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여인천하
양이 지음, 이지은 옮김 / 비즈니스맵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품 조연'이라는 방송가 언어가 낯설지 않을 만큼 최근의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조연의 역할은 참으로 눈부시다.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주연배우 못지않게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빛나는 조연의 연기는 극 전반에 걸친 흐름과 호흡을 조절하는 데 감칠 맛을 더해준다. 이들의 활약이 눈부신 건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에도 주연만 넘쳐나는 무대는 없으며, 주연배우가 지니고 있는 유사한 구조적 영웅성에 비해 저마다의 개성과 다채로운 삶의 유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량과 비중에 상관없이 이제나 저제나 언제 나올까? 기대하는 심정으로 명품조연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처럼 세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무수한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삼국지>에도 남성들의 창과 방패에 가려진 여인들의 숱한 활약상이 명품조연특집처럼 구성된 흥미로운 책 한 권이 있으니 바로 양이가 지은 『삼국지 여인천하』이다. 제목만 들어도 엄청난 분량과 방대한 등장인물에 우선 압도당하고, 절묘한 지략과 흥미진진한 전개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되는 <삼국지>인 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 어디 한 둘이랴? 초점은 남성중심의 사고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그간의 전쟁영웅 시리즈에 비해 이 책에서는 조연으로 물러나 있던 여인들의 삶을 주연으로 무대 중앙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양한 실제 사료와 수많은 버전으로 재탄생한 <삼국지>에 관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그간의 과장되고 부풀려진 <삼국지>를 좀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으며, 말발굽 소리에 가려진 여인들의 은밀한 속삭임과 안타까운 흐느낌, 남성 못지 않은 기개로 세상을 호령하는 목소리까지도 섬세하게 포착해 확성기로 들려준다. 정사에 기록된 유명인사부터 남성중심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기록에서 짧게 압축된 여인, 민간 전설에서만 이름을 전하는 여인 등등 이 책에 소개된 수십 명의 삼국시대 여인들의 삶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삼국지> 를 또 다른 버전으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리라 본다.

 

성의 사회적 지위나 개인적 이상 실현이 오늘날과 현격히 달랐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보더라도 삼국 사대의 여성들의 지위는 봉건적 시대상이 부여한 삼종(三從)의 미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었으며, 아름다움이 덕(德)이요, 재능은 오히려 화(禍)가 되는 시대였다. 오죽하면 <삼국지>의 영웅 중 한 사람인 유비조차 "형제는 수족과 다름없지만, 처자식은 의복과 같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겠는가? 대중에게 알려진 영웅이나 성인의 이미지와는 달리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유비는 호색한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사료에 이름을 올린 유비의 여인만도 넷이었으니 모든 것은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모양이다. 유비에게는 감부인(첩), 미부인(본처), 손부인(손권의 여동생 손상향), 오부인이 있었으니 현명하고 후덕한 데다 미모까지 출중했던 감부인(유비의 아들 유아두의 생모)과 감부인의 소생인 아두를 살리고자 적군이 몰려오는 상황(장판파 전투)에서 행여 자신이 짐이 될까봐 우물 속에 빠져 죽은 미부인, 손권의 여동생으로 2~3년 간의 짧은 결혼 생활 후 친정으로 돌아간 손부인, '천하제일 귀인이 될 것'이라는 점쟁이 예언으로 유안의 며느리가 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유비의 처가 된 오부인이 그들이다. 이밖에도 사료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삼국연의>에 기록된 유아두의 배 다른 형제 이름 등을 감안해 볼 때 유비에게는 총 십 여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하니 25명의 자식을 둔 조조에 비할 바는 못되나 성인군자의 이미지로 굳어진 유비의 색다른 모습은 낯설기도 하지만 흥미롭기도 하다. 

 

성 폄하적 시대관이 낳은 비극적 희생물인 유안의 처는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넘어선 분노가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 여인이었다. 유비에게 대접할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제 처를 죽인 뒤 팔뚝 살을 도려냈다니 충성이 과하면 부부간의 정도 단칼에 끊어버릴 만큼 가벼운 윤리관을 지닌 남성들이 역사 속에서는 '충효'로 미화되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남성미덕이었으리라.

