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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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대선 사전투표를 하러 갔다. 사표(死票)는 없으니 소신껏 투표하자는 것이 평소 지론었지만, 막상 15명(사퇴한 두 명을 포함)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보자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 두세 명 중에서 그나마 덜 최악인 후보에 투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양자구도였던 지난 대선과 달리 이번 대선에는 의석 수가 5개 이상인 당의 후보만 다섯 명이었다. 그러다보니 최악을 피하기 위한 사표심리를 자극한, '홍찍문'이니 '안찍홍'이니 '심찍홍'이니 하는 상대 후보 비판이 난무했다. 유권자들은 항상 사표를 막기 위해서 차악에 투표하거나 사표가 될 것을 각오하고 소신투표를 할 것을 강요당한다. 그로 인해 소수정당들은 후보단일화를 은연중에, 혹은 대놓고 종용당하기도 한다.

이럴 때면 대선에 결선투표를 도입하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대선과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대선이 있었는데, 39세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당선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 대선은 결선투표제를 채용하고 있는 바, 이번 대선에서는 극우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과 중도신당인 앙마르슈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진출했었다. 이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전통적인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는 공화당과 사회당의 후보가 결선투표에 낙선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트럼프와 샌더스 현상에서 나타나듯이, 전통적 우파정당과 좌파정당의 몰락과 극우, 극좌 세력의 약진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대선을 보면서 이러한 상황을 '예언(?)'한 소설이 떠오른다. 미셸 우엘벡이 2015년 출간하여 큰 화제를 모은 <복종>이다. <복종>은 2022년 대선에서 국민전선과 이슬람박애당(가공의 정당으로 보인다)의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자, 극우정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좌우가 합작하여 이슬람박애당의 대통령이 당선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소설의 배경인 2022년보다 5년 먼저 실현되었다. 현실세계에서 결선투표에 진출한 앙마르슈는 소설 속의 이슬람박애당과 마찬가지로 기존 정당의 좌우대립에서 벗어난 신생정당인 것이다.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과 신생 정당의 대중적 인기는 2010년대 들어서 서양 국가들을 강타하고 있는 현상이다.

소설 속에서 이슬람박애당의 집권은 소르본 대학의 이슬람화와 일부다처제 도입 등의 현상을 부르지만, 실업률 해결과 경제 기조 회복 등의 긍정적 효과를 낳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19세기말 프랑스 소설가 위스망스를 연구하는 문학교수다.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이슬람박애당의 집권으로 인해 정치적 격동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그는 프랑스 사회의 다문화사회화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며 유럽 문명의 쇠락(衰落)에 우울해하는 백인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럽 문명의 쇠락은 주인공의 자아의 불안과 중첩되며 나아가 남성성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소설 주인공과 같은 제1세계 백인 중년 남성 지식인의 고뇌에 대해 한국의 독자가 감정이입하기는 쉽지 않다. 은연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 화자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편견이 드러나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이다. 이슬람박애당의 집권 이후 일부다처제나 여성의 히잡 착용이 사회에 지배적이 되는 상황이 그려지게 된다. 트럼프 당선이나 브렉시트 (Brexit)같은 충격적인 결과는 그러한 징후(徵候)라고 할 수 있겠다. 멀지 않은 미래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소설화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위스망스를 비롯한 프랑스문학에 대해 조예가 있었다면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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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분과 싸우겠다는 거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어록 가운데 하나로 지난 대선 당시에 박정희 논란에 대해 반발하며 했던 말이다. 사실 20대인 나는 박정희에 대해 산업화세대나 민주화세대가 느끼는 애증을 느끼지 못했다. 박정희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역시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이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살아있는 박정희라는 인물은 누구였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을 10권 선정해 보았다.

 

1.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강상중, 현무암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이 화제가 되었듯이 '박정희 비긴즈'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만주국에서 장교로 임관한 시절의 이야기다. 물론 임관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패망했기에 박정희가 실제로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만주국에서의 경험은 이후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에도 국가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이 책에서 분석하는 바다. 아베 신조의 할아버지이자 박정희와도 친교가 있었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정치적 행적을 교차시키며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2.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김학민, 이창훈

 

 

박정희에게 친일 행적과 더불어 또 하나의 흑역사는 친북 행적이다. 공산주의자였던 형 박상희가 죽은 이후 남로당에 투신하여 사형까지 구형되었다가 한국전쟁에서 다시 재기하여 쿠데타로 집권하기까지의 '박정희 라이즈'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 북한에서 박정희와 접촉하도록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황태성 사건을 중심으로 박정희와 레드 컴플렉스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 <1960년을 묻다> 권보드래, 천정환

 

 

4.19 혁명으로 펼쳐진 새로운 대한민국의 비전에 대한 여러 담론이 발생했던 1년 남짓의 시기는 5.16 쿠데타로 귀결된다. 정치적 혼란기에 나타났던 담론적 상황을 <사상계>를 비롯한 당시의 잡지와 책들을 통해 문화 연구의 틀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던 1960년대를 다룬 책으로 읽을 만하다.

