우리가 너무했어, 반성해야 해...라고 성토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 말이 틀린 것은 없다고 해도. 무언가 그녀의 선의 그대로 안 받아 들여지게 하는 면이 있었다. 마치, 우월한 인종인 백인이 선심 쓰는 셈치고 엣다~~~ 그래, 반성한다고 반성해~~~정말 잘못했어. 너희들은 진심이었을텐데 말이야. 우리 백인들이란게 참 못된 인간들이지 뭐야, 너희들이 우리를 그렇게 정성으로 키웠는데 말이지. 고맙다는 말을 고사하고 인간 취급도 안 해주다니, 배은망덕했어.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미안해! 됐지? 라고... 그렇다보니, 이 책속에 등장하는 백인은 무책임하고, 변덕스럽고, 기괴하고, 알콜 중독에, 우울증 환자들인 반면, 흑인 가정부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존재면서도 그들을 불평없이 지켜주는 인간성 넘치는 존재로 그려진다. 흠... 뭔가 이상한 수식 아닌가. 분명 흑인들을 대놓고 칭찬 하는 것인데도 어딘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런면에서 아마도, 흑인들이 이 책을 좋아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한다. 흑백차별을 타파하려는, 정의와 평등을 외치는 이런 소설에 오프라가 한마디 안 하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책 근저에 깔린 작가의 선심주의와 나른한 감상주의가 별로 고맙지 않았겠다 싶다. 오프라의 엄마도 백인의 가정부였다니, 누구보다 그들의 사정은 잘 이해하고 있었을테고 말이다. 과연 흑인 가정부들이 이 책을 고마워 할까? 콧방귀를 뀌지나 않았을지.... 게다가 마지막을 희망으로 장식하려는 걸 뭐라 할 순 없는데,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낸다는 발상도 작위적으로 보였다. 스키터가 당시로는 드물게 자립을 위해 뉴욕으로 떠나고, 미니는 폭행을 일삼는 남편으로부터 떠나며, 아이빌리는 자신을 도둑이라 내모는 백인 주인집으로부터 떠난다는 결말이었는데, 도무지 현실감 없어 보였다. 그땐 절대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으니까. 생각을 해내고, 그것에 맞춰 행동까지 옮기는데는 한 세대는 아니라도 10년은 더 넘게 걸리는 법이다. 그런면에서 이 소설속의 이야기는 지금에서나 가능한, 환타지적인 성격이 농후한 책이었다. 현실속에서는 대체로 벌어진 적이 없는... 그래서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더 아쉬운, 그런 환타지 말이다. 굳이 미국의 환타지를 읽으면서 흑백 편견을 타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애매작으로 넣는다.  

 

그러게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풀어가야 한다는게 맞지 싶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절대 그 심정을 모른다는 말이다.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자신이 당해보지 않은 한 결코 그 심정을 알길이 없는 것이니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이해가 된다. 왜 작가가 남녀 평등이나 자립에 관한 문제에선 그토록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면서도, 흑인들의 문제에 관해서는 어설퍼 보였는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자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작가의 포부와는 달리 상상력과 의도 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었고. 다음번엔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풀어낸 책을 내주길 기대해 본다. 착하단 소리는 듣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가식적이라거나 위선적이라는 소린 듣지 않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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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결심한 엄마와 그 시간을 함께 한 세 딸이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해서 집어들게 된 책이다. 감동적인 실화를 읽게 될 줄 알고 집어든 책이건만, 오히려 읽으면서 속이 갑갑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일단 "엄마" 와 "자살"이라는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나. 울고 싶을때 집어들면 딱일 것 같았다. 기대하던 감동까지는 아니라 해도, 책을 내서 엄마의 자살을 사방팔방 알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딸이라면 무언가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서 글을 쓴 것일 거라고 추측했었다. 맞다, 한 수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읽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 되기에 조금은 당황했다. 작가가 뭔가 알려줄 만한 처지가 못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엄마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고, 엄마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도 없으며, 엄마의 병을 지켜보면서도 엄마의 상태를 이해못하던 딸이 단지 엄마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책을 쓸 줄은 몰랐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딱 그짝이지 싶다. 그저 넘쳐나는 슬픔과 과잉 감상으로 도배를 해놓았을뿐인데, 저자는 책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단지 엄마의 죽음이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소재정도가 될 거라고만 생각한건 혹시 아니었을지... 

