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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개청춘 - 대한민국 이십대 사회생활 초년병의 말단노동 잔혹사
유재인 지음 / 이순(웅진) / 2010년 2월
절판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시집을 먼저가 어른 행세 하고 있는 여동생이 몇일 전 전화를 했다. 여군이라는 다소 범상치 않다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보니 일반적인 업무와는 조금 다른 일들을 하고 있고,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살다보니 여자들만 가지는 특유의 스트레스를 이해받지 못하는 고달픈 처지에 놓여있는 여동생. 그녀는 직장생활 때려치우고 백수생활을 영위중에 있는 나보다는 심적으로 힘겨웠던지, 과감하게 언니를 제치고 먼저 시집가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결혼생활이라는 것도 100% 위안이 되진 못했던지 요즘들어 유난히 골골대고 심적으로 힘겨워 하던차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화말미에 이런 말을 달았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그리고 이틀후에 동생은 집에 왔다. a형간염이라는 최신 유행질병을 달고 입원을 핑계삼아 말이다. 일단 동생님이 병환으로 몸져 누운지라 전염성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은 병실을 지키리라 다짐한 나는 몇권의 책을 챙겨 목포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책 중에는 바로 이 책, 위풍당당 개청춘이 있었다.

위풍당당 개청춘이라는 책의 제목과, 유재인이라는 남녀 성별이 조금은 모호하다면 모호한 책을 챙겨넣을 때에만 해도 나는 이 책의 작가가 당연히 남자일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청춘이라니.... 분명 여성작가가 붙이기에는 어딘지 조금은 지나치게 과감하고 무언가 억세다는 느낌을 충분히 전달하는 단어가 아니던가, 하지만 나의 이런 예상을 무참히 깨고, 이 책의 작가는 여성이었다. 그것도 1999년 수능을 치룬, 나보다 2년 늦게 태어난, 현재까지도 a형 간염의 투명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나날히 떨어지는 간수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바로 그 나의 여동생과 동갑인 작가, 개청춘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한권의 책에 자신있게 사용할 수 있는 대담성과 장부기질을 백분 발휘할 수 있는 작가가 펼치는 그녀의 청춘일기는 그래서 처음부터 신선하고 즐거우며, 놀라울만큼 담백하게 느껴졌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 백수생활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녀의 청춘일기는 곧 그녀의 직장생활로 이어지고, 작거나 혹은 큰 그녀의 이러저러한 사건들은 사실 그녀 개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비슷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느끼고 한번쯤은 속으로 삭히거나 내뱉은 푸념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모든 것이 풍족해지기 시작한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의 특별한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으나 별거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청춘의 한때, 아름답고 선명한 컬러감으로 가득찬 세상만을 꿈꾸다 막상 발을 내딛은 현실이 화려하고 평화로운 수채화이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흑백내치는 피만 붉게 표현되는 쿠엔틴 타란시노식 B급 영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 청춘들의 모습은 바로 그녀의 모습이자, 나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다. 너무도 솔직해서 때로는 박장대소를 하고 때로는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그 모든것이 그녀처럼 그 모습 그대로 청춘을 보내고 있는 나의 모습이기에 가능한 공감. 나 대신 세상을 향해 그래도 나는 당당하다고 외쳐주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한 책이 바로 이 책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촉망받는 꿈나무로 태어나 원대한 꿈을 향해 터벅터벅 무게감 있는 발걸음을 내딛기는 커녕, 겨우겨우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만큼을 따라가는 것도 힘겨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그녀와 나의 여동생, 그리고 내가 속한 이 세대의 청춘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망보다는 나 스스로의 실망을 감당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현실을 바로 보고, 내 원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끔은 주는 것보다 받는것이 턱없이 모자른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청춘은 이름처럼 푸르르게 유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청춘이 푸르른 것은 그 푸르름에 색이 빠지고 다른 세상들의 색처럼 희미해지기까지의 과정을 견뎌내기 위한 일종의 비축된 필수영양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 때려치우고 바닥에 앉아 울며불며 통곡하기 보다는 푸르름을 조금 포기하고 세상에 녹아드는 것이 청춘의 푸르름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방법인지도 모를일이다.

