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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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한 두가지쯤은 잊고 싶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간다. 때로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조금 더 행복하게, 조금 더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과거는,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전체를 흔들어대는 강한 바람이 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승자의 훈장이 되기도 한다.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그 고통스러웠을 지도 모르는 과거의 시간들을 이겨내느냐, 아니면 흔들린채로 휩쓸려가버리느냐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누군가는 과거의 아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인생 전체를 허비하는 덫에 걸리는 것. 그것은 과거라 불리우는 그 시간이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이음새이기 때문이고, 언제가는 마주서야 할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야기의 시작을 애너벨리라는 애드가 엘런 포의 시에서부터 풀어낸다. 그리고 어린시절 보았던 애너벨리라는 영화를 기억하며 오랜 세월동안 애너벨리라는 시를 안고 살아왔던 소설가 겐자부로가 어린시절의 그 영화에서 애너벨리의 역을 맡고 있던 아역배우 출신 사쿠라와 인연이 닿게 되면서 이야기는 두 사람의 과거로 빨려들어간다. 70의 나이에 이르른 노 소설가가 기억하는 30년전의 자신과 30년전의 아름다운 사쿠라, 그리고 애너벨리라는 이름으로 묶인 두 사람의 더욱 오래된 과거에 대한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노년의 곤경에 빠지게 된 나이가 되어버린 겐자부로의 현재에 이르러서야 기억하고 꺼내어들어 대면하고 풀어낼 수 있는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열일곱살의 겐자부로가 보았던 애나벨 리, 그리고 30년 전의 겐자부로 앞에 서 있던, 애나벨리를 연기했던 사쿠라, 노년의 삶으로 접어들고 있는 현재의 여배우 사쿠라에 대한 이야기와, 그 모든 시점의 겐자부로의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서로 닿아있던 인연인듯 현재까지 이어져 오며 끝내는 그 마무리를 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과거와, 그 과거를 시작으로 위엉킨 또 다른 과거, 그리고 그 모든 과거들을 이겨내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까지 걸어나가는 한 여인의 인생을 말하기 위해 쓰여진듯한 인상을 주는 이 책은, 그래서 무엇보다 애너벨리라는 애드가 엘런 포의 시가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의 열쇠가 바로 그 한편의 시에 담겨 있고, 그 열쇠로 열어야 하는 문 역시 동명의 영화안에 단서를 남기기 때문이다.

애드가 앨런 포의 애너벨리라는 시는, 검은고양이라는 추리소설로 유명한 애드가 엘런 포의 실제 사랑에 대한 시이다. 애드가 앨런 포 자신이 14살 차이가 나는 아내와 결혼을 했고, 그의 아내가 곤궁한 인생을 너무도 빨리 떠나갔음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시. 고달프고 힘에 겨웠으나 그랬기에 더욱 진실했고 아름다웠던 그녀와 자신의 사랑에 대한 회한을 담은 마지막 추모곡이 애너벨리라는 제목의 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 안에서 애너벨리는 애드가 앨런 포의 아내를 의미하며 동시에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에서는 애너벨리를 연기하는 사쿠라를 의미하게 된다. 영원한 소년과 소녀로 남아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앨런 포의 바람을 담은 한편의 시와, 그 시에서 모티브를 얻어 사쿠라에게 애너벨리의 순수함을 설정시키고, 자신에게는 앨런 포의 무한정한 사랑과 그를 질투한 천사의 역할을 모두 부여한 사쿠라의 남편 데이비드, 그들이 만든 애너벨리라는 영화가 훗날 그 영화로 인해 기억하지 못하는 고통의 기억을 가지게 된 사쿠라와 영화 속 사쿠라를 기억하는 겐자부로를 하나의 인연으로 묶어주는 것이다. 여기에 겐자부로와 사쿠라를 한데 묶게 해준 미하엘 콜하스의 봉기를 소재로 한 영화 제작 계획이 더해지면서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는 단순히 사쿠라의 잃어버린 고통의 기억만을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겐자부로의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잡은 자신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그리고자 했던 고향의 민중봉기에 대한 진실까지도 끌어다 놓는다.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는 많은 부분에서 겐자부로와 사쿠라를 동일한 위치에 끌어다 놓는다. 어린 시절의 가장 두려웠던 기억을 상실한채로 그 기억에 매달리듯 살아온 사쿠라와, 자신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던 환생한 메이스케와 메이스케의 어머니에 대한 연극의 마지막을 잃어버린 겐자부로. 가장 고통스러웠기에 기억에서 몰아낸 과거의 한 조각을 찾아 그 남은 시간을 돌고 도는 사람들의 모습을 두 사람의 다른 듯 같은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두 사람의 인연과 정신적인 교감이 그들이 원래 하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혹은 하나의 영혼을 나누어 가진 소울메이트였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듯..

오랜 시간을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살아온 과정 또한 달랐던 두 사람에게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로 만들어진 그들만의 유대감은 영화안에 각자 다른 인물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자신의 과거를 찾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의 문학작품과, 그들이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의 영화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맞딱드리게 되는 사쿠라와 겐자부로. 그들은 한번도 같은 곳에서 살아온 적이 없었지만 이미 미하엘 콜하스의 이야기에서, 혹은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환생한 메이스케에 대한 영화 안에서 함께인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들이 잊어버렸던 그 한부분의 시간들이 실은 자신들이 맞딱드렸을때 가장 고통스러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더 나아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대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인생의 가장 큰 숙제가 그 고통을 마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를 영원히 소녀로 남겨두고 자신은 소년이기를 자처했던 데이비드가 실은 소년과 소녀를 질투한 천사였음을, 민중의 앞에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결국엔 환생한 메이스키의 목숨을 잃고 자신은 윤간까지 당해야 했던 메이스케의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잊어버렸던것도, 그 사실을 마주했을때 느껴야할 그들의 고통과 상실감까지 이겨내야함을 인생의 숙제로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에 대한 그들의 계획은 30년 전의 시간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만나며 중지되고 만다. 그리고 이제 이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노 소설가 겐자부로는 70의 노년기에 접어들어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쿠라와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노년의 그 앞에 환생한 메이스케의 어머니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고자 하는 사쿠라는 30년전의 그녀와는 다르다. 유년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 앞에 싸늘하게 죽어버린 하얀 관의를 입은 영원한 소녀 애너벨리가 아닌,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그 앞에 당당하게 나서 여성이 아닌 한명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히고자 모든 것을 바친 바로 그 메이스케의 어머니로서 살아있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는 그래서 죽은 애너벨리를 애도하는 앨런 포의 시처럼, 한 없는 슬픔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환생한 메이스케의 어머니처럼 고통을 딛고 일어서야만 당당히 마주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사람들의 잔혹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삶에 경의를 표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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