남들에게 주목할만한 드라마틱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 그동안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늘 좌절하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엄마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거야, 이건 좀 팔리지 않겠어? 이렇게 아름다운 미국의 중산층 백인 할머니가 병마에 지쳐서 자살을 감행했다고 하면 분명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줄거야, 난 그저 엄마를 사랑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면 그리고 엄마 역시 우리를 사랑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면 사람들도 감동하면서 우리를 봐주겠지. 라는...어쨌거나 죽었다잖아? 사람들은 죽음에 약하다고...이런 계산이 작가의 머리속을 실제로 넘나들었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실제로 그랬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이 책안엔 진지한 문제의식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벅찬 현실을 감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만 존재할 뿐...도무지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다니, 우리는 도대체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 하는 것이냐?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왜 죽음이 영원한 공포로만 남겨져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봐도 좋을텐데 말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20년 넘게 파킨슨 병을 앓고 있던 작가의 엄마는 울혈성 심부전증, 천식, 만성 폐질환, 골다공증,관절염에, 초기 치매증상까지 겪게 되자 심각하게 자살을 준비한다. 자나깨나 나 죽을래를 동네방네 떠들던 엄마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자살을 위한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안락사를 도와주는 협회에도 가입하고, 수면제도 구해 놓고, 마약까지 손에 넣은 엄마는 날짜를 정해 자식들에게 선포한다. 혼자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죽을 때 딸들이 곁에 있기를 원하는 엄마, 그런 엄마가 질색인 딸들, 평상시에도 엄마와 별로 가깝지 않았던 딸들은 엄마의 자살을 지켜봐야 한다는 부담감에 엄마를 말린다. 결국 자살을 방조했다는 죄명에 걸려 들까 걱정한 저자는 엄마에게 아사를 권유한다. 이에 엄마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정해진 날짜에 굶기에 돌입하는데...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 이 작가의 엄마를 보면서도 든 생각이다. 70이 넘은 연세지만 다행히도 그녀에겐 돈은 많다. 딸들에게 간병비를 구걸하지 않아도 되고 집 안에 도우미에 간병사를 세 명이나 둘 만큼. 덕분에 딸들은 엄마의 괴로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엄마가 죽고 싶을만큼 아프다고 하는데도, 더 살라고 다그친다. 그게 엄마를 사랑하는 거라 생각하고,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는거라 생각한다. 그만큼 엄마를 옆에서 간병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진짜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느껴봤다면, 나를 생각해서라도 참고 살라고는 못할테니까.  

 

하지만 그 딸들을 무심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이 엄마는 전형적인 나르시스트형 엄마였다. 딸들에게 관심이 필요한 어린 시절 그녀가 엄마로써 해준 것은 나 나 나 나 나 ...라는 주문뿐이었다. 가엾게도 착한 딸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나빠서라고 생각했고, 엄마를 탓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대신 엄마를 변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엄마는 그저 불행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를 이해한다고 해서 엄마로 인한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은 아니고, 더군다나 엄마 곁에 있었을 시에 받을 상처를 잊은 것도 아니다. 결국 세 딸들이 선택한 것은 되도록이면 멀리 엄마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나마 착한 딸이고 사랑받는 딸이고 싶었던 저자만이 남편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자살 소동에 꾸준히 관여하지만...  