 

4. <1970, 박정희 모더니즘> 권보드래, 천정환, 황병주, 김원, 김성환

 

 

선데이서울, 새마을운동, 대마초, 의료보험 등 1970년대 한국의 문화적 현상들을 분석한 책이다. 당대 서민들의 생활이나 문화를 통해 역사를 분석하는 틀은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특히 박정희의 유신과 문화적 상황들을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5. <유신> 한홍구

 

 

1972년의 유신 이후로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YH사건 등을 거치며 폭압의 정도를 더해가다가 부마항쟁과 10.26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진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를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책이다.

 

6. <건국과 부국> 김일영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가 아닌 빛에 주목한 책도 한 권 들고자 한다. <건국과 부국>은 한국 보수 논단에서 명성이 높았던 고 김일영 교수가 한국 현대사를 보수주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대표적 저서다.

 

7. <동원된 근대화> 조희연

 

 

박정희 시대의 근대화에 대해 위로부터 가해진 억압의 결과로 보거나 아래로부터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이분법을 저자는 비판하면서 동원이라는 관념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조명한다. 대중을 동원한 근대화라는 박정희 시대의 복잡한 성격을 다루고 있다.

 

8. <박정희 정부의 선택> 기미야 다다시

 

 

박정희 시대를 논할 때, 경제발전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신화와는 별개로 박정희 시대에 한국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수출지향적 중공업 정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경제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하다.

 

9. <개발독재와 박정희 시대> 이병천 외

 

 

이상의 책들을 통해 박정희 시대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박정희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를 어떻게 논할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으로 박정희 시대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총괄한다면 여러 저자들의 글들로 모은 이 책이 도움이 될 듯 싶다.

 

10. <최순실게이트> 한겨레 특별취재반

 

 

박정희의 후광으로 당선된 박근혜 정권에 대해서도 한 권 추천하고 싶다. 박근혜의 파탄난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전여옥, 강준만, 안민석 등의 책이 있지만, 최순실게이트를 밝히는 데 큰 활약을 한 한겨레 신문 취재반이 쓴 책을 추천하고자 한다. 최순실게이트 발각부터 탄핵 인용까지의 과정을 추적했다는 점에서 박근혜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는 필수적인 한 권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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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연인들은 투케로 간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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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시작하는 연인들은 투케로 간다>라는 제목이 흥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책의 프랑스어 원제는 <여름의 사계절>이라는 뜻이고 <시작하는 연인들은 투케로 간다>는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1999년 7월 14일(혁명기념일)에 프랑스 북부의 휴양지 투케 해변을 찾은 네 명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웃집 소녀와 '썸'을 타고 있는 소년, 남편과 헤어지고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30대 여성, 자식들이 성장한 후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50대 여성, 평생에 걸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함께 보내고 생을 마무리하려는 70대 노부부. 이들이 각각 인생의 사계절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랑스어 원제가 <여름의 사계절>인 이유다.

같은 시공간에 모인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교차시켜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는 하다. 프랑스의 역사를 각 등장인물들의 삶에 투영함으로써 세대에 걸쳐 이어지면서도, 시간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각각 다른 챕터에 나온 등장인물들의 연결고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 읽고 나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동이나 감명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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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4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각당 대선 후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탄핵 인용 후 2개월만에 치러지는 이번 대선은 여느 때보다 후보 검증의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 나처럼 최순실게이트를 보며 이번 대선에는 꼭 투표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누구를 찍어야 할지 고민되는 유권자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투표하러 가기 전에 대통령 선거의 의미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책을 10권 선정해 보았다. 개별적인 후보나 이슈가 아니라, 정치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책들을 중심으로 선정하였다.

 

1. <정치의 생각> 아담 스위프트(김비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몇 년 전 화제를 끌었는데, <정치의 생각>은 자유, 평등, 정의, 민주주의 등 정치사상의 중요한 개념들에 대한 고찰을 유도하는 책이다. 롤즈, 노직, 하이에크, 벌린 등의 영미 정치사상의 대가들의 사상과 문제의식을 쉬우면서도 깊이있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 사유해 볼 수 있는 책이다.

