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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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0613

호메로스 서사시를 읽었기 때문인지 비극의 내용이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다. 그리스 신화나 전설에 익숙해지고 있다. 주석을 같이 보면 흐름이 좀 끊어지기 때문에 먼저 본문을 한번 읽고 나서 주석만 따로 읽고 마지막으로 본문을 한 번 더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역시 단테나 셰익스피어가 저절로 나온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서양 문학을 읽어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관문 같다.

문학의 세계는 얼마나 넓은 걸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을 해석한 신화와 신화에 바탕을 둔 서사시와 서사시에 바탕을 둔 비극 등으로 이어지는 문학의 역사를 통해 인문학적 해석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비극에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자긍심과 함께 몰락의 전조도 있을 것이다. 제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찬란했던 한순간이 담겨 있는 셈이다.

문학은 문제의 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각자의 생각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집단의 생각이 각자의 삶을 규정하기도 한다. 문학은 다양한 각자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회가 나아갈 좀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신화와 전설을 구전으로 전하며 그랬듯이 말이다.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을 옹호한 인물일 것이다. 그는 비극이 작중 인물의 첨예한 갈등과 극적인 사건의 플롯을 통해 관객이 진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플라톤이 수학자라면 수학의 근본인 수와 문학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자에 가까웠기 때문에 생물학의 근본인 생명과 문학은 서로 가까울 수밖에 없을까. 수가 지배하는 요즘 세상에 문학이 설자리가 있을까.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은 문학을 버릴 수 없을까.

꿈꾸는 기계와도 같은 인간은 세상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기계는 꿈꾸지 않고 꿈은 기계가 아니다. 언젠가 먼 훗날 더 이상 꿈꾸지 않는 기계가 된다면 문학은 영원히 사라지겠지만 기계가 되느니 꿈을 선택한다면 문학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이 원한을 품고 하는 말은
무서운 법이니, 백성들의 입에서 나온
저주는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이라네. - P47

이제 할 말을 충분히 했다면, 이 사람들더러 양심에 따라
정의의 투표석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 P179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남자들의 위력에
예속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사랑 없는 결혼을 피해
별나라 밖으로까지 도망가서라도 구원을 찾을 거예요.
그대는 신들에 대한 경외심을 전우로 삼아,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세요. - P313

하지만 잘 알아두게. 나는 내 이 불행을
자네 종살이와는 결코 바꾸고 싶지 않네. - P386

그가 전하기 전에 이미 나는 전언을
알고 있었소. 서로 미워할 경우 적의 손에
고통당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오. - P388

인간은 행동함으로써 죄를 짓게 되고, 죄는 고통스런 벌을 수반하게 되고, 고통은 인간을 지혜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와 벌과 지혜의 인과관계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이 죄를 짓고자 할 때 기꺼이 협조해주는 신이라는 독특한 발상과 만나게 된다. -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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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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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작가는 <혼불>을 완성하지 못하고 작고했다. 아쉬움이 크지만 10권을 읽으면 앞으로의 전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과연 한민족은 누구이며 한민족의 꿈은 무엇인가를 천착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답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꿈을 저버리지 않는 한 불멸할 수 있다. 그 생명의 꽃심은 하찮아서 장하다’. 그 하찮아서 장한 꽃심을 지닌 들풀같이 질기고 천한 백성이 지키고 싶은 나라, 꿈꾸는 나라, 망해도 망하지 않는 나라, 진정 강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10권에서 드디어 강실과 강모를 예수와 베드로에 비유하면서 큰 비약을 이룬다. 죄없이 못박힌 예수와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죄없이 고통받는 강실과 강실을 버린 강모. 그런 사태의 주범은 유대 사회를 속박한 유대 율법의 가차없음과 같이 조선 사회를 속박한 유교 윤리의 가차없음이다. 유교적 질서가 어느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이자 도구로 전락한 조선은 결국 외세에 짓밟히고 미친 개와 같은 일제의 수탈을 당하며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어지고 있다. 시체들이 널려있는 만주 벌판을 유랑하는 조선인들의 비참한 참극은 형용하기 어렵다.

