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는 어떤 책인가. 처음부터 제자들이 공자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제3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자들이 서로 공유하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무엇을 기록하는가? 자신이 감동받았고 잊고 싶지 않은 것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2500년 전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기록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매우 압축된 표현으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풀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첫번째 글은 아마 상징적이고 대표성을 띤 글이었을 것이다.

 

배움(學)이란 본받음이다. 우리는 언제 배울까? 부족함과 결핍을 자각할 때 배운다. 그럴 때 변화와 성장을 하게 되고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통해 배운다.

 

익힘(習)이란 낯설던 것이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린 새가 비행연습을 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둥지 밖으로 떨어지는 어린 새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성장한다.

 

기쁨(悅)은 내면의 희열이다. 배움은 새롭고 낯선 것과의 만남을 통해 일어나고 익힘으로써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렇게 변화하고 성장하여 내가 보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 때 기쁜 것이다.

 

벗(朋)은 누구인가? 같은 길을 가는 자, 즉 도반이다. 길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가치를 부여하는 행이다. 도반은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을 같이하는 자이기도 하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도반은 스승이다.

 

온다(來)는 것은 방향성이 있음을 말한다.

 

즐거움(樂)은 여럿이 함께 느끼는 것이다. 각자의 희열이 모여서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그 파장이 세상의 변화로 이어질 때 즐겁다.

 

남이 알아주지 않기(人不知而) 때문에 나의 배움이 의미가 없는가? 남들의 평가나 물질적 이익을 바라는 심리 때문에 곡학과 아세를 하게 된다. 배움이란 앎이고 앎이란 나의 관점과 사유가 성장하고 그 결과 인격이 성장하는 것이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나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앎을 활용하고 가공하게 된다. 결국 남을 위한 배움은 왜곡을 가져 온다. 배움은 남을 위한 것이지만 배움의 주체가 변해야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好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채워지지 않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일상의 삶의 태도가 드러나는 일과 말에 있어서 민첩하고 신중해야 한다. 또한 도가 있는 곳, 즉 스승과 책을 통해 수정해가야 한다. 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배움이 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이라면 생각함(思)은 배운 것을 자기화시켜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되새기고 검증하고 정리하고 성찰하지 않고 배운 것을 재생만 하는 것은 속이는 짓이다. 생각은 맷돌과 같아서 배움이 없으면 생각할 수도 없다. 알고 있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자기완결적인 것으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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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대로(살던 대로) 살면 편하고 쉽다. 그러나 방향을 전환하고 새로운 걸 시작하려면 마찰력 때문에 처음엔 힘들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마찰력은 점점 약해지고 다시 관성이 생기기 시작해 점점 쉬워진다. 새로운 일에 적응이 되면 다시 편하고 쉽게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익숙함과 낯섬의 반복으로 유지된다. 만약 익숙한 일만 하거나 낯선 일만 한다면 어떨까? 너무 지루하거나 너무 긴장되거나 할 것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떠나는 것이다. 관성대로 생각하고 보고 느끼고 믿던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탐구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한 여정은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항상 똑같은 생활을 한다면 굳이 기록을 남길 이유가 없다. 오늘의 일에서 뭔가를 성찰하고 내일의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이순신 장군은 무려 ?년 동안 <난중일기>를 썼다. <조선왕조실록>은 500년 동안의 기록이다. 그런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 기록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공부란 생각하고 탐구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곰곰이 따져보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좀 더 나은 삶이란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행복한 삶이다. 만약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행한 괴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을 하더라도 올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해로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나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 비춰볼 거울이 필요하다. 독서라든지 체험(여행이나 경험)이라든지 관찰이나 실험이라든지 스승이나 존경할만한 친구들이라든지 가족과 같은 다양한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연구하지 않으면 남이 나를 연구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남의 연구의 실험용 쥐가 되어서 자유와 행복을 빼앗기고 말지도 모른다. 탐구한다는 것은 나와 주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라고 한다. 나와 자연, 나와 이웃, 나와 사회, 나와 역사, 나와 우주 등등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올바로 관계 맺고 살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탐구는 탐구 그 자체에 기쁨이 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거나 보물을 발견하는 느낌일 것이다.

 

생각하고 탐구하는 과정에 기록이 빠질 수 없다. 기록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기록을 보면서 기억을 간직한다. 왜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는 것일까? 돌, 결혼식, 졸업, 여행 사진 등등 특별한 날에 사진을 찍는 이유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순간을 붙들어두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더 많이 흐를수록 그런 기록은 더욱 소중해진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록을 통해서이다. 한편으로 시간 또는 역사는 반복된다고도 한다. 좋은 것이 반복된다면 괜찮겠지만, 나쁜 것이 반복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을 한다는 것이고, 탐구(질문)한다는 것이며, 기록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를 알려면 내가 더 행복해졌는지를 보면 될 것이다. 만약 행복해지지 않았다면 잘못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와 다른 내가 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변화되고 있다면 그 속에 기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변화가 없는 상태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똑같은 음식만 먹는다면 지겨울 것이고, 아무리 게임을 좋아해도 똑같은 게임만 한다면 지겨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한다면 나는 점점 더 많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변할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제대로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식을 배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은 이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알 수 있는 지식을 배우는 건 공부가 아니다. 찾아낸 정보를 활용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공부다. 교과서를 읽든 독서를 하든 실험관찰을 하든 그림을 그리든 음악을 만들든 글을 쓰든 스포츠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탐구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새로움이 없다. 새로움이 없다는 것은 기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새로운 점이 있는 변화를 느낄 때 기쁨을 느낀다. 그런 기쁨이 없다면 힘들게 공부할 필요가 없다.

