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즘의 역사
조르주 바타이유 / 민음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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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자신의 동물성에 대해 혐오한다. 인간은 자신이 나온 곳, 그 자연을 부끄러워한다. 위대한 가족, 훌륭한 가족이라는 말은 우리의 더러운 태생을 교묘하게 숨긴 것 외에 달리 무엇일까. 우리는 오물들 사이에서 태어난다.

 인간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려 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미미해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조건으로 차이를 둘 수 밖에 없었다. 동물과 인간은 모두 배설을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수치스러워 하고 은폐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배설물에 대한 수치심을 길러준다.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아기들은 그것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배설물을 먹기까지 한다. 인간은 성적 분비물 또는 배설물에 공포감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죽음, 시체에 대해서도 공포를 갖는다. 배설물과 시체의 성격은 유사하다. 그 둘은 모두 금기의 대상이다. 죽음은 탄생과 반대편에 있다. 하지만 죽음은 최종적으로 탄생의 조건이자 예고이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연은 거부된다. 그러나 일단 거부된 자연은 더 이상 거부할 이유가 없다. 이제 인간을 구속하는 것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자신이 자연과 구분되기 위해 만들었던 ‘금기’이다. 에로티즘은 금지된 곳에서 발생한다. 역겨울 정도로 거부되었던 것은 이제 욕망된다. 이것이 에로티즘의 이중성이다. 에로티즘은 우리를 혐오감에서 욕망으로 향하게 한다. 에로티즘은 혐오스런 대상과 공포를 추구한다. 그것들로부터의 희열이다. 우리에게 희열을 주는 공포는 ‘신성한 공포’이다. 인간의 지성은 지성을 넘어서는 것을 ‘신성’하다고 이름 붙였다. 신성한 세계에는 욕망과 공포가 조화롭게 황홀의 상태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공포는 언제나 유혹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치명적 매력의 여인은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은 가장 큰 상실을 요구한다. 욕망은 이익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잉여를 소비하는 것이다. 소모, 소진, 죽음이다. 존재는 언제나 무모한 모든 가능성을 탐험한다. 그런 불가능에 대한 고집스런 도전, 텅 빈 것에 대한 추구. 니체가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 ‘무’를 욕망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권능에서 무능으로, 존재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더 많이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적 열병의 순간에 이르면 우리는 전혀 반대로 행동한다. 우리는 무턱대고 힘을 조비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아무 소득 없이 무제한적으로 낭비한다. 헛되게 낭비할 때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죽음에의 충동,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찾아 나선다.

 욕망의 형태는 항상 일상적 필요성의 규칙에 예속되지 않은 형태이다. 본질적으로 욕망의 대상은 욕망에 답하는 것 외에 이 세상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 욕망의 대상, 소유의 대상인 여자는 나태해야 한다. 공장의 노동에 매달리는 여자는 거칠며 그래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동물들은 기관을 직접 자극하지만 인간의 자극은 이처럼 상징적 형상을 거쳐온다.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분비물이 아니라 여성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정교한 이미지다. 여성성은 에로티즘의 대상을 매혹적이고 부드러운 형태들로 환원시키는 일을 한다.