 

그렇다. 이들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모녀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엄마는 그다지 생을 잘 산 사람이 못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과거는 죽음에 있어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된다. 그녀가 진심으로 죽고 싶다는데도 딸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편하게 죽는 방법을 엄마가 찾아 올때조차 딸들은 방해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용기를 짜내서 찾은 방법이라는 것을 이해 못한 채. 엄마가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횡설수설할때는 짜증을 낸다. 엄마에게서 배운대로 그들 역시 엄마보다 자신들이 먼저기 때문이다. 엄마를 그만큼 신뢰하지 못했다는 뜻도 되겠지만. 사랑은 할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랑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이기에, 모녀는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한다. 아마도 그길이 꼭 가야 하는 길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영원히 그 결정을 미루고 말았을 것이다. 하여간 그 혼란 속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어떨 거라고 보시나? 감동적일 거라고? 죽음이 있어서? 글쎄...죽음이라는 말에 무조건 조건반사처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럴지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싶다. 이 책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빠져있었으니 말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모녀 관계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그저 피상적인 고찰에 ,관습적인 반응뿐이었다. 왜 엄마가 자살이라는 수단을 택할 수밖엔 없었는지, 그 과정속에서 본인들이 당한 고통과 부담감들과 당황스러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피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해답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일게다. 오히려 그녀과 엄마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의 말을 자신의 생각과 안 맞는다고 씹기 일쑤더라. 그들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였더라면, 엄마의 입장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하여간, 당신은 어떠신가? 삶을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시는가? 열심히 살자, 잘 살자. 그것이 잘 죽기 위한 우리의 최대 전략이 되리니....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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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면서 든 의문이다. 탄탄한 줄거리에 일사천리로 흘러가는 이야기 전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이야기속에 적절하게 녹아들게 하던 능수능란함,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을 그들의 언어로 캐치해 내던 통찰력, 등장인물들을 마치 실재하는 사람인양 느끼게 만들어주던 각각의 개인사들, 관심있게 공부한 티가 역력하던 심도있는 정보들--한마디로 수박 겉핥기 식의 공부가 아니었다는 뜻--, 역사가 개인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과장되지 않게 보여주던 점등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었으니 말이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책을 아무데나 펼쳐놓고 대충 살펴보면 그 작가가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쓴 글인지가 짐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책을 분석하면 이렇다. " 주제를 물고 늘어짐에 있어 머리나 집중력이 부족하진 않음,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침, 실은 하고픈 말을 다 못하고 죽을까 그게 걱정임!" 이라고...한마디로 작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의 책이었다. 어떤 위치에 있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있건 간에 글을 쓰지 못한다면 당장 무기력해졌을 만한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선 이야기가 그야말로 줄줄 새서 흘러 나온다. 별게 없는 사물에게 의미심장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색다를게 없는 역사에서 눈이 튀어 나올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 사건들을 모아선 신빙성 넘치는 이야기를 엮어내고, 신선할 것이 하나 없는 등장인물들에선 기발한 이야기를 토해내게도 만든다. 지나가는 사물들을 다르게 보게 만들고, 지나친 사건들을 뒤돌아 보게도 만든다. 그것이 작가가 될 운명을 지닌 사람들의 능력이다. 그들의 상상력이고, 그들의 독창성이며, 막지 못할 필연성이기도 하다. 그것이 소수에게만 부여된 끔찍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임을 알기에 우린 그들을 부러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추앙하게 된다. 덕분에 이 세상이 보다 풍요로워지고, 선명해지며, 재밌어 지고, 다양해지는데다, 보다 인간적이게 보인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린 그들에게 빚진게 많다. 그걸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선택받은 그들에게 어떤 이유로건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하여간 천부적인 글쟁이의 글을 읽게 되서 무척 흥분되었었다. 줄거리는 삼대에 걸친 이야기다. 뉴욕주에 사는 패티와 월터는 겉보기엔 이상적인 부부다. 아내를 끔찍히 사랑하다 못해 멍청이처럼 보이는 남편 월터와 전업 주부로 아이들이 최우선인 아내 패티, 대학에서 만난 둘은 부부가 된 이후로 최선을 다해 가정을 꾸려왔다. 어린 시절 평화롭지 못한 가정에서 성장한 탓에 부모에게 원한이 깊은 둘은 최소한 자신들의 아이들에게만은 그런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 한다. 하지만 부모 노릇을 처음 해보는 그들에게, 더군다나 바람직한 롤 모델이 없었던 둘에게 부모 노릇은 쉽지 않다. 장녀 제시카보다 둘째 아들 조이를 편애앴던 패티는 뜻하지 않게 부모로써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아들을 친구처럼 대했던 것이다. 엄마의 그런 실수는 예민한 아들에게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결국 조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여자친구 집으로 가출하게 된다. 아들에 대한 실패가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패티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되돌아 보기 시작한다. 묻혀 두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불행한 현재가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걸 깨닫는다. 실은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월터가 아니었다. 월터의 절친한 친구인 리처드 였지...리처드를 쫓아 다니던 그녀는 예기치 않게도 월터와 결혼을 했는데, 그녀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리처드의 성격탓도 있었다. 타고난 바람둥이었던 그는 결혼을 하고 정착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거 리처드와 결혼 하지 못한 것이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라고 믿었던 그녀는 십여년이 흐른 뒤 그것이 리처드의 월터에 대한 우정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불행한 결혼생활에 탈출구가 필요했던 패티는 리처드와 불륜관계에 빠지고, 패티와 월터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냉랭해진다. 결국 둘의 사이를 알게 된 월터는 그간 참아왔던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내기에 이르른다.  

