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인종 차별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미국 미시시피 주 잭슨을 배경으로 그 도시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갓 졸업해 고향으로 돌아온 농장주의 딸 스키터는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하다. 그녀가 대학원까지 다녀온 동안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안방마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키가 크고 선머슴처럼 뻣뻣한 그녀의 연애 경력은 고작해봐야 단 한번의 키스가 전부... 불러주는 곳은 없지,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엄두는 안 나지, 사귀는 사람마저 없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그녀는 주변의 걱정도 짜증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그간 어릴적 자신을 키워준 흑인 가정부 콘스탄틴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녀의 슬픔을 가중시킨다. 그녀가 자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그만 두었다는 것이 못내 섭섭한 스키터는 그리운 마음에 계속 콘스탄틴의 소식을 수소문해 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상관하지 말라는 것. 친구 엘리자베스의 가정부인 아이빌린에게선 아예 묻지도 말라는 말을 듣게 되자 스키터는 모종의 사연이 있음을 짐작한다. 하나, 당사자는 여기 없고 사정을 설명해줄 만한 사람들은 입을 다무는 형편이니 갑갑할 뿐이다.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 스키터는 뉴욕의 유명 편집자로부터 작은 일부터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편집자로부터 눈에 띄는 기사를 써오면 봐주겠다는 말에 기삿 거리를 찾던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들의 속마음을 들어보는건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당시 백인들은 급해서 주인집 화장실을 썼다는 이유로 흑인들을 폭행하고, 더럽다는 이유로 같은 식탁에 앉지 못하게 하며,--바로 그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말이다.-- 다양한 이유로 도둑이라는 누명을 씌워 내쫓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 일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면서도 바꾸기 위한 아무런 시도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이번에야 말로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곧 난관에 부딪힌다. 가정부들이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믿을 수도 없지만, 만약 자신들의 주인에 대해 떠들어댄 것이 알려진다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다. 간신히 아이빌린에게 인터뷰 허락을 받아 낸 스키터는 백인 우월주의자 친구인 힐리가 자신의 가정부를 절도죄로 4년형 선고 받게 하자 분노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그 사건은 스키터에게 유리하게 전개 된다. 분기탱천한 다른 가정부들이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한 것이다. 두렵다고 침묵 할 수만은 없다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앞다투어 달려온 가정부들에게 스키터는 감동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받아적는다. 그들의 각각의 사연을 들으면서 점점 미안해진 스키터는 린치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야기를 들려준 그들을 위해 반드시 책을 출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는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책이 출간되자, 책의 내용을 둘러싸고 마을은 분란에 휩싸이는데...
백인 여주인과 흑인 가정부 간의 우정과 오해와 갈등, 인종 차별에 따른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 보여주던 소설이다. 작가가 어렸을 적 흑인 가정부 손에 자랐다고 하는데, 그 영향이 크지 싶었다. 자신의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살갑게 자신을 키워준 가정부,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이등 시민으로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었고, 아이가 어느정도 크면 아무리 애정을 쏟아 키웠어도 손을 떼야만 했다. 그런 가정부들의 수고가 한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감사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흑인에게 동정적인 눈길로 글을 쓴게 뚜렷해 보였다.
작가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를 설명한다. 백인들에겐 좋은 친구지만 흑인들에겐 최악의 주인인 친구 할리, 자신의 아이조차 건사 못하는 엘리자베스, 친구들에겐 멍청이로 통하지만 흑인 가정부에겐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대하는 루앤등 당시 백인들을 상징하는 스키터의 친구들과 평생 별별 사건들을 눈뜨고 다 지켜본 탓에 현자처럼 되어버린 흑인 가정부 아이빌린, 그녀의 친구로 입바른 소리를 참지 못하는 결과 늘 사태를 악화 시키는 미니등 흑인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작가는 묻고 있었다. 과연 타인을 피부색이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고. 1960년대 미국 남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데는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 라고... 일단 작가의 의도는 좋았다고 본다. 자신의 아이를 제껴두고 백인의 아이를 키워야 했던 흑인 가정부들의 애환을 잘 포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묻는다. 도무지 그들은 어떻게 그런 시절을 참고 견디었던 것일까 라고... 우리 같으면 어림없었을텐데, 라는 뉘앙스를 담아서 말이다. 여기서 무언가 불편한게 느껴지시는가?