위풍당당 개청춘은 그래서 무작정 인생의 낙관론을 주장하는 백만권의 자기계발서보다 사실적이고, 근거없는 희망과 무지개 너머 원더랜드를 꿈꾸며 비현실적인 이상향만을 강요하는 교과서보다 교훈적이다. 비록 병실에 가져갔다가 간염균과 싸우고 있는 환자앞에서 미친듯히 웃게 만들긴 했지만, 그 웃음속에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청춘의 위풍과, 그 당당함으로 남은 세상에서 청춘을 더욱 불태울 당당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 대인배 그녀에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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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아극장>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유모아 극장
엔도 슈사쿠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10년 2월
품절


듣고, 보고, 느끼는 예술의 거의 모든 종류에는 작가의 이름이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아우라가 존재하곤 한다. 누구누구가 만들었다더라 하면 연상되는 일관되는 색감이라든지, 음률이라든지, 주제의식 따위의 것들 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두 사람 세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처럼 마냥 다채롭고 천태만상일수는 없다보니 그 사람의 인생과 인성이 드러나는 문학작품, 음악, 예술에 이름지워지는 이런 일관되는 분위기들은 엄마와 아빠가 각각 한명인 자식들이 비슷한 유전자로 비슷한 성격이나 용모를 가지는 것처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한 작가가 만들어내는 수 많은 작품들에게 부모는 그 작가 한명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책이 나왔을때 그 작가의 이름이 귀에 익거나 눈에 익으면, 더 나아가 한번이라도 그 작가의 작품을 만나본 경험이 있으면 앞선 경험을 토대로 그 작품을 상상한다. '그 작가의 신간이니 이런 느낌일꺼야. 이 작가의 작품은 그런 느낌이었어.' 따위의 방식으로 말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배경을 제공하는 한방이 있다면 문학사적으로 의미를 남기는 수상경력이라든지, 혹은 문단의 평들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

자, 여기 1923년 출생해 일본 문학사에 수 많은 족적을 남기고, 노벨문학상이라는 상의 수상자로도 거론되었을만큼 작품의 무게감과 가치를 인정받았던 작가가 있다. 전쟁과 종교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으로 역사와 사회를 아우르는 깊이있는 문학작품을 남겨 때로는 신랄하게 때로는 깊이있게 세상을 말했던 작가. 이미 세상에 없지만 그 이름만은 오래토록 남을 그런 작가 말이다. 그 작가의 작품을 당신에게 내어놓으며 읽어보라 권했을때 당신은 어떤 작품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라는 것을 할까?

유모아 극장은 바로 그런 수 많은 이력을 자랑하는 뛰어난 작가가 만들어낸 상상이상의 즐거움을 담아내고 있는 책이다. 마치 자신의 모든 이력들 앞에 " 왜? 난 이런거 쓰면 안돼?"라고 반문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볍고 유쾌하며 기발한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 어이없어 웃고, 황당해서 웃고, 즐거워서 웃는 웃음을 한가득 실어 보낸 이야기 말이다.

유모아 극장은 총 12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있다. 표지만 보아서는 이것이 단편소설집인지, 만화책인지 알 수 없을만큼 시작부터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의 이름에 의문을 달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그 안쪽에 담고 있는 짧막한 몇편의 이야기들 안에서도 일관된 것이라서 유모아 극장이라는 책의 이름과 익살맞은 표지, 그리고 그 내용들과 어울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작가의 이름과 작가의 이름으로 책을 상상한 독자의 기대감 뿐이라고 해야할 정도. 그만큼 기발하고 상상력 가득한 유머들이 가득들어찬 책이기도 하다.