 

한편, 보란듯이 성공해서 부모에게 보여줄 생각이던 조이는 그 성공이라는 것이 영혼을 팔아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돈이 좋긴 하지만 사기꾼이 될 생각은 없었던 그는 평생 처음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그간 필요해서 곁에 두긴 했지만 늘 버릴 생각이던 여자친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잘해봐야 개차반이 될 줄 알았던 아들의 회심에 아버지 월터는 미소를 짓는다. 락스타가 되긴 했지만 정착할 곳 없이 떠돌던 리차드는 월터의 가정을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그 가정이 실은 허울만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알게된 그는 모두에게 실체를 보여주려 노력한다. 모든 거짓이 드러나고, 속임수가 바닥나자, 결국 사람들은 진실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과연 그들은 모두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월터와 패티 버글런드라는 부부를 중심축으로 해서 삼대에 걸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책이다. 월터와 패티와 그들의 부모 세대,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우선, 이 책 한권을 통해 미국의 중산층이 자식을 어떻게 길러왔고, 그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지금은 어떻게 키우려 하는지가 훤히 보였을만큼 가족간의 관계에 치중해 썼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자신들이 고통스럽게 큰 만큼 자신들의 자식만큼은 그렇게 키우지 않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나, 자식에게 잘 해주려 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은지 알지 못했던 부모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적혀 있던데,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미국의 경우지만 오히려 이 책을 보면서 아이를 키우는데 있어 시행착오는 어쩜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희생적이건 이기적이건 간에, 부모 노릇을 처음 해보는 사람들에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당시론 짐작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결국 대부분의 부모들이 결과적으로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이 실제로 그들이 무책임해서 아니라는걸 알게 된 것이 이 책에서 건진 최대의 수확이다. 아마도 그건 그만큼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복잡한 일이라는 뜻이며, 또 그만큼 일상을 나누는 인간관계를 맺는 다는 것이 힘들다는 뜻이겠지. 하여간 총체적인 부모--자식간 난맥상을 일목요연하게 보는 묘미가 있긴 했다.  

 

그외 부부간--친구간의 문제들도 질릴 정도로 세세하게 들여다보게 해줬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해도, 이 책 하나면 훔쳐 보기의 달인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독자로써는 이렇게나 자세하게 알고 싶지는 않은데, 라는 생각이 간간히 들긴 했지만 작가인 그는 그들이 왜 그렇게 불행하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불행한 결혼 생활이 어떨지 정신이 번쩍 들도록 보여준다는 점이 특징이다. 아마도 여기서 우린, 이 작가가 우아하고, 논리적이며, 집요한데다, 현실감각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작가라면 눈살을 찌프리면서 읽기 힘들게 서술되었을만한 장면도 그의 손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터치로 탈바꿈하니 말이다. 쉽게 말해 역겨운 것도 그다지 역겹지 않도록 느껴지게 만든다는 것인데, 이거 정말로 대단한 재능이다. 재능없는 작가들이 가장 많이 걸려 넘어지는 부분이 바로 여기니 말이다. 정말로 난 왜 어떤 작가들은 그걸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해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지 이해를 못하겠다. 단순히 재능의 문제같진 않은데 말이다. 하여간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지 앞으로 연구해볼만한 사항이다.  

