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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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재밌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단순 명료하게 설명해야 할 때가 있다. 선생님, 좌파가 뭐에여? 우파가 뭐에여? 글쎄,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마침 그때 김어준을 우연히 만났다. <닥치고 정치>. 김어준, 그에 의하면 ‘우’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이해한다. 그래서 일단은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죽고, 옆 사람이 살면 뭐하냐는 식이다. 그래서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에선 자신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게 도저히 죄가 될 수 없다. 고로, 그들에게 사유재산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결사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삶의 터전을 주셨다. 그 ‘터’는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지가 아니었을까. ‘터전’의 사유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혹은 언제부터? 어떤 사람이 땅을 개간하여 수확을 했다면 그것은 누가 가져야 할까. 노동을 투입한 사람이 가지는 게 맞지 않을까. 그 사람은 자기의 ‘이익’에 의해 땅을 개간했고, 그래서 그것은 ‘자기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근면, 성실하게 일하라.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이 부유해지면 나아가 ‘국가’도 부강해진다. 이러한 논리는 아담스미스와 만나, <국부론>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고전 경제학에서 말하는 노동가치설(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이다. 참고로 맑스는 잉여가치설을 주창했다.


개인의 이익에 따라 노동하고 행동하라. 그리고 ‘부’를 축적하라.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마라.


이런 논리는 결국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 아닐까. 김어준이 말하는 것처럼 ‘우’가 기본적으로 세계를 전쟁터로 본다면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는 승자독식 사회, 의자뺏기 게임을 멈추지 않는 야만 사회에서 우리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자신을 개발해라.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가치는 없다. 그저 ‘나’만 살면 된다. 그것은 ‘웰빙’으로 이어진다. 이 땅에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화두가 된지 오래다.


내가 잘 살면 곧 모두가 잘 사는 것이라고 대응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이건희의 재산을 쫓아갈 수 없다. 이건희가 잘 살지는 모르지만 99%의 노동자들은 잘 살고 있지 못하다. 일할수록 궁핍해지는 노동자들의 삶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은 항상 나태해지지 말고 일하라고 주문한다. 열심히 살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지 마라. 남 탓하지 마라. 정권 탓하지 마라. 


김어준에 의하면 그들에겐 노력만으론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사회구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청소부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가난한 게 아닌데, 그런 건 관심 없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무능으로 환원시킨다.


오늘, 우리는 ‘이익’에 따라 살고 모든 문제를 ‘경제’로 해결하려고 한다. 과거에 정치는 윤리적인 문제와 결합되어 있었다. 정치는 곧 ‘선’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근대 이후) 정치는 ‘이익’만 실현하면 된다. 윤리적이지 않더라도 ‘돈’이 된다면 괜찮다.


요즘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열에 아홉은 ‘부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우리 땐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설사 진심이 아니더라도 소방관이 되어서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나’ 아닌) 구해주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들은 당당하다. ‘나’만 살면 되니까. 약육강식이니까. ‘너’는 죽든 말든.


김어준에게는 이런 문제 의식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는 세계관이 아니다. 그저 동물적 ‘반응’일 뿐이다. 유아적이라는 얘기. ‘북’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세계를 전쟁터로 보는 ‘우’에게 북한은 말그대로 ‘불확실성’ 그 자체다. 그 공포를 가장 손쉽게 처리하는 방식 중 하나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무섭다고 말하는 대신 나쁘다고 말하기.


그렇다면 그에게 좌는 뭘까.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시장 아주머니들은 모른다. 한마디로 혼잣말 하지 말란 얘기다.


또 진보는 대중을 상대할 때 자신들의 율법만이 절대선이라고 우긴다. 그리고 왜 너희는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외친다. 회개하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 이런 죄의식 마케팅이 그는 불편하다고 말한다.


‘진보도 강박이 되면 진상이 된다’


이렇게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드물지 않을까.


과거 군사정권은 조직 폭력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뇌에 구김살 없이 청순한 이명박은 금융사기단이다. 밥줄 끊고 생활을 망가뜨린다. 그렇다고 씨바. 쫄지말자. 말하자. 씨바. 라고.


박근혜에게도 잊지 않고 한마디 해주는 센스. 그녀에게 국가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상속받아야 할. 그녀의 국가주의는 사실, ‘아버지주의’이다, 아직 아버지와 분리되지 못한 나이 먹은 그녀에겐 또 결정적으로 ‘생활’이 없다. 취직하고 승진하고 애 낳고 지지고 볶고, 집 사고 늘이고. 이런 일상. 없다. 겪을 필요 없었다. 정치는 결국 생활이 대상이다. 생활이 관념이니 정치도 그녀에겐 관념이다.


박근혜에 대한 대중의 애착은 집단 무의식의 감성적 퇴행이다. 양친을 비명에 보내고 막대한 상속을 부여받은 엄청난 부호. 이런 이미지는 여성으로서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일상과 생활로부터의 자유, 바로 이 대중적 판타지를 그녀는 먹고 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은 것이다.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웬만한 정치인은 상대도 안하는 권력자.


달동네 우파, 비정규직 우파라는 웃지못할 비유가 있다. 서민들이 기업가, 자본가의 편에서 정치를 하는 정당을 찍어주는 것이다. 왜일까. 부자 만들어 준다고 하니 전부다 찍어줬다. 부자되면 가난한 자, 약자들을 다시 또 패대기쳐버리려는 심산이다.


어느 누구도 이런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반성하자. 스스로. 그리고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자.


비판적으로.


김어준은 구체적 삶이 중요하다고 한다. 271쪽. ‘진보진영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그거다. 내가 직접 겪고, 구체적으로 절박한 일상의 사람들이 애처롭거나 그들에게 미안하거나 해서 만들어진 게 진보 정당의 정책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하다고 규정함으로써 그 가난을 강화시키는 것은 그들이다. 가난을 전시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사람들은 그래, 저런 사람들도 살아. 라는 일종의 위안을 얻는다. 뭔가 꺼림직한 뒷거래. 이런 논리로부터 벗어나자. 벗어나 보자.


머리가 나빠서 내겐 답이 없다. 같이 고민해 보자. 무책임하게 이렇게 글을 끝내는 사람에게 어떤 대안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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