남몰래 사모했던 한 여인의 몸 속으로 들어가 갇혀 온갖 보고 싶지 않은 몸속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어버린 의사라는 당혹스러운 설정부터 경쟁에 불을 붙인 여자들의 심리까지 말할 수 없기 가볍고 한없이 황당하기만한 이야기들을 만나며 예전에 가지고 있돈 엔도 슈사크라는 작가의 이미지에 즐거움을 더하게 되는 기쁨과 함께, 그 소설이 아주아주 오래전에 씌여진 그래서 1990년쯤이면 사람 몸속으로 들어가 수술하는 것도 가능할것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한 기발한 작가의 특이한 면모를 만나게 되는 것 또한 유모아 극장이 가져다 주는 플러스 알파의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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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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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무엇인가를 원하고, 이루고, 쟁취하고, 도달하는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 혹은 인간이라 불리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일래 한평생을 내달리고 치열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진정으로 인생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의문을 품자면 그 끝을 알 수 없을정도로 막연해지는 의문들에 대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답을 내어놓으며 인생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대답, 혹은 당신의 인생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했는가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답이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해주는 제목을 가진 책이 바로 휴먼 스테인이었다.

휴먼스테인은 콜먼실크라는 노 교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업을 참석하지 않던 학생을 지칭하며 사용했던 단 하나의 단어가,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도로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학교의 총장으로서 뛰어난 업적과 개인적인 성공을 이루고도 인종차별주의 교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학교에서 사퇴해야했던 콜먼, 콜먼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전쟁을 치루는 동안 그는 그의 아내 아이리스를 잃고, 결국 그가 그의 손으로 임용했던 수 많은 교수들에게 단 한조각의 지지도 얻지 못한채 불명예로 가득찬 사회의 외진 곳으로 내몰린다. 언제나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눈길을 끌고, 최초의 유태인 총장으로 학교의 변화를 이끌며 존경을 받았던 콜먼은 단 한순간의 실수로 사회적 명성과 지위도, 가족도, 그리고 그의 아이들과 그 자신도 지켜내지 못한채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추락한 콜먼에게는 명예와 자부심 대신, 억울함으로 가득찬 분노만이 남고, 그 분로를 풀어내기 위해 주커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내려 한다. 주커먼은 콜먼에게 성공과 확신으로 가득찼던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단 하나의 오점(잘못된 단어 선택으로 만들어진 오해)을 지워줄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커먼은 콜먼의 인생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은 유일하게 존재하는 콜먼의 관객이 된다.

소설로서 자신의 인생에 남겨진 오점을 지우려 했던 콜먼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 분노마저도 무덤덤하게 만들어버릴 변화, 자신이 일했던 대학에서 일하는 30대 여성 포니아와의 밀회가 그에게 과거의 오점에서 자유로워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포니아, 글을 읽을 줄 모르고, 어린 시절부터 성적으로 학대당해왔으며, 집을 나온 후에도 포악한 남편으로 인해 기절할만큼 매질을 당했던 여인에게, 저명한 대학교수이자, 명예와 지위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었던 노 교수가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성과 교양으로 이루어진 위안이 아닌, 가장 원초적이고 그래서 가장 자연스러운 성적인 관계를 통한 위로. 그것만으로 콜먼은 다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을만큼 완벽한 자유를 얻는다.

휴먼 스테인에는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노 교수 콜먼과, 그의 학교에서 일하던 문맹의 여인 포니아를 중심으로 그들을 둘러싼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콜먼의 과거부터 현재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포니아의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에 존재하는 사람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뭉쳐지고 더해져 한덩어리의 커다란 무게가 되어 콜먼과 포니아의 배경을 이루고, 그 배경에는 각자 다르지만 모두 같은 사연들이 섞여 있다. 바로, 완벽하지 못한 인간의 오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 진실에 대한 사연들 말이다.

흑인이라는 자신의 오점을 가리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로 인해 결국에는 얻은 모든 것들을 잃어야했던 콜먼의 개인적인 모습에서부터 콜먼으로 대변되는 인종차별과 포니아의 남편인 레스로 설명되는 전쟁이라는 문제, 그리고 델핀 포가 놓여있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자기혐오까지 수 없이 많고 많은 사회적 오점을 끌어안고 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그것이 바로 휴먼스테인이 작게는 바로 당신에게 묻는 질문이요, 크게는 사회에 대해 내뱉는 통렬한 비판인것이다.


