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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개청춘 - 대한민국 이십대 사회생활 초년병의 말단노동 잔혹사
유재인 지음 / 이순(웅진) / 2010년 2월
절판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시집을 먼저가 어른 행세 하고 있는 여동생이 몇일 전 전화를 했다. 여군이라는 다소 범상치 않다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보니 일반적인 업무와는 조금 다른 일들을 하고 있고,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살다보니 여자들만 가지는 특유의 스트레스를 이해받지 못하는 고달픈 처지에 놓여있는 여동생. 그녀는 직장생활 때려치우고 백수생활을 영위중에 있는 나보다는 심적으로 힘겨웠던지, 과감하게 언니를 제치고 먼저 시집가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결혼생활이라는 것도 100% 위안이 되진 못했던지 요즘들어 유난히 골골대고 심적으로 힘겨워 하던차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화말미에 이런 말을 달았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그리고 이틀후에 동생은 집에 왔다. a형간염이라는 최신 유행질병을 달고 입원을 핑계삼아 말이다. 일단 동생님이 병환으로 몸져 누운지라 전염성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은 병실을 지키리라 다짐한 나는 몇권의 책을 챙겨 목포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책 중에는 바로 이 책, 위풍당당 개청춘이 있었다.

위풍당당 개청춘이라는 책의 제목과, 유재인이라는 남녀 성별이 조금은 모호하다면 모호한 책을 챙겨넣을 때에만 해도 나는 이 책의 작가가 당연히 남자일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청춘이라니.... 분명 여성작가가 붙이기에는 어딘지 조금은 지나치게 과감하고 무언가 억세다는 느낌을 충분히 전달하는 단어가 아니던가, 하지만 나의 이런 예상을 무참히 깨고, 이 책의 작가는 여성이었다. 그것도 1999년 수능을 치룬, 나보다 2년 늦게 태어난, 현재까지도 a형 간염의 투명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나날히 떨어지는 간수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바로 그 나의 여동생과 동갑인 작가, 개청춘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한권의 책에 자신있게 사용할 수 있는 대담성과 장부기질을 백분 발휘할 수 있는 작가가 펼치는 그녀의 청춘일기는 그래서 처음부터 신선하고 즐거우며, 놀라울만큼 담백하게 느껴졌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 백수생활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녀의 청춘일기는 곧 그녀의 직장생활로 이어지고, 작거나 혹은 큰 그녀의 이러저러한 사건들은 사실 그녀 개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비슷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느끼고 한번쯤은 속으로 삭히거나 내뱉은 푸념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모든 것이 풍족해지기 시작한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의 특별한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으나 별거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청춘의 한때, 아름답고 선명한 컬러감으로 가득찬 세상만을 꿈꾸다 막상 발을 내딛은 현실이 화려하고 평화로운 수채화이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흑백내치는 피만 붉게 표현되는 쿠엔틴 타란시노식 B급 영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 청춘들의 모습은 바로 그녀의 모습이자, 나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다. 너무도 솔직해서 때로는 박장대소를 하고 때로는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그 모든것이 그녀처럼 그 모습 그대로 청춘을 보내고 있는 나의 모습이기에 가능한 공감. 나 대신 세상을 향해 그래도 나는 당당하다고 외쳐주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한 책이 바로 이 책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촉망받는 꿈나무로 태어나 원대한 꿈을 향해 터벅터벅 무게감 있는 발걸음을 내딛기는 커녕, 겨우겨우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만큼을 따라가는 것도 힘겨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그녀와 나의 여동생, 그리고 내가 속한 이 세대의 청춘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망보다는 나 스스로의 실망을 감당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현실을 바로 보고, 내 원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끔은 주는 것보다 받는것이 턱없이 모자른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청춘은 이름처럼 푸르르게 유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청춘이 푸르른 것은 그 푸르름에 색이 빠지고 다른 세상들의 색처럼 희미해지기까지의 과정을 견뎌내기 위한 일종의 비축된 필수영양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 때려치우고 바닥에 앉아 울며불며 통곡하기 보다는 푸르름을 조금 포기하고 세상에 녹아드는 것이 청춘의 푸르름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방법인지도 모를일이다.

위풍당당 개청춘은 그래서 무작정 인생의 낙관론을 주장하는 백만권의 자기계발서보다 사실적이고, 근거없는 희망과 무지개 너머 원더랜드를 꿈꾸며 비현실적인 이상향만을 강요하는 교과서보다 교훈적이다. 비록 병실에 가져갔다가 간염균과 싸우고 있는 환자앞에서 미친듯히 웃게 만들긴 했지만, 그 웃음속에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청춘의 위풍과, 그 당당함으로 남은 세상에서 청춘을 더욱 불태울 당당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 대인배 그녀에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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