만주에서 강모는 베드로가 될 것인가, 빌라도가 될 것인가, 갈림길에 서 있다. 매안에서 온 부서방네 아이 둘의 죽음을 목격한 강모는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 생존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성찰에 이른다. 매안에서 효원은 강실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 앞에서 마침내 마음 속의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살아만 있기를 기도한다. 강실을 버린 강모와 효원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기존의 질서에 맞설 수 있는 도덕적 자각과 각성이 싹튼 것이다. 동경 유학생 강호와 사회주의자 강태 역시 유교의 틀에서 벗어나 생명의 씨앗과도 같은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청암부인의 품 안에서 자라난 이씨 문중의 손자 손녀 손부들이 유교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어선 청암부인과 같이 스스로의 자각에 의한 주체적 변화와 성장이기 때문이다. 청암부인이 준 쌀 한 가마니는 부서방에게도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 만주 땅에서 스스로 살아볼 큰맘을 일으켰다. 민족의 자취를 찾아 만주까지 온 심진학 선생 역시 식민지 청년들의 등불이다.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의 말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 가장 약한 자가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나라. 예수가 꿈꾼 그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 나라는 개인의 양심과 윤리를 보호하는 나라일 것이다.

혼불의 대미는 효원의 간절한 부름으로 끝난다. 효원의 행동하는 양심이야말로 청암부인의 혼불일 것이다. 모두 한 할머니의 자손인데, 왜 서로 미워하는가. 오직 모든 생명을 귀하게 아끼고 아낄 뿐이다.

이제……부디……그대가 살아서, 나를 용서해 주오.
효원은, 강실이의 목숨만이 자신의 생애를 건져 줄 수 있을 것 같아, 한없이 까라지려는 몸을 추스르며, 강실이 얼굴을 부른다.
강실이가 비록 누항의 시궁창 그 어떤 질곡에 빠져, 말로 못할 더러움을 겪고 있다 하여도, 그네가 온전한 몸으로 살아만 있다면, 효원은 이 무서운 죄책에서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에……어디에 있소…….
효원은 등을 구부리고 기도하듯 강실이를 부른다.
그 온몸에 눈물이 차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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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일류의 조건
사이토 다카시 지음, 정현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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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하는 일류란 특정한 분야의 일류가 아니라 모든 일에 숙달에 이르는 보편적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일류를 말한다. 숙달의 보편적 원리란 기본기를 다져주는 세 가지 힘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이다. 세 가지 힘이란 훔치는 힘(모방)’, ‘추진하는 힘(실행력·추진력·기획력)’, ‘요약하는 힘(요약·질문력 포함)’이다.

이 책은 숙달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놓고 관련된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다소 난삽한 느낌이다. 그만큼 압축적이고 밀도가 높다고 할 수도 있다. 저자가 숙달을 키워드로 내세운 이유는 에너지의 연소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불완전 연소된 에너지가 분노 발작 같은 많은 심리적 사회적 문제를 낳는 원인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에너지가 완전 연소되어야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숙면을 취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좋은 삶과 좋은 죽음도 가능해진다. 에너지의 완전 연소에 숙달만큼 좋은 과정은 없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숙달에 이르는 과정에 의해 경제 생활은 물론이고 삶의 의미까지 충족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미덕은 많은 사례를 통해 설명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 자신은 스포츠 훈련과 숙달 원리를 일과 공부에 적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 한 권만으로 내가 어떤 일에 숙달될 수 있을까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본받고 싶은 스타일을 정하고 훈련 계획을 세부적으로 세워서 지속적 의식적으로 훈련을 수행하는 것인데 아직은 모든 게 막연하다. 이 책을 여러 번 읽든지,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 보든지 해야 윤곽이 좀 잡힐 것 같다.