 인간의 성 생활은 합법의 영역이 아닌 저주, ‘금기’의 영역에서 비롯된다. 결혼은 일종의 위반이다. 그것을 제도화해서 위반을 은폐하는 것이다. 에로티즘은 위반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성 행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된다. 성적인 것과 관련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어떤 의미에서 결혼은 금기와 관능을 결합시켜 주는 것이다. 결혼 상태는 동물적 욕구의 자연스런 충동과 대립되는 금기의 ‘존중’이라는 진정한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사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만역 여자들이 소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욕망의 대상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여자의 사용권은 어떤 씨족의 남자들에게 배타적으로 이전, 양도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제물의 의미와 이웃해 있었다. 여자들은 신성한, 또는 사치성 재물이었다. 희생 제의에 바쳐졌던 제물들과 마찬가지로 제물에는 위반의 요소가 있다. 제공된 대상들의 파괴나 파손, 또는 태워 없애는 것은 위반의 가장 뚜렷한 형태이며 그것들은 가장 사치스럽게 사용될 때만이 최상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유용성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속적 삶은 언제나 위반을 기다린다.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 오빠가 위반을 위해 여자를 내줄 때 결혼은 가능한 것이다. 어떤 여자를 내가 사용하기를 포기하면(근친) 다른 사람이 그 여자를 사용하고, 그러면 다른 어딘가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포기된 여자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근친상간의 금기는 일반적으로 열성 아이를 낳는다거나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허구적 제도로서 인간의 성 행위의 불안, 공포를 은폐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어느 부족에서 사촌 관계에 있는 아이들, 예컨대 아버지의 아이와 누이의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는 금기를 적용 받지만 다른 곳에서는 장려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혈통에 의한 친족 구조는 결혼을 금지하는 것일 수도 있고 결혼을 장려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에로티즘의 경제는 일반 경제의 틀을 깬다. 그것은 증여이다. 경제적 이득이나 혜택이 목적이 아니다. 성 행위는 에너지를 바치는 것이다. 증여는 제공된 대상을 파괴하는데 전적인 파괴는 마력이 있다. 이 사치품은 노동의 파괴라는 역설을 담고 있다. 의식적 교환에서 어떤 물건을 바치는 일은 그것을 생산 회로에서 제외시키는 행위이다.

 개인적 사랑은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그 순간에 가능해지는데 그것은 사회 질서와 대립적인 경향이 있다. 개인적 사랑의 대상은 그 자체로 소모이다. 사랑은 오직 소비를 위해서 오직 쾌락에 쾌락을 더해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기 위해서 연인들을 결합시킨다. 연인들의 사회는 소모의 사회이다. 그에 반해 국가는 취득의 사회이다.

 무제한적 에너지의 소비, 말하자면 우리는 공포, 고뇌, 슬픔, 죽음을 찾아 나선다. 인간은 무질서, 악덕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자율적인 주체는 다른 아무것과도 관계가 없는 지대, 형태도 형식도 없는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고뇌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뇌를 끌어안고 싶어 하며 우리 안에 간직하고 싶어 한다.

 바타이유는 인간의 성 행위를 고찰하되, 에로티즘의 세계가 지적 세계와 동등한 차원에서 서로 만나서 보충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로서 동물과 다르게 성행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금기’이다. ‘금기’ 안에서 에로티즘은 작동하며 그것은 이중적인 양태를 띠고 있다.

 자신의 본능을 거부하면서 욕망하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인간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금기가 없다면 동물과 다르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억압이나 금기로부터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인간은 금기로부터 해방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금기가 없이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등극되지 못한다. 인간은 그것을 참아낼 수 없었다. 인간은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유로운 동물적 본성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물적 본성을 은폐하기 위해서 ‘금기’가 필요한 것이다.

 대뜸 결론으로 들어가서,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은 과도한 에너지, 사치이며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전쟁이라고 말한다. 과도한 에너지는 전쟁이라는 재앙에 사용될 수도 있다. 에로티즘은 비록 미미하나마 그것의 역사로 보건대 아무튼 군사적, 정치적이다. 수비 측은 수비할 수 없는 입장을 지키고 공격 측은 공격할 수 없는 입장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두 진영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싸워서는 우리가 딛고 설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옮긴이(조한경)에 의하면 바타이유는 금기와 위반으로서의 에로티즘에 천착하고 있다. 인간을 만들어 온 것은 바로 금기와 위반으로서의 에로티즘이었다. 그에게 금기의 위반은 위반을 위한 위반이다. 금기를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야말로 욕망의 욕망, 즉 허구인 것이다. 그러나 그 허구를 통해 인간은 인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지 않고는 인간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바타이유는 훗날 푸코와 데리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바타이유는 꼭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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