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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두는 여자
베르티나 헨릭스 지음, 이수지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소설 <<체스 두는 여자>> 엘레니가 프랑스의 우아한 삶을 꿈꾼다면, 나는 그녀가 사는 푸른 바다와 강렬한 햇살이 눈부신 지중해를 꿈꾼다. 그곳에선 왠지 그 바다와 같은 색 치마를 입고 앞치마를 두른 뒤 하얀 침대 시트를 빨래줄에 널고(내가 아무리 집안일을 싫어한다 해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녀야 할 것 같다. 휴양이 아닌 그들 속의 일상을 살아야 어울릴 것 같은 느낌.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매일 똑같은 일과를 해야만 하는 것. 특별한 일 없이 마치 하루라도 청소를 하지 않으면 집안에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그렇게 매일 쌓이고 쌓이는 것. 우리는 그런 일상을 살아내며 간혹 탈출을 꿈꾸기도 하지만 편안함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곤 한다.
그런데 엘레니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의 일상 속에 그저 툭! 하고 떨어진 것 같은 '체스'. 그녀가 꿈꾸던 우아한 프랑스 부부의 일탈 속에 속했던 체스가 이제는 엘레니에게 들어왔다.
엘레니는 "늙어가는 부모님과 사춘기 자녀들 사이에 끼인 나이, 길을 지나가면 더는 남자들이 뒤돌아보지 않는 표류하는 나이, 여자들이 더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부러워 할 게 없는 나이"(...13p)인 마흔 두 살이다. 남들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할 수는 없어도 남편과는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엘레니의 계획은 남편의 생일에 체스판을 선물하고 그 프랑스 부부처럼 우아하게 체스를 두는 것이었다. 그것 뿐이었다. 자신이 꿈꾸던 어떤 장면을 그대로 해보고 싶은, 열정을 가진 계획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체스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겐 조금씩 체스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
"그 묘한 현혹, 다른 세계에 빠져드는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비밀스러운 도피, 여태 경험하지 못한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표출되는, 오직 그녀에게만 속한 삶의 일부를 묘사할 단어들이 엘레니에겐 없었다. "...56p
그리스의 아주 작은 섬, 낙소스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무척이나 폐쇄적인 듯하다. 마치 우리의 동떨어진 시골 마을을 보는 듯 그 주민들의 엘레니에 대한 반응은 뜨겁거나 매우 차갑다. 그들만의 전통에서 벗어난 행동(도대체 무엇이, 체스가? 어째서 체스는 남자들만 두는 것이고 한낱 호텔 룸메이드인 그녀가 두는 것이 안된단 말인가!)을 하는 엘레니를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녀의 남편도 엘레니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도전쯤으로 받아들였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주부로서, 아주 작은 세계에 갇힌 여자가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과정은 가히 감동적이다. 그런 그녀를 왜, 어째서 격려해주지 않는 것일까. 새로운 열정에 빠진 도전이 일상에 대한 거부는 결코 아니다. 때문에 그녀에게 힘이 되는(실질적으로든 호텔 주인처럼 자신만의 생각만으로든) 인물들에 대해선 무한한 애정이 생긴다.
엘레니는 낙소스섬을 벗어났다. 자신만의 틀에서 밖으로 나왔다. 사회적 통념이 그녀에게 거는 모든 기대를 벗어버리고 자신만이 원하는, 집중할 수 있는,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을 향해 앞만 보고 전진했다. 비록 그녀 스스로는 잘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결국 모든 이들이 그녀를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는 당신이 자랑스러웠을 겁니다."...19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