 

변화는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만 나의 기쁨만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세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의 변화에도 조금은 기여할 수 있을 때 나의 기쁨도 나눌 수 있다. 기쁨은 나눌 수 있을 때 더욱 커진다. 나와 세상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과 동떨어진 채나의 기쁨에만 머물지 않고 나의 기쁨을 같이 나눌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나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의 삶은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생과 자연과 역사와 우주 등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이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이 세상에 나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일은 없다. 어떤 질문을 품고 그 답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 굉장히 궁금한 것이 생기면 모든 게 달라 보인다. 꼭 알고 싶은 게 생기면 늘 유심히 관찰하고 곰곰 생각하고 질문하고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호기심과 열정은 점점 더 커진다. 그래서 공부는 죽는 순간까지 끝이 없다. 죽기 전까지 공부하는 사람은 아마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늘 새로운 발견 속에서 기쁨을 느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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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데 광적일 정도이지만, 예전 사람들은 자연을 수량화한다는 것이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이를테면 온도나 시간, 속도를 측정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측우기를 만들어 강우량을 측정하고자 했다는 자체가 놀라운 점이다. 자연을 관찰해보면 숫자는 보이지 않는다. 속도와 같은 질적인 개념을 측정한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측정을 함으로써 물리학은 수학과 연결짓게 된다.

 

측정이란 관측을 더욱 정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측정을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우선 기준을 설정하는 것부터 힘들다. 온도 측정만 해도 기준이 매우 다양했다. 온도나 시간의 측정의 역사를 살펴 보면 우선 인간의 감각을 바탕으로 한 기준을 설정한다. 그리고 측정도구를 사용하여 감각을 수정한다. 그리고 측정도구 역시 계속 수정하고 재검토된다. 절대온도를 만든 켈빈 경의 경우 측정하지 않는 이상 과학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과학의 발전은 바로 측정의 발전이었다. 측정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다. 완벽한 시발점 또는 완벽한 지식은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이미 갖추어진 기준을 가지고 탐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다시 수정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과거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바탕 위에서의 진보다. 보수와 진보의 융합이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순환하면서 진보하는 나선형 발전 이론이다. 사회발전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식은 완벽하지 않지만 개선되어 간다는 점에서 점진적 발전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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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적 탐구의 여정

한 사람의 수학자로 분류되기보다는 어떤 유형의 수학적 작업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수학에 흥미를 가진 것은 우연한 계기였으며 수학적 소질도 뒤늦게 드러났다. 1946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스승 앙리 카르탄의 연구와 샤를 에레스만의 세미나를 통해 대수적 위상학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상이한 다양체를 연속적인 변형을 통해 다시 연결하기 위해 그들을 순수하게 대수적인 항들로 환원시켰다. 1954년 논문에서 코보르디즘의 문제를 해결하고 언제 다양체가 다양체-경계가 되는가를 알 수 있는 대수적 과정들을 제시했다. 수학을 오직 형식화된 이론들에 국한시키는 부르바키주의에 반하는 입장을 정립했다. 수학 현대화 운동은 수학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수학은 그 자체로서 정초될 수 있다(집합론 등)거나 하나의 추상적 무의미로 환원된 총체성이 될 수 있다(범주론 등)는 수학 기초론에 반대한다. 성층화된 집합의 개념을 도입하여 미분 가능한 적용들의 특이성들을 어느 정도 분류하고, 적용의 특이점의 보편적인 전개와 같은 카타스트로프이론의 핵심적인 개념을 이끌어냈다. 보편적인 전개란 하나의 특이성 안에 포함되는 모든 내적인 정보를 ‘전개시키는’ 방식으로 어떤 적용의 한 단일성은 항상 하나의 국지적인 구조 안에 모든 거대한 구조들을 응축시키고 있다. 보편적 전개라는 개념은 하나의 미분 가능한 함수 씨앗이 있을 때 국지적으로 하나의 테일러 전개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무한수열에 의해 기술되는 한 국지적 함수를 유한한 항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수열로 환원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한에서, 이 씨앗의 모든 가능한 변형들을 기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1966년 4차원의 또는 그 이하의 전개와 더불어 나타나는 7개의 단일성들을 제시하였고 그 후 그들은 7개의 기본적인 카타스트로프들로 해석되었다. 카타스트로프이론은 수학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수학은 아닌, 애매한 이론이다.