 

란길에 오른 유비를 보필하다 치른 장판파 전투로 유면명 촉한의 무장 조운(조자룡)은 평소에도 깐깐한 원칙주의자이자 겸손한 미덕의 소유자로 알려졌는데 늦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자 의형제를 맺은 조벙이 과부가 된 자신의 형수 번씨를 조운에게 소개해주었다 한다. 의형제를 맺은 이상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패륜이라며 경국지색의 번씨를 단호하게 뿌리친 조운이나 무리한 3대 조건을 내걸음으로써 수절의 뜻을 확고히 했던 번씨나 원칙주의자로서의 강직함을 남녀 간 연애사보다 아름답게 보여준 이들이라 하겠다.

 

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장점을 내세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황월영은 <삼국지> 최고 인기남인 제갈량의 아내이다. 뛰어난 지략가에다 준수한 외모로 여인들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는 제갈량에게는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영웅-추녀'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오붓한 부부 간의 정을 보여준 이 커플이야말로 내적 아름다움을 귀히 여기는 제갈량의 남다른 인품과 거울보다 책을 가까이 함으로써 난세에 남편을 지혜로써 내조하는 아내의 현명함을 잘 보여주는 관계라 하겠다. 실제로 수많은 전투에서 제갈량이 세운 혁혁한 전술에는 아내 황영월의 박학다식한 조언이 크게 한 몫을 했다니 개인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상으로 여겨진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으로 남성중심의 봉건적 분위기 속에서 동등한 관계를 형성했던 부부의 모습은 실로 아름답게 비쳐진다.

 

략결혼의 최대 희생자인 손상향은 형주를 찾기 위한 오라비 손권의 정치적 미끼로 꽃다운 나이인 20대에 머리 희끗한 50대의 유비에게 시집 가 짧은 결혼 생활을 맛본 후 다시 친정으로 끌려온다. 가히 남성들의 정치적 놀음에 여성이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사용하는 또 다른 정치적 미끼는 정략결혼 외에도 연환계(미인계)가 일반적이다.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이라 일컬어지는 초선은 달도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을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 속의 미인으로 의부인 동탁과 양아들인 여포 사이를 이간질해 미인계의 성공담을 화려하게 완성한 여인이다. 여인의 몸을 무기 삼아 두 사내 사이를 오고가야만 했던 치욕을 대의를 위해 망설임없이 선택했던 여인으로 묘사한 것 역시 봉건적 산물이 낳은 희생물의 이미지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밖에도 손책과 주유의 영웅미담을 완성하는 데 일조한 강동의 미녀 자녀 대교와 소교(주유의 아내인 소교는 영화 '적벽대전'을 통해 절세가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음에 담아둔 여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품에 넣었던 조조의 여성편력 속에 후사도 없이 외로운 삶을 살다간 조조의 정부인, 조식으로 하여금 낙신부를 짓게 만든 견비, 사내들 못지않게 용맹한 여장부였던 축융, 후한의 몰락을 앞당긴 태후들의 암투 등등 <삼국지> 곳곳에서 숨어있는 여인들의 극적인 삶을 만나볼 수 있다.

 

<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으나 안 읽어본 독자일지라도 독립된 하나의 인물 열전으로 읽어보기에도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기구한 삶이든 화려한 삶이든 여성을 객체가 아닌 주체의 위치에 올려놓고 재조명한 저자의 집필 의도가 색다른 각도에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있으며, 문학적 상상력이 낳은 방대한 장면마다 선명한 색채를 입히고 있는 저자의 필력이 책에서 손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사료와 민간 구비 문학 속에 전해지는 인물평에 대한 비교 분석 및 주석으로 달아놓은 인물 정보도 간과하기 아까운 흥미거리이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규방으로 밀려나 이름 석 자 남기는 것도 여의치 않았던 시대적 기록물이었기에 이 책에서도 남성들의 활약이 또 다른 측면으로 부각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는 하나 절대적인 관점이 아닌 상대적인 관점에서 역사 속 인물을 재조명해보는 저자의 노력만큼은 아낄 필요없는 박수감이다. 무더위가 사라지고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요즈음, 이 책을 읽어보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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