인간의 오점이라는 조금은 노골적이고 껄끄러운 제목.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60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2권 분량의 이 책에 담긴 질문이자 답이었다. 완벽하지 못하기에, 스스로의 오점을 깨닫는 순간, 그 오점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인간이라는 존재, 하지만 그 바람과 오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이 집착이 되고, 다시 그 집착이 인간의 완벽하지 못한 사고와 만나 영원이 빠져나올수 없을지도 모르는 더욱 큰 오점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는 악순환에 대해 콜먼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려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휴먼스테인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내려고만 한다. 그 누구도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은채 사회가 자신에게 남긴 오점, 그것만을 비판함으로서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오점에 대해 나만이 결백하다는 주장. 책의 어느 부분에 나왔던 표현처럼 홀로 신성한 처녀인척 하는 오점으로 가득한, 아니 어쩌면 오점 그 자체인 인간의 변명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휴먼스테인인것이다.

누구나 완벽할 수 없는 사회에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벽해지는 방법은, 어쩌면 자신의 작은 오점을 인정하고, 오점이 있는 인간으로서의 불안정한 삶을 그 자체로 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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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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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한 두가지쯤은 잊고 싶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간다. 때로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조금 더 행복하게, 조금 더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과거는,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전체를 흔들어대는 강한 바람이 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승자의 훈장이 되기도 한다.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그 고통스러웠을 지도 모르는 과거의 시간들을 이겨내느냐, 아니면 흔들린채로 휩쓸려가버리느냐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누군가는 과거의 아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인생 전체를 허비하는 덫에 걸리는 것. 그것은 과거라 불리우는 그 시간이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이음새이기 때문이고, 언제가는 마주서야 할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야기의 시작을 애너벨리라는 애드가 엘런 포의 시에서부터 풀어낸다. 그리고 어린시절 보았던 애너벨리라는 영화를 기억하며 오랜 세월동안 애너벨리라는 시를 안고 살아왔던 소설가 겐자부로가 어린시절의 그 영화에서 애너벨리의 역을 맡고 있던 아역배우 출신 사쿠라와 인연이 닿게 되면서 이야기는 두 사람의 과거로 빨려들어간다. 70의 나이에 이르른 노 소설가가 기억하는 30년전의 자신과 30년전의 아름다운 사쿠라, 그리고 애너벨리라는 이름으로 묶인 두 사람의 더욱 오래된 과거에 대한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노년의 곤경에 빠지게 된 나이가 되어버린 겐자부로의 현재에 이르러서야 기억하고 꺼내어들어 대면하고 풀어낼 수 있는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열일곱살의 겐자부로가 보았던 애나벨 리, 그리고 30년 전의 겐자부로 앞에 서 있던, 애나벨리를 연기했던 사쿠라, 노년의 삶으로 접어들고 있는 현재의 여배우 사쿠라에 대한 이야기와, 그 모든 시점의 겐자부로의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서로 닿아있던 인연인듯 현재까지 이어져 오며 끝내는 그 마무리를 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과거와, 그 과거를 시작으로 위엉킨 또 다른 과거, 그리고 그 모든 과거들을 이겨내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까지 걸어나가는 한 여인의 인생을 말하기 위해 쓰여진듯한 인상을 주는 이 책은, 그래서 무엇보다 애너벨리라는 애드가 엘런 포의 시가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의 열쇠가 바로 그 한편의 시에 담겨 있고, 그 열쇠로 열어야 하는 문 역시 동명의 영화안에 단서를 남기기 때문이다.

