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암 정채봉 전집 동화 3
정채봉 지음, 송진헌 그림 / 샘터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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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근 한 달여간 효석이를 방치해둔 채로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모든 것이 금세

엉망이 돼버려 집안 구석구석이 참 가관이다.

무엇보다 효석이 생활태도가 여기저기 틀어져 요즘 내 잔소리가 많아지고 심해졌다.

무엇이든지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것은 쉬운 법이다.

추락과 붕괴는 그래서 순간이다.

목소리를 높여 야단치는 일이 많아지다보니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챙겨준 것도 없어 미안한 마음에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동화책 '오세암'을 읽어 주었다.

 

피곤한 눈으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도 귀는 내게로 향해 있는지 효석이는 중간중간 킬킬 웃는다.

엄마 없이 떠도는 오누이 '감이'와 '길손이'가 설정스님을 만나 절에 들어가

함께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길손이의 엉뚱하고도 장난스러운 말과 행동이 우스운 모양이다.

눈이 먼 누나에게 '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스님 옷 색깔을

'맛없는 나물국 색'이라 표현하는 길손이.

탑을 돌며 복 달라고, 명 달라고, 극락 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보며

"부처님도 참 성가시겠다. 나 같으면 부처님을 즐겁게 해 드릴 텐데..."

라는 순수한 동심을 가진 아이.

바람은 안 보이지만 바람의 손자국과 발자국은 뒹구는 낙엽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꼬마시인 길손이.

장난이 심해 선방으로 불개미를 잡아와 스님들의 바짓가랑이 사이에 넣기도 하고,

날짐승을 선방에 풀어넣기도, 방귀를 뿡 뀌고 달아나기도 하는 길손이는 젊은 스님들에게는 골칫거리지만 장님인 감이 누나에게는 세상을 보여주는 눈이요,

큰스님에게는 순수한 마음의 눈을 지닌 꼬마 불제자이다.

그러다 큰스님이 수행을 위해 절을 잠시 떠나야 하는 상황이 돼버리자 스님은 길손이가 혹 눈칫밥에 골치덩이가 될까 염려돼 길손이를 데리고 가게 된다.

혼자 남은 감이는 잠시라도 길손이와 떨어져 있는 게 싫었지만 스님의 뜻을 헤아리고는 순순히 길손이를 보낸다.

관음암이란 암자에서 겨울을 나는 길손이와 스님.

길손이는 이곳에서도 자연을 벗 삼아 혼자서도 즐겁다.

"누나, 꽃이 피었다. 겨울인데 말이야. 바위 틈 얼음 속에 발을 묻고 피었어.

누나, 병아리의 가슴털을 만져본 적 있지? 그래, 그처럼 아주아주 보송보송해.

저기 저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봐."

빨래를 널고 오던 스님이 묻는다.

"너 조금 전에 누구한테 말을 했느냐?"

"감이 누나한테 했어."

"감이는 아래 큰절에 있지 않느냐?"

"아유, 답답해. 누난 지금 내 곁에도 있는 거야. 감이 누나가 그랬어. 내가 있는 곳엔 어디고 감이 누나 마음도 따라와 있겠다고."

어느 날, 길손이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낡은 방에 들어가게 된다.

문둥병에 걸린 스님이 묵었다던 골방 한 쪽 벽에는 머리에 관을 쓴 보살님 그림 한 폭이 길게 걸려 있고, 길손이는 왠지 모를 친숙함에 이때부터 매일 그 골방을 찾게 된다.

"계곡의 고드름이 하늘에서 늘어뜨린 동아줄 같아요. 스님은 김치를 꺼내다가 얼음 조각에 손가락을 베었어요. 보살님도 춥지요? 가만 있어요. 내가 솔가지 긁어 와서 군불 넣어드릴게요."

"아유 냄새! 보살님이 뀌었지?"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엄마가 없어요. 엄마 얼굴도 모르는 걸요. 정말이어요. 내 소원을 말할게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약속하지요? 내 소원은....... 내 소원은....... 저......... 엄마를 ........... 엄마를 가지는 거예요. 저........ 엄마........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엄마, 삶은 밤이어요. 스님이 다섯 개를 주셨어요. 내가 네 개를 먹었지만 가장 큰 것은 남겨 왔어요. 어서 잡수셔요. 참 맛있어요."