 

2. <한나 아렌트의 말> 한나 아렌트

 

 

20세기 정치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은 한국에도 여러 권 번역되어 있지만, 이 책은 그녀의 인터뷰를 모은 책으로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그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소개하고 있어 정치사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3.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유벌 레빈(조미현)

 

 

흔히 정치 하면,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라는 카테고리로 이해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틀이 과연 어디까지 정치적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의 기원이 된 프랑스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이름을 만나게 되는 듯하다. 근원으로 되돌아가 보수와 진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작업을 해 보고자 추천한다.

 

4. <일반의지 2.0> 아즈마 히로키(안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에 대해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흥미로운 논고를 전개한다. 루소의 사상에서 핵심이 되는 일반의지를 인터넷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기능부전에 빠진 정치를 다시 작동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되리라 생각한다.

 

5.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로우, 제임스 로빈슨(최완규)

 

 

왜 어떤 국가들은 성공하고, 어떤 국가들은 실패하는가에 대해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국가들의 사례를 비교 분석하며 설명하고 있다. 흥미있는 주제를 세심하게 다루고 있어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는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6.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이 책은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역대 대통령들의 공과를 한 권으로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는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리기 마련이지만,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해서 과거의 대통령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7. <양손잡이 민주주의> 최장집, 박찬표, 서복경, 박상훈

 

 

한국 정치의 현재라고 하면 작년 연말부터 탄핵 인용까지 있었던 촛불혁명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한 촛불혁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정치적으로 어떻게 정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논한 책으로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

 

8. <외교상상력> 김정섭

 

 

다음 정권이 해결해야 할 현안 가운데 외교안보 문제가 시급하다. 트럼프가 거침없는 보호무역주의로 선회한 미국, 사드 보복으로 압박해오는 중국, 대사 소환까지 한 일본, 핵실험 징후가 포착되는 북한 등 쉽지 않은 문제뿐이다. 국제정치의 이론과 역사를 통해 외교 현안들을 알기 쉽게 해설한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9. <대한민국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광재

 

 

전 강원도 지사인 이광재가 대한민국 원로들에게 인터뷰를 한 책이다. 통일, 경제, 교육, 정치 등 다양한 분야들을 다루고 있어, 한국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하고자 하는 책이다.

 

10. <지금 다시, 헌법>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헌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인지하고 있지만, 의외로 헌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 게 현실인 것 같다. 기나긴 민주화 운동을 통해 쟁취한 헌법을, 지금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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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리아의 반란
유민석 지음 / 봄알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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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메갈리아라는 사이트의 등장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미러링'을 통해 여성혐오(misogyny)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일베의 말투를 흉내낸 메갈리아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화두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디씨에서 파생되었고, 일베의 말투를 흉내내며, 오유와 적대관계에 있고, 여시로부터 '여자 일베' 낙인을 이어받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의 악명을 모두 합친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악명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일부 논자들로부터 메갈리아의 지향성이나 성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면서 메갈리아는 그야말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메갈리아의 반란>은 그러한 '메갈' 옹호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메갈'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과도하게 악마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함은 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혐오발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메갈의 긍정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메갈리아의 반란>은 그동안 몰랐던 메갈의 또다른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여러 의문점이 사라지지 않았고, 메갈리아의 미러링이라는 방식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부적인 논점들을 다루기 전에 전체적인 인상을 말하자면, 저자는 메갈리아 내부에서 생성되는 담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포괄적인 분석을 하고 있지만, 메갈리아의 담론이 외부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메타(meta) 담론 차원의 분석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에서는 여성혐오를 둘러싼 논쟁이 가시화,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논쟁의 장에서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혹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 조금더 고찰해 보았더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남성혐오는 혐오발언이 아닌가?

저자는 메갈리아의 '남성혐오' 또한 '여성혐오'와 마찬가지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마쓰다와 제니퍼 혼스비의 혐오발언의 정의를 들어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 두 정의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마쓰다는 "역사적 억압"에 방점을 두고 있는 반면, 혼스비는 역사적 억압의 유무로 혐오발언을 정의하지는 않고 있다.(77,78)