그렇다. 문제는 이거다. 그녀의 머리속엔 어린 시절부터 간직된 백인과 흑인에 대한 편견이 고스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하여, 아무리 그녀가 흑인 가정부가 불쌍해, 우리가 너무했어, 반성해야 해...라고 성토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 말이 틀린 것은 없다고 해도. 무언가 그녀의 선의 그대로 안 받아 들여지게 하는 면이 있었다. 마치, 우월한 인종인 백인이 선심 쓰는 셈치고 엣다~~~ 그래, 반성한다고 반성해~~~정말 잘못했어. 너희들은 진심이었을텐데 말이야. 우리 백인들이란게 참 못된 인간들이지 뭐야, 너희들이 우리를 그렇게 정성으로 키웠는데 말이지. 고맙다는 말을 고사하고 인간 취급도 안 해주다니, 배은망덕했어.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미안해! 됐지? 라고... 그렇다보니, 이 책속에 등장하는 백인은 무책임하고, 변덕스럽고, 기괴하고, 알콜 중독에, 우울증 환자들인 반면, 흑인 가정부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존재면서도 그들을 불평없이 지켜주는 인간성 넘치는 존재로 그려진다. 흠... 뭔가 이상한 수식 아닌가. 분명 흑인들을 대놓고 칭찬 하는 것인데도 어딘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런면에서 아마도, 흑인들이 이 책을 좋아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한다. 흑백차별을 타파하려는, 정의와 평등을 외치는 이런 소설에 오프라가 한마디 안 하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책 근저에 깔린 작가의 선심주의와 나른한 감상주의가 별로 고맙지 않았겠다 싶다. 오프라의 엄마도 백인의 가정부였다니, 누구보다 그들의 사정은 잘 이해하고 있었을테고 말이다. 과연 흑인 가정부들이 이 책을 고마워 할까? 콧방귀를 뀌지나 않았을지.... 게다가 마지막을 희망으로 장식하려는 걸 뭐라 할 순 없는데,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낸다는 발상도 작위적으로 보였다. 스키터가 당시로는 드물게 자립을 위해 뉴욕으로 떠나고, 미니는 폭행을 일삼는 남편으로부터 떠나며, 아이빌리는 자신을 도둑이라 내모는 백인 주인집으로부터 떠난다는 결말이었는데, 도무지 현실감 없어 보였다. 그땐 절대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으니까. 생각을 해내고, 그것에 맞춰 행동까지 옮기는데는 한 세대는 아니라도 10년은 더 넘게 걸리는 법이다. 그런면에서 이 소설속의 이야기는 지금에서나 가능한, 환타지적인 성격이 농후한 책이었다. 현실속에서는 대체로 벌어진 적이 없는... 그래서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더 아쉬운, 그런 환타지 말이다. 굳이 미국의 환타지를 읽으면서 흑백 편견을 타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애매작으로 넣는다.
그러게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풀어가야 한다는게 맞지 싶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절대 그 심정을 모른다는 말이다.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자신이 당해보지 않은 한 결코 그 심정을 알길이 없는 것이니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이해가 된다. 왜 작가가 남녀 평등이나 자립에 관한 문제에선 그토록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면서도, 흑인들의 문제에 관해서는 어설퍼 보였는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자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작가의 포부와는 달리 상상력과 의도 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었고. 다음번엔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풀어낸 책을 내주길 기대해 본다. 착하단 소리는 듣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가식적이라거나 위선적이라는 소린 듣지 않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