 

거기에 미국 역사와 그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 그리고 세대간의 이해 관계에 따른 갈등들이 각자의 사연들속에 녹아있었다. 뭐, 거시적으로 본다면 얼마든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터이니 그건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하고... 이렇게 다양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저렇게 된 이유를 이제 말해 본다면? 그러니까, 감탄할 정도로 완벽한 책이었는데도, 다 읽고 나니 무언가 살짝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완벽하면 수작이라고 거품을 물어야 정상인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물론 감동이 없긴 했다. 주인공들이 이해못할만큼 괴짜는 아니라서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랑스러울 정도의 등장인물도 없었고. 균형잡힌 넓은 시야에 호감이 생기긴 했지만 작가의 견해에 충분히 공감이 가지도 않았다. 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충분히 확신이 안 선다. 이건 내 탓이 아니다. 작가의 탓이지...이렇게 분석을 해보니,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인지 이해가 간다. 간단히 말해 비록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난 작가이긴 하지만서도,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니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프루스트, 스탕달, 포크너,플로베르,발자크,제인 오스틴이 떠오른다. 그들은 도무지 얼마나 천재였던 것일까?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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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엔 자살하지 마라. 밑지는 장사다. 왜냐고? 나이 들면 사는게 한결 편해지기 때문에? 그랬음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딱히 그렇진 않다. 단지, 아직 삶을 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인생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인생에 대해 자신이 나중에 어떻게 생각하게 될런지 그땐 절대 알 수 없다. 절대 안 변할거라 생각한 내 사랑은 일주일짜리 풋사랑임이 밝혀지기도 하고, 당연히 잊을 거라 생각한 사랑은 늘 가슴 한켠에 자리잡아 떠나질 않을 수 있다. 이상주의자가 현실에 부딪혀 초라하게 무너지는 모습이 일상이 되고, tv에서 떠들어 대던 그럴 듯한 이야기들은 긴가민가를 거쳐 드디어 불신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나를 그리도 이해 못하는 선생님이 도무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더니, 선생님이 되어보니 망나니 같은 학생들이 때론 두렵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의 복지부동을 볼 때마다 불평했건만, 나는 아예 출근조차 하기 싫다. 뇌물과 횡령과 불륜과 음주운전과 성추행을 그렇게 비난하더니, 어느순간 그게 그리 나쁜 건 아니잖냐고 묻는 친구에게 어떻게 표정관리를 해야 할지 궁리해야 할 때도 온다.

 

어른이 되었다. 결혼을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결과에 나만 불행한가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부모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서 내 부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고, 영원히 용서를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 여전히 삶은 복잡하고, 여전히 삶은 힘들다. 단 한가지 위안이 있다면 젊은 시절보단 아는게 많아 진다는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범위도 넓어지지만, 무엇보다 내 자신을 과거보단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젊은 이들에겐 무엇을 고민하건 간에 조금은 자신에게 시간을 주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도 모른 채 삶을 마감하는건 너무 재미 없으니 말이다.

 