아무튼 마쓰다의 정의에 따르면 남성은 역사적으로 억압된 집단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혐오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설사 남성혐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여성혐오와 같다고 기계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젠더 권력의 비대칭으로 인해 여성혐오와 남성혐오가 그 강도와 번위 면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폐한다(78, 79)"는 지적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일관계 및 일본의 혐한 시위에 관심이 있는 나는 이 이야기를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입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 억압의 유무를 혐오발언 성립의 중요한 요건으로 보는 저자(및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마쓰다)의 정의에 따르면, 일본인이 한국인을 "조센징"이라고 욕하는 것은 혐오발언이지만, 한국인이 일본인을 "쪽바리"라고 욕하는 것은 혐오발언이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정의에 따르면 혐오발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발언이 덜 유해하다거나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재특회의 혐한 시위에 대한 '미러링'으로 '쪽바리 죽이자'는 시위를 한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재특회는 한국의 반일 시위를 예로 들며 '이것 봐라, 한국의 조센징들은 이렇게 일본인들을 모욕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되겠느냐!'고 선동할 것이고, 재특회의 혐한 시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던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들도 재특회의 대의명분에 대해 공감, 내지는 동조하거나 최소한 '둘 다 똑같은 놈들이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재특회의 세력만 성장하게 될 것이다.(실제로 재특회 회원들 중 상당수는 한국의 반일감정에 대한 반발로 혐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도 반일 시위에서 일장기를 태우는 등의 퍼포먼스를 하는데 혐한 시위가 왜 문제냐는 반응을 보인다.) "조센징"이라는 혐오발언에 대항하기 위해 "쪽바리"라는 혐오발언을 꺼내든다면,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모욕은 나쁘다'는 보편적 도덕 규범에 대해 호소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한국의 온라인에서도 계속되는 무의미한 논쟁의 패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는 여성혐오가 남성혐오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메갈과 워마드의 패륜적 언행 이후로 '여혐이나 남혐이나 둘 다 나쁘다'는 식의 물타기 담론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메갈이나 워마드에 대한 과장된 악마화 탓도 있겠지만, '미러링'이라는 전략이 빌미를 제공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즉,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여성혐오에 대응하는 '남성혐오'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혐오주의자들에게 절호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반란적 발화"라는 의미에서 메갈리아의 미러링과 1955년 흑인 인권운동의 도화선이 된 로자 파크스의 불복종 운동을 동일한 선상에서 논하고 있다(65, 66). 이러한 비교는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로자 파크스는 흑인이 버스에 타면 백인은 흑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2008년 미국 대선에서 "God Damn America"란 설교로 물의를 빚은 흑인 목사 제레미아 라이트와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혐오발언의 '사용'과 '언급'은 구분되는가?

메갈리아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혐오발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베의 혐오발언과 메갈리아의 혐오발언에 대한 미러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메갈리안이 하고 있는 미러링 스피치는 혐오발언의 '사용'이라기보다는 과거의 혐오발언에 대한 '언급'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혐오발언을 사용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여성혐오발언을 언급해 보여주고 전시하는 방식에 해당한다. (74)

그러면서 저자는 "미러링이라는 사본을 원본 혐오발언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용과 언급을 구분하고 있지 못한 것'에 해당된다"(76)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발언의 '사용'과 '언급'이 구분되는 문제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저자가 '사용'과 '언급'의 구분을 설명하며 인용하는 주디스 버틀러는 "상처를 주는 말의 미학적인 재연은 그 말을 사용함과 동시에 언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75)고 말하는데, 이는 '사용'과 '언급'이 동시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다시 말해서 어떤 발언에 내포된 '사용'과 '언급'이라는 두 측면이 칼로 무 자르듯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론적 차원을 벗어나 현실세계에서는 이 두 구분은 더더욱 구분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혐오발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혐오발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일일이 주석을 달지 않는다면 고도로 문맥 의존적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메갈리아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좆린이 따먹고 싶다"는 게시물을 보자. 이 글의 작성자는 자신이 일베나 소라넷 등지에서 본 "로린이 따먹고 싶다"는 글의 미러링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문제는 모든 인터넷 사용자들이 일베와 소라넷에 올라오는 모든 글을 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좆린이 따먹고 싶다"는 글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혐오발언의 사용인지 언급인지에 대해 알 수 없을 수 있다.

선의를 가진 독자라면 '로린이 따먹고 싶다는 원본을 모르더라도, 이 글이 일베나 소라넷의 미러링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지만, 인터넷에서는 어떤 글을 접할 때, 선의보다는 악의나 무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더 많다. 메갈리아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메갈=좆린이"라고 결론내릴 것이고, 악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페미니즘 운운하더니 일베나 소라넷이랑 다를 바 없네'라고 왜곡할 것이다. 인터넷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특히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목표로 한다면- 선의보다는 악의를 전제로 하여 임하는 편이 불필요한 오해나 왜곡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참고로 나는 이 글을 최대한 선의에 입각하여, 메갈에 대한 비판이 '오해'나 '왜곡'일 가능성을 전제로 쓰고 있다.) 옛말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찰떡 같이 못 알아들었다고 해도 못 알아들은 사람이 잘못은 아닌 것이다.

방관은 동조인가?

