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깨기 -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남정욱 외 지음 / 백년동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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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자유경제원이라는 곳에서 주최한 이승만 기념 시 응모대회에 어떤 이가 세로드립으로 만든 풍자시를 응모하여 화제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승만을 찬양하는 시인데 문장 첫 글자만 읽으면 이승만을 비판하는 내용의 시를 응모하여 무려 입상까지 한 것이다.

 

도대체 자유경제원이란 곳에서는 왜 이승만을 기념하는 시 대회까지 열어야 했던 것일까? 그동안 좌파에 의해 폄훼당했던 이승만의 역사적 위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궁금하여 <이승만 깨기>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이승만 깨기>는 자유경제원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팩트로 깨다!"라는 대담한 야심을 바탕으로 나온 책이다. 분단의 원흉은 이승만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북한이야말로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했었다,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등등의 이야기는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이승만에 대한 변명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일까?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비판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변명한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국가원수가 국가의 안위와 정부의 연속성을 위해 긴급피난을 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70) 그런데 이승만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서울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은 아니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고 난 뒤에도 라디오로 "국민 여러분 국군이 적을 격퇴하고 있습니다. 점심은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습니다"라고 방송했고, 피난 중이던 사람들이 피난 중이던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수백 명이 사망하였고, 피난치 못한 시민들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에는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에 대한 내용이 비판이든 변명이든 단 한 줄도 없다. 그러면서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죽이기'에 나선 일부 세력들이 왜곡하고 비틀어서 억지로 만들어낸 그런 허접한 인물이 아니"(87)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황당한 일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독재에 관해서도 초점에서 벗어난 변명을 하고 있다.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원 정수를 왜곡한 '사사오입 개헌'에 관해서는 "신생국이며 개발도상국의 민주공화제 초기시기의 과잉되고 미숙했던 측면으로 평가될 수는 있지만 독재적 지도자로 평가될 만한 것"(32)은 아니며, 2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조봉암 사형과 진보당 해산에 관해서는 "공산체제라는 전체주의와 극단적으로 대치되던 관계에서 비롯된 것"(34)이라며 옹호한다.

 

3.15부정선거에 관해서는 "이승만에 대한 선거가 아닌 이기붕 당선 과정에 대한 선거"(33)라고 이야기한다. 그걸 누가 몰라? 그러면서 "독재자는 반대자들에 대해 폭력적 진압이란 방식을 선택하지 스스로 물러나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이승만의 통치는 독재체제가 아니라 미숙했던 민주체제를 더 성숙시키는 과정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평가된다"(35)고 말한다. 첫째, 이 논리에 따르면 30년간 집권했다가 혁명이 일어나자 사임한 이집트의 무바라크 등 스스로(?) 물러난 독재자는 독재자가 아니다. 둘째, 누가 보면 4.19혁명이 무혈혁명이기라도 했던 줄 알겠다. 4.19혁명에서는 경찰의 발포 등으로 185명이 사망했고, 계엄령이 내려졌다. 탱크로 수백 명 밀어버려야 독재지, 경찰이 발포해서 백여명이 죽은 건 독재가 아니라는 논리인가? 셋째, 이 책에서는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왜 한 거야?"라고 했다며 이승만의 선한 의도를 강조하지만, 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바, 이승만이 그 책임을 져야 함은 틀림없다. 넷째, 이승만의 하야가 자의에 의한 계엄군의 이반과 미국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이승만의 공과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을 위해 사실을 은폐, 왜곡하고 억지논리를 편다면 이승만의 재평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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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반석 2023-12-0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틀린 팩트로 비판을 하니 선동처럼 들리네요. 이승만이 피난을 가고 난 다음 방송을 했다는 내용은 군의 선군방송과 이승만의 대전에서의 방송을 교묘히 섞어 사실을 왜곡한 것 같네요. 인도교폭파는 이승만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가 있다면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 인간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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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체 내용보다 제목이 더 좋은 책. 인간관계를 알레르기에 비유하여 인간알레르기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지만, 어린 시절에 사람을 못 받았다거나 과잉보호의 트라우마로 모든 걸 설명하려는 심리학 책이라 제목만큼 재미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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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 역사, 쟁점, 전망
김일영·조성렬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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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더 전에, 노무현 정부가 갓 출범했을 2003년에 출판된 책인지라 현재로서는 적실성이 떨어진다. 이후에 출판된 <갈등하는 동맹>이나 <아메리카 트라우마>가 지금 읽기에는 더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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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의 미래 - 자기 복제와 포털 중독 언론에 미래는 있는가
이정환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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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론 환경은 21세기 들어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뉴스를 접하는 플랫폼 자체가 종이신문에서 인터넷 뉴스로 변했고, 케이블TV와 종편의 등장으로 지상파 방송의 독과점 체제 또한 무너졌다. 더 나아가서는 뉴스와 신문 자체를 접하지 않는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로 인터넷 포탈에는 트래픽과 광고를 노린 낚시성 기사들만 난무하게 되었다. 종이 신문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고,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인터넷에서 수익을 거두기 위해서는 광고와 협찬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말이 일상화되었을 정도로 한국의 언론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의 언론이 문제가 많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해 보인다. 소위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대해 대형 신문사 기자들이 일제히 앓는 소리를 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국가의 논리, 시장의 논리에 복속되고 시청자들과 독자들의 여론에 좌고우면하는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없음은 말할 나위 없다. 더군다나 언론이라는 기득권에 안주하며 뼈를 깎는 혁신을 게을리하고 있다면 말이다.

