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는 싸우는 영화에 열광했었다. 때리고 부수고 폭파하는 장면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해졌다. 커서는 전쟁 행위 자체보다 전쟁이 가지는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영화들에 끌렸다. <플래툰>이 그랬고 <디어 헌터>도 그랬다. 감독의 남다른 시선이 영화를 조금은 다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영화감독에 끌리기 시작했다. 곁들여 영화음악까지.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2006년 개봉작으로 미국의 대배우이자 대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미국인의 시선이 아닌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전쟁을 그리고 있다. 배우의 대부분이 일본인들이고 대사도 다 일본어다. 전쟁의 비극을 그리고 있지만 미군의 죽음보다 일본군의 죽음이 더 아프게 그려지고 있다. 물론 오해는 금물이다. 이것은 단지 시각의 차이일 뿐 호불호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다. 불가항력인 상황에서 미국의 본토 상륙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장군의 노력은 눈물겨우면서도 무모하다. 결국 소모품처럼 모든 부하들은 죽게 되어 있으니까. 대체 ‘덴노 반자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살고 나는 죽는 데, 내가 왜 그런 구호를 외치고 허망한 죽음 앞으로 돌격해야 할까 하는 걸까?
일본식 죽음을 상징하는 ‘자결‘. 과연 군인은 적과의 대결에서 패배할 때 자결해야 하나? 그러면 나만 죽을 것이지 왜 부하들에게도 죽음을 강요하는 것일까? 이것이 전통이요 올바른 길인가? 내게 이런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명장이라 할 수 있을 주인공 쿠리바야시 장군은 본토의 지원도 없을 것을 알면서도 거대한 미군 앞에서 항복하지 않고 최대한 시간을 끄는 작전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비록 미군의 상륙 시간이 늦춰지고 미군의 피해가 늘 것이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아마 장군도 알았을 것이다. 실제 전쟁 통계를 보면 2만 2천 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1만 7천573명이 전사했다. 피해율은 80%였고,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 미군이 입은 최악의 피해였다. 이런 전투를 두고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내 입에서는 그 어떤 수식어나 형용사가 나오질 않는다. 그거 살육전의 대표라는 느낌 밖에. 물론 영화를 보면 쿠리바야시 장군의 인간적 면모가 나온다. 나도 공감하며 인정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인류 전체로 봤을 때 그 역시도 전범이다. 이런 전투를 두고 일본의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옥쇄‘(玉砕)했다고 발표했다. 옥쇄란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크고 올바른 일을 위해 명예를 지키며 깨끗이 죽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개죽음에 너무 멋진 말을 붙였다. 이것이 당시 일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었다.
다만 영화는 일본 소시민들의 다른 의식도 보여준다. 모든 일본군이 전쟁광이라거나 살인기계라는 의식은 과장된 것이며 일본인들 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 영화 속에 잘 드러난다.
좋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