메갈리아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룬 <혐오의 미러링>의 저자 박가분은 메갈리아의 '미러링'에 "난반사의 미러링"이라고 표현한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처럼, 메갈리아의 공격적인 언사가 엉뚱한 대상을 향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혐오발화의 내용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간에 (중략) 혐오발화자에게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을 경우 화자는 어떤 묵인된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방관 자체가 혐오를 강화하며, 결과적으로 그 혐오에 일정 부분 공모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97)

이러한 문제의식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재특회의 경우를 보자면, 일본인의 대다수는 재특회의 혐오발언에 대해 동조하지 않지만, 묵인과 방조를 통해 재특회가 혐오발언을 할 여지를 주고 있다는 지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재특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너희도 재특회랑 다를 바 없는 쪽바리 새끼들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 쪽바리 소리를 들은 일본인에게 감정적 반발을 불러일으켜 재특회에게 동조할 수 있게끔 만드는 효과 외에 말이다. '침묵하는 다수'를 침묵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한다면, 오히려 혐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지는 않을까? 나를 비롯해 메갈리아가 더 큰 혐오를 낳을 것을 우려하는 이들은 그러한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태극기집회에 다녀온 할아버지가 지하철에서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니는 젊은이를 향해 "그거 다 빨갱이 새끼들이 하는 짓이야"라고 외치고 다니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런 상황에서 "할아버지, 세월호 리본 단다고 빨갱이는 아니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바로 앞에서 반론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마이트라에 따르면, 그 상황에서 침묵하는 사람들은 그 노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권위를 승인하고, 나아가 공모하게 된다. 그러한 관점은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메갈리아의 몰락과 그 후

이 책에서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메갈리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메갈리아라는 사이트 자체는 망한지 오래라는 사실 말이다. 메갈리아 사이트 자체는 2016년부터 '워마드' 등의 사이트로 분화되었고, 한때 악명을 떨쳤던 메갈리아는 없다. 대중의 광범위한 공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과격성 자체를 추구하게 된 운동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되고 분열해가는 과정은 일본의 1970년대 신좌익 운동이 걸었던 길과 같다.

메갈리아 내에서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비하 논란으로 분화된 사이트 '워마드'는 남성 동성애자를 비롯한 남성 일반에 대한 모욕과 조롱을 더욱 과격화시키며, 전태일이나 백남기,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사망자 등을 모욕한 일로 지탄을 받았다. 한편 '메갈리아 4'라는 페이스북 사이트는 '메갈리아'라는 이름과는 달리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문제에 대해 이성적으로 지적하면서도 미러링이나 조롱, 모욕 등을 주로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조용한 분노가 더 효과적인 법이다. '메갈리아'가 처음부터 '메갈리아4'처럼 조롱과 모욕 대신 이성적 문제제기를 했다면, "너 메갈이지?"라는 불필요한 논쟁 없이 보다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페미니즘을 이끌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메갈리아를 비롯한 페미니즘 진영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논객 노정태는 위안부 소녀상 문제에 관해 "피해자라고 해서 무슨 일을 해도 허용되는 건 아니다"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위안부 소녀상 설치가 "무슨 일"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피해자라고 해서 무슨 일을 해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진술 자체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의 정당성 자체가 타자에 대한 무분별한 모욕과 조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조지 레이코프는 진보주의자들에게 보수주의자들과의 토론에서 가져야 할 자세로 다음과 같은 덕목들을 열거한다. 이 중 일부는 페미니즘 진영이 꼭 경청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기에 적어두기로 한다.

여러분이 응대하는 보수주의자에게 반드시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라. 상대방에게 존중을 표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라. 그들의 말에 단 한 마디도 동의할 수 없더라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대하라. 비열한 언행을 삼가라. 그쪽에서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악을 악으로 갚아봤자 좋을 것이 없다. 어쨌든 상대방을 존중하고 다른 뺨도 돌려대라. 여기에는 만다른 품성과 긍지가 필요하다. 품성과 긍지를 보여주어라.


소리 지르면서 싸우지 마라. (중략) 토론이 예의를 갖추기 시작하면 우리가 이긴다. 우리를 소리 지르게 만들면 그들이 이긴다.


하지만 정당한 분노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정당한 분노는 품을 줄 알아야 하지만 표출은 절제된 방식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절제력을 잃으면 그들이 이긴다. (중략)


예의 바른 처신으로 강인함과 침착성과 통제력을 보여주어라. 논리적인 능력, 현실 감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기본적 사실에 대한 지식, (우월감이 아닌) 평등의 감각을 가져라. 최소한 당신에게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상대로서 당신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상을 청중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조지 레이코프(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10주년 전면개정판> pp.27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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