길손이가 관음보살 탱화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면 관음보살은 소리없이 조용한 웃음으로 길손이를 내려다 본다. 그런 관음보살님이 엄마처럼 느껴저서인지 길손이는 골방을 수시로 드나들며 혼잣말을 해댄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양식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가게 되고 길손이 혼자 관음암에 남게 된다.

"길손아, 내일 내가 없는 동안 무섭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관세음보살을 찾거라. 알았지?"

"그러면 관세음보살님이 오셔?"

"오고말고. 네가 마음을 다하여 부르면 꼭 오시지."

"마음을 다해 부르면? 그러면 엄마가 온단 말이지?"

"이녀석아, 엄마가 아니고 관세음보살님이라니까."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어느새 정강이가 푹푹 빠질 만큼 쌓이고 스님은 장터에서 양식을 구하자마자 혼자 있는 길손이가 걱정이 돼 눈길을 뚫고 관음암을 향해 산을 오르지만, 폭설로 쌓이기 시작한 눈은 어느새 길조차 눈속에 파묻혀 방향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스님은 부처님과 길손이를 부르다 눈 위에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지나가던 농부의 도움으로 목숨은 구했으나 혼자 있을 길손이 생각에 끙끙 앓는 상황에서도 길손이를 찾는다.

스님이 큰절에 있는 감이를 데리고 관음암에 오르게 된 건 길손이를 홀로 두고 온 지 한달이 넘은 시간.

"스님, 냄새가 나요."

"사향노루 내음 말이냐?"

"아냐요. 우리 길손이 내음이어요."

"스님,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으셔요?"

"무슨 소리? 지금 윙윙거리는 저 소리는 전나무를 울리는 바람 소리인데."

"바람 소리, 새 우는 소리말고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셔요?"

"감이야, 그건 딱따구리가 고목을 쪼는 소리란다."

"스님, 우리 길손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스님, 딱따구리 소리가 아니어요!"

"암자에 떠돌이 스님이라도 와서 묵고 있단 말인가."

스님도 바람결에 들려온 목탁소리를 듣고는 서둘러 관음암으로 향한다.

"스님, 가만히 들어 봐요. 목탁소리말고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하는 소리가 들려요."

"저......저.....저.......저 소리는........"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두 사람 앞에 길손이가 나타난다.

"길손아, 너 살아 있었느냐?"

"엄마가 오셨어요. 배가 고프다 하면 젖을 주고 나랑 함께 놀아주었어요."

길손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음봉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소리없이 내려오더니 길손이를 품에 안는다.

"이 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 과연 이 아이보다 진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 아이는 이제 부처님이 되었다."

길손이는 관세음보살의 품 안에서 평화롭게 잠들고 그 순간 감이는 감았던 눈을 뜬다.

"스님, 파랑새가 날아가고 있어요!"

길손이의 장례식에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길손이가 골방에서 만나 본 탱화 속의 관세음보살을 향해 자꾸자꾸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이 암자의 이름을 다섯 살짜리 아이가 부처님이 된 곳이라고 해서 아예 '오세암'이라고 바꿔 부르기로 했다.

길손이와 감이를 돌보아온 설정스님은 부처님 공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감이는 막상 눈을 뜨고 보니 길손이가 말해주던 세상에 비해 훨씬 못미치는 풍경에 실망하고는 더욱 길손이를 그리워하게 된다.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길손이 앞에서 사람들은 일제히 절을 하고, 감이만이 울면서 중얼거린다.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효석이는 중간에 잠이 들었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다.

듣는 이가 없는데도 나는 책을 덮지 못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예전에도 읽어본 책인데 또 새롭다. 또 뭉클하다.

내 아이에게 꼭 읽혀주고 싶은 책, 그래서 내가 한 번 더 보게 되는 책, 오.세.암.

이미 고인이 된 정채봉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건 스무 살 무렵 읽게 된 <초승달과 밤배> 때문이다.

이후 선생님의 글들을 찾아 읽으며 그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빠져들었는데, 후에 알고보니 월간 잡지 <샘터>의 편집인이라고도 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통해 작가의 정신 세계와 정서적 농도를 추정해 볼 때 정채봉 님의 글들은 항상 맑다.

맑아서 오래 가는 향기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멋이 있다.

'순수'라는 게 가급적 치장을 줄이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미를 드러내는 법인데, 선생님의 글이 그러하다.

덕분에 좋은 밤이다.

잠시나마 내 영혼을 맑은 개울물에 씻기우는 깨끗함과 시원함을 맛볼 수 있어 행복한 밤이다.

효석이에게 내일 마저 읽어줘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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