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감수정이 떨어지는 나는 시와 소설이 주는 감동에 덜 자극 받는다. 비유적, 은유적 설명을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나 철학적 문장이나 깊은 내면의 성찰을 다룬 글들을 접할 때는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야 겨우 의미를 깨닫는다. 즉 직설적 설명이 아닌 글에는 공감을 잘 못하는 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에 대한 설명조의 글은 내게 축복과 같다. 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있는 그대로 말하는 글에서 나는 배우고 깨닫는다. 고치기 힘든 나의 병폐다. 다행히도 이런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몇몇 저자들이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상속의 역사>를 쓴 백승종 교수다.
나는 이 글에서 어설픈 책 소개나 부연 설명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미 넘쳐나는 서평들이 많은 데 나까지 보태어 홍수를 일으킬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책을 읽으며 든 전체적 소감을 정리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먼저 <상속의 역사>는 ‘연결짓기‘의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이 창의성이란 정보의 연결짓기라 할 수 있다. 즉 주변에 많은 정보들을 재구성, 재가공하여 의미 있는 연결짓기를 하면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데,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례인 것이다. 내가 본 적 없는 서양의 자료들을 제외하고는, 저자가 제시한 참고문헌을 보면 대체로 알고 있는 책이거나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저자 백승종은 ‘상속‘이라는 ‘바늘‘을 가지고 ‘헝겊‘과 같은 다양한 자료들을 꿰어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한 것이다. 이것은 말이 쉽지 누구나 간단히 뚝딱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연결짓기는 창의성과 실천력이 뒤따르는 작업이다.
다음으로 <상속의 역사>는 남다른 시각으로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데 백승종 교수는 상속을 단순히 물질적 의미로만 파악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상속이라는 제도 뒷면에 가려진 사회의 단면을 여러 층위에서 살피고 있다. 전쟁, 결혼 제도, 신분 제도, 젠더 문제 등. 나는 지금까지 이 주제들은 상속과 결부하여 분절된 각각의 연구 주제로만 인식했지 하나로 묶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평범한 제목의 교양역사서를 비범하게 살려냈다고나 할까? 상속을 다루면서 중세 온난기, 일처다부제, 환관, 대부모 등의 주제가 나올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내가 이미 상상하고 있는 것들이 나오면 좋은 책이라 하기 힘들겠지만......
마지막으로 이 책이 주는 최고의 장점은 역사를 넓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상속이라는 주제에 한정되지만 이를 통해 시공을 가로지르는 역사 정보들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이 책은 한국사만으로도 벅찬 현대인들에게 유럽사 외에 중동사, 심지어 인도와 티벳도 다루고 있다. 게다가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관련 도서나 논문으로 넘어가도록 자극을 준다. 메디치, 환관, 근친혼, 서얼, 고구려의 형사취수제 등은 시중에 관련 자료들이 나와 있기 때문에 상속을 넘어 다른 주제로 갈아타기 쉽다. 이렇게 <상속의 역사>는 강한 지적 자극을 준다.
저자 백승종은 2018년에 사우출판사에서 3권의 책을 냈다. <선비와 함께 춤을>, <신사와 선비>, <상속의 역사>. 전문역사서라기보다 교양지식인들을 위한 차원 있는 저작들이다. 앞으로도 저자의 건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