 

물리학에 대하여

이론물리학은 수학과 가까운 분야이지만 더 섬세한 유형의 직관력을 요구한다. 특히 양자역학, 그 중에서도 재정상화라는 알고리즘은 갈라짐의 이론에 연결된다. 개념적으로 매우 조잡한 이론들로부터 출발해 수적으로 매우 엄밀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이론물리학의 과학적 실천의 방식은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뉴턴적 입장의 결과로서 하나의 공식이 잘 적용이 되면 설명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을 채택한다. 오늘날 물리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인 축적은 상당히 이루어졌지만 그들을 정합적인 방식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이론적인 노력들은 기초적인 수준이다. 양자역학은 물리학적 존재들(물질, 방사선 등)과 연관하여 시간·공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문제 등을 제기한다. 시간-공간을 기본적인 존재로 보는 아인슈타인에 반해 ‘코펜하겐 해석’은 기본적인 존재는 관찰자에 의해 지각된 현상이라는 관점이다. 문제는 각 관찰자들의 상이한 관점들을 종합하는 것이며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모든 성과가 보편적 동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식의 행위에 있어 늘 근본적으로 불가역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지만 물리학자들은 이와 같은 불가역성의 측면을 지워버림으로써 현상들은 가역적인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거시적인 물리학에서는 불가역성이 기본적이라는 데 역설이 존재한다. 거시적 수준에서 불가역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근본적 수준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불가역성의 개념은 문법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다”와 같이 명사와 동사의 구분은 이미 불가역성을 전제하고 있다. 불가역성은 상호 주관적인 동의와 양립하며 그 동의는 일상언어의 사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불가역성에 대한 수학을 구성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주어진 초기 조건에서 출발해 궤적의 점근적인 상태들을 탐구할 수 있으며 이때 극한 자체에 있어서 시간의 효과를 제거하기 때문에 물리학적 법칙이 가역성을 띠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간적인 상태들을 망각하며 양자역학에서 양자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비약한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 전이를 인식하거나 기술할 수 없다. 물리학으로부터 생물학으로 불가역성을 외삽할 때 프리고진이 ‘소산적 구조들’이라고 불렀던 것은 열역학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열역학으로 제시됨으로써 오도하면 면이 있다. 반면 불가역적인 동력학의 한계적인 상황들에 기하학적인 모델들을 부여하려 했고 카타스트로프이론에 있어 전형적으로 불가역적인 현상들에 개념적 구조들을 부여하고자 했다. 카타스트로프이론은 거시적인 물리학을 그 자체로서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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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한다는 것 - 남창훈 선생님의 과학 이야기 너머학교 열린교실 2
남창훈 지음, 강전희 외 그림 / 너머학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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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한다는 것의 의미를 과학자인 저자의 경험 속에 녹여 풀어놓고 있다. 저자가 연구하는 분야가 몹시 흥미로왔다. 박테리오파지라는 박테리아를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세균이 박테리아 속으로 들어갈 때 일어나는 일을 연구하는데 항암제나 항체를 개발하는 실험과 관련있다.

 

탐구한다는 것은 우선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은 의심하는 것이고 상상력이기도 하다. 이 탐구를 하기 위해선 지식이라는 지도가 필요하지만 잘못된 지도는 통째로 고칠 수도 있어야 한다. 탐구는 모방에 가깝기도 하다.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해 항체를 만드는 과정이 그렇다. 그러나 탐구로 자연을 정복한다는 발상은 위험한 것이며 탐구는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를 밝히고 그 관계를 회복하고 공생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활동이다. 인간 복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착상 과정을 본뜬 것인데 아직은 무모한 일이며 왜 인간 복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먼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 자연은 무엇일까.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100조개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사람의 몸이 우주와 같다는 말이 허풍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간의 부족한 지식으로 모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그 불안 때문에 우리 몸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우리가 먹은 음식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마치 한 몸이나 다름없이 관계 맺으며 살고 있다. 탐구를 함으로써 자신의 참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중심이라는 생각으로 지구의 자원과 생명체를 써 버린다는 것은 과학 탐구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질문하며 살고 있는가. 점수를 따기 위한 탐구를 한다면 그것은 죽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질문한다는 것은 지식이 살아있기 위해 호흡을 하는 것과 같다. 돈이 되는 질문(연구)만 지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탐구로 얻은 지식이 어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소유가 되기 쉽고, 인간과 주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고 정립하기 위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탐구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질문을 되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관찰과 탐구의 대상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관계맺기, 길들여지기의 과정에서 질문을 던지게 되고 탐구자의 대열에 서게 된다. 죽은 지식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서는 우리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사려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껍질을 벗겨 보면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훨씬 투명하고 올바르게 볼 수 있다.

주변의 사물들에 관심을 애정을 지니고, 죽어 있는 지식의 껍질을 벗기고, 일상 속에 담겨 있는 질문들에 주목할 수 있어야 우리는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여러 과정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비로소 발견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p.114

과학 기술이나 실험 등을 떠올리면 삭막하고 어렵고 따분하다는 생각을 먼저 하지요. 하지만 ‘탐구하는 것’은 뜨거운 열정과 따스한 동료애, 그리고 베일 벗은 세상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따로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탐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입니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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