 

<미디어오늘>이 중심이 되어 만든 이 책 <저널리즘의 미래>는 현재 한국 언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자들에 대한 인터뷰와 취재 등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좋다. 다만 이 책에 나와있는 문제점들은 이미 널리 인식되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새로운 발견이라는 점에서는 다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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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횡단 특급
이영수(듀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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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횡단 특급>은 한국의 SF소설의 대표적 존재인 듀나의 12편의 SF 단편을 모은 단편집이다. 수록된 단편들은 표제작 <태평양 횡단 특급>을 포함하여, <히즈 올 댓> <대리 살인자> <첼로> <기생> <무궁동> <스퀘어 댄스> <허깨비 사냥> <꼭두각시들> <끈> <얼어붙은 삶> <미치광이 하늘> 등이다. 수록된 소설들은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연작이 아니라 각각 다른 세계관과 주제를 가진 단편들이다. 이 글에서는 <태평양 횡단 특급> <기생><무궁동> <끈>을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단편도 있고, 별로인 단편도 있다. 예를 들어 <대리살인자>는 별로였다. 영화 <SAW>가 7편인가까지 나왔는데, 어떤 잔혹한 살인자가 평범한 사람들의 양심을 시험함으로써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까발린다는 이야기는 식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책이 2002년에 나왔음을 생각하면, 이 책의 잘못은 아니다.

 

반대로 표제작 <태평양 횡단 특급>은 마음에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이 단편을 읽고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면 유사성이 확실히 드러난다.

 

 

내가 태어난 곳은 베이징을 막 지나치는 유라시아 횡단 특급의 B-27번 침대차 2번 객실이었다. (중략) 내 인생의 모든 중요한 일들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가끔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철로 밖에 있는 단단하고 고정된 땅에 서 있어야 할 대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철로에 속해 있었고 철로 또한 나에게 속해 있었다. (9, 10)

 

 

영화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의 기차 또한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이루고 있으며 평생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또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 국제철도회사의 사장인 이 소설의 1인칭 화자가 회사의 사업을 위해선 가족도 숙청할 수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라는 점에서 시드니 셀던의 소설 <게임의 여왕>을 떠올리기도 했다.

 

<태평양 횡단 특급>의 세계관은 상당히 독특하다. 1인칭 화자의 국제철도회사는 전세계의 철도를 말 그대로 지배함으로써,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치는 전지구적 초국적기업이다. 350년 전에 시작된 국제철도회사는 "회사 밖의 사람들이 세계정복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세계 평준화라고 부르는, 회사의 목표"(16)를 가지고 대서양과 지중해, 그리고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완성한다.오늘날의 일반적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SF의 상상력이다. 소설은 태평양 횡단 특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가 보았던 것은 폭 21미터, 높이 57미터, 길어 15,400킬로미터의 거대한 철근 콘크리트 괴물이었다. 이 괴물들이 해수면 181미터 위에 뜰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2,556,764개의 기둥들은 그 하나하나가 초모룽마의 높이에 견줄 만 했다. 그러나 부피와 길이는 다리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수많은 화학 공장과 발전소, 그리고 이를 돌리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원에 비하면 오히려 부수적인 것이었다. (20)

 

 

이러한 묘사는 <태평양 횡단 특급>의 세계관이 인류문명의 진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나라들은 아즈텍, 만주국, 프랑크, 테베 등의 오래 전에 멸망하고 지금은 없는 나라들이다. 역사상 이 나라들이 존재했던 시대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또한 이 소설의 주요한 무대는 인신공양이 이루어지는 '아즈텍 신성 공화국'이다.

