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
홍승찬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1. 책 밖에서 폴짝~~!

 

요즘은 학생들의 수행평가가 여러모로 다양해졌지만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80년대만 해도 방송으로 클래식을 틀어주고 작곡가와 제목을 맞추는 음악시험은 파격적인 실기평가이자 학생들에게는 곤혹스런 난제이기도 했습니다.

그간 가요와 팝송에만 익숙해있던 귀였던지라 처음으로 진지하게 듣게 된 클래식은 마치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처럼 낯설고 복잡하게만 들려 곡을 구분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테이프에 녹음한 클래식 20여 곡을 수십 번 되돌려 듣기를 하다보니 어느 새 따분함과 무거움은 서서히 편안함과 익숙함으로 바뀌어 들려오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제 클래식 사랑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들을수록 편안한 생활 속 배경이 되는 클래식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는 딱딱하고 지루한, 접근하기 어려운 음악 장르가 돼버린 것 같아 클래식 애호가로서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삶 자체가 느리게 흘러가던 클래식 음악의 탄생시기보다 스피드를 강조하며 빨리빨리를 외쳐대는 요즘이야말로 클래식이 주는 '여유와 휴식'의 효과는 더욱 더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싶네요.

'클래식은 어렵다'라는 편견보다 '클래식은 편안하다'라는 편견 깨기가 클래식 다가가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 <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은 클래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보다는 얼마나 느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책입니다.

이 책의 소개글 중 '지식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느낌을 공유하려는 것'이라는 문구가 특별한 울림으로 와닿은 건 저 또한 제 작은 경험 속에서 공감하게 된 접근법이기 때문이겠죠?

클래식이 머나 먼 고전이 아닌 가까운 생활 속 배경음악이 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강의가 저자의 깊이있는 전문성과 수려한 문장 속에 고스란히 전해져 글 한 편에 담긴 곡 하나 하나를 다시 찾아 들어보게끔 합니다.

 

이 책은 단순한 곡 해석이나 작곡가의 삶 소개가 아닌, 클래식에 관한 소소한 정보와 뒷 이야기가 소리로 듣던 음악에서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움직이는 음악으로, 검은 음표 넘실대는 오선지에 색이 덧입혀진 눈으로 보는 음악으로, 음악도 결국은 사람 사는 풍경을 담은 휴먼다큐임을 전해주는 감동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옵니다.

기어히 여행지까지 손에 들고 가게 만든 <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은 최근에 읽어본 음악관련 책 중 단연 으뜸입니다.

저자의 겸손한 표현 그대로 '안다고 뽐내기 위해 씌어진 책'이 아닌,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픈 음악 사랑이 돋보이는 책이기도 하고요.

 

살면서 우리에게 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을 4악장 47장면으로 구성해놓은 이 책은 제1악장 '스타카토처럼 경쾌하고 활기차게', 제2악장 '안단테처럼 느긋하고 여유롭게', 제3악장 '비바체처럼 열정적으로', 제4악장 '칸타빌레처럼 흘러가듯이'라는 음악적 표지로 각 장면을 나누고 있습니다.

대분류 제목이 주는 압축적 표현처럼 음악적 영감이 우리네 삶 속에 얼마나 환상적으로 잘 들어맞는지를, 얼마나 낭만적인 배경이 돼주고 있는지를, 얼마나 커다란 위로와 힘이 돼주고 있는지를 두 세 편만 읽어봐도 금세 공감이 될 것입니다.

 

2. 책 속으로 풍덩~~~!

 

20세기 대표적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뛰어난 승부사 기질로 클래식의 흐름까지 바꾸어놓았으며, 세계적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제안을 종신지휘자로 요구하는 등 과감한 도전과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는 또한 음반 작업에 회의적이던 당시에 음반사 EMI의 제안으로 음반 작업에 적극 뛰어들어 클래식의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오늘날 CD의 분량이 70여분이 된 것도 그가 소니사에 제안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규격 제안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하이든의 '놀람교향곡'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귀족들의 형식적 우아함을 풍자하기 위해 나른한 졸음이 오는 순간, 객석에서 졸고있는 관객을 깨우기 위해 느린 악장에서 시작해 갑자기 모든 악기가 큰 소리를 동시에 내는 놀람으로 이어져 모두를 즐겁게 놀라게 하는 유머와 위트를 보여주는 곡입니다.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귀족들이 우아한 품격을 덧입히고자 음악회를 찾았던 당시의 풍경을 생각해보면 하이든의 유머야말로 고품격 위트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연 직전의 리허설에서 보여지는 숱한 장면이야말로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에 본 공연보다 더 인간적이고 감동적이라는 저자의 시각은 성취 이전의 과정이 주는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팽팽한 의견의 대립과 조화를 위한 양보가 우리 삶 속의 모습을 축소해놓은 것 같아 더더욱 공감이 가기도 하고요.

 

세르비아 민병대가 사라예보에 쏜 포탄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22명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목숨을 건 22일의 연주를 감행한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의 용기있는 연주는 음악이 해낼 수 있는 수많은 아름다움 중 가장 숭고하고 값진 감동을 선사해주는 장면입니다.

22일 동안 적군 앞에서 알바니노의 '아다지오'를 연주하며 그가 들려준 음악은 첼로라는 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아,닌 '전쟁 없는 평화를 위해 무고한 희생을 치르지 말자'라는 함성이었을 겁니다.

저격병의 마음조차 음악으로 녹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값진 효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책에는 재미있는 실험에 관한 소개도 있습니다.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출근길 지하철역 앞에서 거리의 악사로 변장해 연주를 했는데 그때 벌어들인 돈이 총 32달러였다고 합니다.

1분에 1000달러를 벌어들이는 연주자가 45분 동안 32달러를 벌어들인 거리 공연은 우리나라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 씨의 이벤트로 이어져 인구 이동이 많은 강남역 앞에서 똑같이 45분을 연주한 결과 1만 6900원을 벌어들입니다.

'온통 근심 걱정 때문에 서서 구경할 시간조차 없다면 도대체 이걸 산다고 할 수 있는가'(p59)라는 문구로 죠슈아 벨의 거리연주 상황을 끝맺은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사는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삶의 여유와 휴식을 되찾고자 하는 이 책의 의도와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던 나폴레옹은 수도 빈에 머물고 있던 당대의 대음악가 하이든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하이든의 집을 경비토록 했으며, 전쟁광 히틀러는 평소 바그너를 끔찍하게 좋아해 극비 작전명에도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을 딴 '발퀴레'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합니다.

 

클래식 연인 중 슈만과 클라라는 너무나 유명한 커플이라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브람스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클라라에 대한 절제된 사랑은 관계에서 오는 제각기 다른 사랑법의 숭고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애틋하게 들려줍니다.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평생 사랑했으면서도 단 한번도 고백하지 못한 채 슈만 사후에도 클라라를 온정으로 보살핀 브람스는 클라라의 죽음을 앞두고 그녀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자 '4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합니다.

 

평소 베토벤을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베토벤의 음악세계를 똑같이 닮아가고자 노력했던 슈베르트는 오히려 베토벤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게 되고 그 유명한 명작 '미완성 교향곡'을 남기게 됩니다.

형식적으로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 완성작이라 평가받을 수 있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의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오늘밤, 다시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이밖에도 일일이 소개하지 못한 여러 편의 글들이 아직 이 책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의 호기심을 긍정적으로 자극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 삶 속에 진정 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서평을 맺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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