애드가 앨런 포의 애너벨리라는 시는, 검은고양이라는 추리소설로 유명한 애드가 엘런 포의 실제 사랑에 대한 시이다. 애드가 앨런 포 자신이 14살 차이가 나는 아내와 결혼을 했고, 그의 아내가 곤궁한 인생을 너무도 빨리 떠나갔음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시. 고달프고 힘에 겨웠으나 그랬기에 더욱 진실했고 아름다웠던 그녀와 자신의 사랑에 대한 회한을 담은 마지막 추모곡이 애너벨리라는 제목의 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 안에서 애너벨리는 애드가 앨런 포의 아내를 의미하며 동시에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에서는 애너벨리를 연기하는 사쿠라를 의미하게 된다. 영원한 소년과 소녀로 남아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앨런 포의 바람을 담은 한편의 시와, 그 시에서 모티브를 얻어 사쿠라에게 애너벨리의 순수함을 설정시키고, 자신에게는 앨런 포의 무한정한 사랑과 그를 질투한 천사의 역할을 모두 부여한 사쿠라의 남편 데이비드, 그들이 만든 애너벨리라는 영화가 훗날 그 영화로 인해 기억하지 못하는 고통의 기억을 가지게 된 사쿠라와 영화 속 사쿠라를 기억하는 겐자부로를 하나의 인연으로 묶어주는 것이다. 여기에 겐자부로와 사쿠라를 한데 묶게 해준 미하엘 콜하스의 봉기를 소재로 한 영화 제작 계획이 더해지면서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는 단순히 사쿠라의 잃어버린 고통의 기억만을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겐자부로의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잡은 자신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그리고자 했던 고향의 민중봉기에 대한 진실까지도 끌어다 놓는다.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는 많은 부분에서 겐자부로와 사쿠라를 동일한 위치에 끌어다 놓는다. 어린 시절의 가장 두려웠던 기억을 상실한채로 그 기억에 매달리듯 살아온 사쿠라와, 자신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던 환생한 메이스케와 메이스케의 어머니에 대한 연극의 마지막을 잃어버린 겐자부로. 가장 고통스러웠기에 기억에서 몰아낸 과거의 한 조각을 찾아 그 남은 시간을 돌고 도는 사람들의 모습을 두 사람의 다른 듯 같은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두 사람의 인연과 정신적인 교감이 그들이 원래 하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혹은 하나의 영혼을 나누어 가진 소울메이트였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듯..