 

초미래적인 과학기술과 이미 멸망한 전근대의 여러 나라들이 공존하는 세계관, 나는 여기서 인류문명의 진보와 퇴보가 공존하는 기묘한 세계관을 읽는다. 이 소설에서 인류문명은 단선적으로 진보하는 게 아니라, 과학기술은 기차가 바다를 건널 정도로 진보하지만, 인간의 정신문명은 인신공양을 계속할 정도로 퇴보하는 것이다. 물론 <태평양 횡단 특급>의 결말부은 인신공양의 희생양이 될 뻔한 아즈텍의 소년이 국제철도회사의 철도를 타고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인류문명의 진보에 대한 희망을 남긴다.

 

그에 비해, 또다른 수록작인 <기생>은 인류문명의 진보와 퇴보가 뒤엉킨 아이러니를 보다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기생>은 기계들이 인류에 반란을 일으켜 지구를 지배하고, 인간들은 기계들에게 붙잡혀 소시지 공장에서 소시지로 가공되지 않기 위해 도망쳐야 하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회 선생'은 살아남은 인간들을 규합하여 기계들의 지배에 반항하며 공략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회 선생'의 반란은 실패로 끝나는데, 바로 '사회 선생'의 친구이자 생존자인 '역사 선생'이 기계들에게 이 반란 모의를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선생이 반란을 밀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그녀가 얼마나 도시에 매료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도시 문명의 미래에 굉장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인간들이 그들을 넘어 먹이 사슬의 맨 위에 서는 것처럼 부당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도시는 서서히 인간의 가치를 넘어 자신만의 문명과 지성을 발전시키는 중이었다. 사회 선생의 반혁명이 성공해 우리같이 밑천 떨어진 바보들이 다시 지구를 점령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허사가 될 것이다. (1401,141)

 

 

여기서 '역사 선생'과 그녀에게 감화를 받은 1인칭 화자인 '나'는 인류가 기계들보다 더 나은 문화적 성취를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하고, 기계 문명의 지배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은 인류 문명의 무한한 진보를 부정하고, 오히려 기계 문명이 더 진보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문명의 진보와 퇴보를 전복시킨 상상력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종종 그녀가 나에게 넘겨주는 인공 지능의 창작물들을 감상한다. 지금까지 그것들은 인간 예술의 모방이었다. 하지만 인공 지능 문화 소비자들이 발전하는 것과 속도를 맞추어 도시의 인공 지능 예술가들도 진화하기 시작했다. (141)

 

 

인류 문명의 진보를 포기하고 저자가 새롭게 제시하는 셰계관은 무한한 반복과 순환이다. <무궁동>이라는 제목의 단편은 그 단면을 보여준다. 음악 용어 '페르페튬 모빌레(perpetum mobile)'의 역어라는 무궁동(無窮動)은 무한한 반복과 순환의 모티프를 드러낸다.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한데, 심리학자인 1인칭 화자에게 여성 환자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환자는 자신이 엄마가 먼저 죽은 '누나'를 대신하여 만든 클론(복제인간)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토로하고 이는 사실로 드러난다. 환자의 엄마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14 년 뒤 화자는 환자가 죽은 엄마의 클론을 만들어 딸로 만들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소설의 제목과 엔딩은 이들 '모녀'가 똑같은 비극을 무한히 되풀이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무궁동>이 개인적 차원에서의 순환과 반복을 드러낸다면, 전인류적 차원으로 이를 확장시킨 단편이 <끈>이다. 여기서 1인칭 화자인 소설가 이영수(작품 밖 세계에서는 저자 듀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에게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의 삶을 전생으로서 기억한다고 호소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화자인 이영수글 비롯하여 나폴레옹, 히틀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전생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지구에 존재했었고,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사람의 전생이거나 내생이라는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한다.

 

 

아시겠습니까? 이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과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또 앞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저 하나입니다. 그들은 제 전생이거나 다음 생입니다. 시간의 얽힘 때문에 동시에 같은 장소에 존재할 수 있을 뿐이지요. 지구 역사는 원맨쇼에 불과합니다. 전 지금 선생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간을 넘어선 독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14)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가 사실은 한 사람이고 그의 원맨쇼라면, 인류의 문명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순환하고 반복하는 뫼비우스의 끈일 뿐이다. 더구나 '그 이상한 남자'는 자신이 몇 번 전생을 거듭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역사는 진보할 수 없고, 닫혀진 틀 속에서 무한히 순환과 반복을 거듭할 뿐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개재하게 된다. 그러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야말로 듀나의 SF소설에 볼 수 있는특징이 아닐까 싶다.

 

듀나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태평양 횡단 특급>의 주제들 중 하나는 역사의 단선적인 진보를 거부하고 그 대신에 무한한 순환과 반복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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