여기 이 책의 작가들은 둘 다 쉰 살을 넘긴 베테랑 저널리스트 들이다. 내가 왜 서두를 이리도 거창하게 시작했는지 감이 오시는가? 맞다. 그들은 젊지 않다. 벌써 한 세상을 좋이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엔 군더더기가 없다. 이미 살아봤기에 아는 이야기만 한다. 이상을 떠들지도, 자신이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남발하지도, 어깨에 힘 팍 주고 자신의 대단함을 설파하지도 않는다. 그게 별로 먹히지 않는다는걸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한다. 과거에 그들은 이상주의자였지만 지금은 버린지 오래라고. 오히려 속물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에 안도를 한다. 해 봤는데, 그게 현실과는 맞지 않더란다. 환경 보호에 앞장서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솔직히 인정을 한다. 가혹한 동물 도살 상태를 생각하면 채식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육식은 절대 포기 못하시겠단다. 정치가를 비난하고 자신의 냉소주의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지만, 실제로 만난 정치가가 의외로 공감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에 놀라워 한다. 오히려 자신의 신념에 반해 언론 플레이를 해야 하는 정치가들을 가엾어 한다. 그들 역시 짜고 치는 고스톱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란걸 이해하는 순간이다. 행복하지 않았던 부모를 생각하면 짠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저절로 용서되는 건 아니란다. 덕분에 가족지상주의자가 되어 열심히 가족들을 부양했지만, 과연 아이들이 자신의 노력을 가상타 해줄지 의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단다. 행복한 가족을 꾸리는 동안 어린 시절의 불행이 치유되는 느낌이었으니까. 나름 사회에서 성공을 하긴 했지만 미래가 불안한것은 여전하다. 싱글 마더가 될까 두려워 자신에게 조언을 청하러 온 친구에게 낙태를 권유했다. 그녀는 낙태를 했고, 나중에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그렇게 갖고 싶어한 아이는 끝내 얻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한 조언이 그렇게 아픈 결과를 나을 줄은 몰랐단다. 하지만 후회는 앞서는 법이 없으니...

 

그렇게 두 남자가 정치와 인생, 가족과 이데올로기, 나이듦과 가족들의 부양문제, 독일에 대한 자신들의 마음과 외국인을 대하는 독일인의 태도와 정의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늘어놓은 책이 되겠다. 나는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라는 제법 진지한 부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그들의 말이 고루하게 들리지 않는건 그것이 그들의 경험에서 나온 말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지루하거나, 재미 없거나 ,영양가 없거나, 공감이 되지 않거나 , 전혀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려나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공감이 되서 놀랐다. 그건 아마도 인간이 사는 사회는 어디나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독일 전후의 사정이 우리나라와 얼추 비슷해서일 수도 있으며, 사람의 인식 정도가 경험에 따라 넓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건 간에, 우리나라 실정에 대입해서 읽어도 된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특히나 독일인으로써 자기 나라의 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부끄러워 하는 모습은 어찌나 우리랑 똑같던지... 참 나, 그렇게 독일 정치가들이 불만이시면, 우리나라에 와서 한번 살아보시죠. 라고 말 하려다 그만 두었다. 아마도 자국 정치인들에 대한 불평 불만을 토로하는건 모든 국민들의 피할 길 없는 취미생활 (national hobby) 아닐까 싶어서. 하여간, 깍쟁이 같은 서양인과  동양인의 정서가 이토록이나 닮았다니, 흐믓했다. 결국 어디에서 살건 간에, 현실의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반 다르지 않는가 보다. 대단하게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비극적이거나, 되돌릴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진 않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낼 뿐이니 말이다.  그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 생각하면서, 현실과 타협해 과는 과정들이 우리네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적당히 게으른건 용서해도, 적당히 친절한건 용서 못하면서 말이다.

 

하여간 어느순간에도 솔직하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남이 어떻게 볼까 두려워 자신들을 포장하지 않으며, 어깨에 힘 빼고 수다를 떤다는 것이 흔한 것도 쉬운 것도 아니니까.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는 점이 아마도 이 책이 독일에서 공전의 히트를 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한다. 더불어 연륜이 빚어낸 적절한 균형 감각과 타고난 유머감각은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었으니, 중년 두 사내의 전 생을 관통하는 울림있는 수다를 듣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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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독자서평단 활동 종료 설문

1.서재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은  책과 그 이유 

--일년 동안의 과부 1,2부 /이유는 받은 책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재미가 있어서입니다. 

2.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  

--없음. 

3.내 맘대로 베스트 5 

--베스트 5가 불가능합니다.그마나 가장 낫다는 일년 동안의 과부도 , 제 기준으로 보면 별 세개 반 정도밖에는 안되는 작품이었거든요. 알라딘 서재단 맨처음 신청할때는 기대가 컸었는데요,막상 받아본 책들은 읽기조차 고역인 책들이더군요.읽는것 자체가 고역이니 리뷰 쓸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점차 책을 받는다는 설렘마저 사라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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