오랜 시간을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살아온 과정 또한 달랐던 두 사람에게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로 만들어진 그들만의 유대감은 영화안에 각자 다른 인물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자신의 과거를 찾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의 문학작품과, 그들이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의 영화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맞딱드리게 되는 사쿠라와 겐자부로. 그들은 한번도 같은 곳에서 살아온 적이 없었지만 이미 미하엘 콜하스의 이야기에서, 혹은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환생한 메이스케에 대한 영화 안에서 함께인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들이 잊어버렸던 그 한부분의 시간들이 실은 자신들이 맞딱드렸을때 가장 고통스러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더 나아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대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인생의 가장 큰 숙제가 그 고통을 마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를 영원히 소녀로 남겨두고 자신은 소년이기를 자처했던 데이비드가 실은 소년과 소녀를 질투한 천사였음을, 민중의 앞에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결국엔 환생한 메이스키의 목숨을 잃고 자신은 윤간까지 당해야 했던 메이스케의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잊어버렸던것도, 그 사실을 마주했을때 느껴야할 그들의 고통과 상실감까지 이겨내야함을 인생의 숙제로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에 대한 그들의 계획은 30년 전의 시간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만나며 중지되고 만다. 그리고 이제 이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노 소설가 겐자부로는 70의 노년기에 접어들어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쿠라와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노년의 그 앞에 환생한 메이스케의 어머니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고자 하는 사쿠라는 30년전의 그녀와는 다르다. 유년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 앞에 싸늘하게 죽어버린 하얀 관의를 입은 영원한 소녀 애너벨리가 아닌,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그 앞에 당당하게 나서 여성이 아닌 한명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히고자 모든 것을 바친 바로 그 메이스케의 어머니로서 살아있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는 그래서 죽은 애너벨리를 애도하는 앨런 포의 시처럼, 한 없는 슬픔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환생한 메이스케의 어머니처럼 고통을 딛고 일어서야만 당당히 마주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사람들의 잔혹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삶에 경의를 표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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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맨
존 그리샴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수첩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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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리샴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내놓는 몇가지 기대되는 사항들이 있다. 긴장감 있는 전개, 쉽세 접할 수 없는 법정 스릴러. 그 동안 존 그리샴이라는 이름의 명작들이 보여주었던 그 몇가지 특성은 존 그리샴이라는 작가에 대한 신뢰를 만들었고, 이제는 그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이런 즐거움들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지게 한다. 그런 존 그리샴의 최초 논픽션. 이 단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그 동안의 존 그리샴에 더한 생동감과 사실성까지 더해진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는 이름의 책, 그 제목은 바로 이노센트 맨이었다. 늘 그래왔듯, 획기적인 사건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법정 스릴러를 펼쳐줄 그가 결백한 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는 것. 제목만으로도 참으로 여러 기대를 동시에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책이기도 했다.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그 사람에 파묻혀 세상의 고단함과는 격리된 듯 꿈꾸며 살아왔던 남자가 있었다. 언제나 힘겹고 숨찬 것들은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에게 떠밀고 자신에게는 온갖 특권만이 허락된 듯 모든 것을 누리려 하던 그 사나이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펼치고 야구선수로서의 실력과 재능을 인정받으며 살고 있는 곳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그들의 기대와 축하를 한 몸에 받으며 점점 진짜 세상과 멀어지는 자신을 알지도 못한채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을 하지 못한채로 나이를 먹는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한번쯤은 생각치 못한 고난과 절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채 말이다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만을 생각하고 바라며 살아온 그. 그래서 그는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도,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도 알지 못했던 것일까?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한번쯤은 찾아온다는 힘겨움에 그는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그의 추락은 그가 재능을 펼치며 살아갔던 야구장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사생활까지 더해져 그를 밑바닥 중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하고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 존경받는 야구인도 사랑스러운 가족의 구성원일수도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린다. 야구인생에서 실패하고, 결혼을 실패하고,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정신능력까지도 상실해버린 그에게 세상은 고개를 돌리고 경멸하고 비아냥대며 불신을 시작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세상의 멸시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다. 더 이상 세상의 호의를 받을 수 없게 되어버린 그에게 살인이라는 치명적인 혐의는 모든 것에서 관여받지 않고 공정하게 수사받고 재판받을 권리까지도 앗아가기 시작한다. 모든 것들이 그를 향해 부정적인 칼날만을 들이밀며 그에게 살인자의 죄목을 종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공명정대라는 절대적인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도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며 누군가를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지극히 편협하고 편견어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노센트 맨은 이전의 삶에서 모든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진 한 남자가 살인사건이라는 치명적인 범죄의 용의자가 되었을때 사람들이 얼마나 편견 어린 시선으로 그를 치우친 저울에 놓고 저울질을 시작하는가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가장 공평한 눈으로 사건 그 자체를 보아야 한느 법조인들부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저없이 불리한 입장의 한 사람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들을 쏟아내는 또 다른 범죄자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모두 사실 처럼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멸어린 시선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이노센트 맨은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고 힘겹게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치 '너는 그들과 다른가?'라고 묻는 이야기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누군가 했다면 자신있게 '나는 다르다.'고 말 할 수 없음을 들켜버린 부끄러움 때문에 말이다. 다행히 이노센트 맨은 이 불행했던 삶을 이유로 범죄자가 되어버린 이노센트 맨을 자유롭게 해준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불합리한 기준이 적용되는 법체계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실화라는 점이다. 우리가 공명 정대하다고 믿고 신뢰하는 그곳도 때로는 편견과 부당한 시선들로 옳지 못한 결정을 내리는 현실. 바로 그 현실에 대해 씁쓸하지만 되짚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언급. 바로 그것이 이노센트 맨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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