자신에게 필요한 과제를 명확히 하고, 본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있는 신체적 특성을 고려하여 해당 과제를 수행하는 것. 이것이 스타일 구축의 기본적인 원칙이며, 본격적으로 숙달의 보편적 원리를 터득하는 방법이다. 본인의 신체적 특성을 무시한 채 그 영역의 고유한 기술을 몸에 익히면, 막상 영역이 달라지거나 상황이 바뀌었을 때 애써 익힌 그 기술을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신체성을 고려하여, 본인의 방식대로 일관된 변형(스타일)을 통해 제대로 익혀두면, 그 변형은 다른 영역의 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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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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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 <범죄도시>를 보고 참 한국적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들도 그렇고 연출도 그렇고 우직하면서도 코믹하고 인간적인 예의와 배려를 놓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를 이번에 혼불 9권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토록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힘 속에 우리네 근원적 심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 사대부가의 자제로서 동경 유학생인 강호가 호성암 스님 도환과 함께 사천왕을 비롯한 불교의 세계와 단군 신화가 맞닿는 지점으로 안내한다. 절의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의 조상은 그 무시무시한 위세에 질려서라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인데, 예로부터 사천왕 불사를 하는 이유가 호법과 호국에 있었음을 새삼 일깨우면서 일제 말기 명맥을 이어가던 저항 운동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 때 대장경 불사를 일으키고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지어 민족의식을 고취해 국난을 극복하려 했던 것처럼 도환 역시 사천왕 신앙과 단군 신화의 연결을 통해 민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내려는 것이다.

도환의 설명에 따르면, 제석천은 환인이고 사천왕은 환웅이고 인간은 단군왕검이 된다. 천계에서도 인간계와 가장 가까운 사천왕천을 다스리는 사천왕(환웅)은 도리천을 다스리는 제석천(환인)의 아들로서 인간계(조선)에 직접 내려와 인간(단군왕검)을 낳고 지상천국을 건설한다.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나라가 조선이고 하늘의 꿈을 간직한 사람이 조선 사람이다. 그래서 사천왕의 모습에는 어질고 바른 조선 사람의 심성과 얼이 투영되어 있다. 무시무시한 사천왕상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산천을 닮은 푸근한 익살과 해학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어우르는 넉넉함이라고나 할까.

마음은 몸의 바탕이고, 몸은 정신활동의 바탕이고, 정신활동 자체가 곧 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에서 불계에 이르는 열 가지 단계인 십계가 모두 하나의 마음 작용이란 의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제석천과 아수라의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듯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는 조선의 힘 역시 조선의 마음을 되찾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돌멩이 하나에도 깃들어 있고, 사천왕상을 빚은 장인의 손길에도 어려있는 다른 듯 닮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알아 보아야 우리의 땅과 문화를 사랑하고 지킬 수 있다고 강호와 도환을 통해서 작가 최명희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무섭고 사나워도 어질고 귀여우며, 조악해도 어리숙한 이 사천왕과 악귀 죄인 형상들의 달라도 닮은 해학이 눈물겨워, 강호는 한바탕 이들을 끌어안고 창자가 훑이도록 웃음을 터뜨리며 뒹굴고 싶어진다.
알겠다……알겠다……내 이제 알겠다.
알아본 마음을 하염없이 저 묵묵한 흙덩이 가슴에 문지르며 울고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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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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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우스는 모험을 떠났고 떠났던 공동체로 다시 돌아온 인간이다. 젊은 시절 모험의 여정을 통해 성장해야 하며, 성숙한 어른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모범적 인간상인 셈이다. 한 개인의 삶 역시 고통을 통한 성숙과 타인을 위한 희생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돌아와서 그의 살림을 축내고 아들 텔레마코스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왕권을 노린 무도한 구혼자 무리와 주인을 배신한 불충한 하인들을 남김없이 사살한 것은 공동체의 윤리를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응징이고, 구혼자 무리의 가족들이 복수의 무기를 들었을 때 신들이 나서서 화해의 맹약을 맺게 한 것 또한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필연적인 중재였다.

그리스 사회의 성숙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해결하지 못한 사회의 모순은 끝내 그리스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현대 사회 역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인들 또한 오뒷세우스처럼 성숙을 위한 여정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 공동체의 성숙을 도모할 수 있다. 더이상 신들이 직접 나서서 중재해 주지 않으며, 정치인들이 대신할 수도 없다. 각자가 오뒷세우스처럼 각자의 여정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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