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10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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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작가는 <혼불>을 완성하지 못하고 작고했다. 아쉬움이 크지만 10권을 읽으면 앞으로의 전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과연 한민족은 누구이며 한민족의 꿈은 무엇인가를 천착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답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꿈을 저버리지 않는 한 불멸할 수 있다. 그 생명의 꽃심은 하찮아서 장하다’. 그 하찮아서 장한 꽃심을 지닌 들풀같이 질기고 천한 백성이 지키고 싶은 나라, 꿈꾸는 나라, 망해도 망하지 않는 나라, 진정 강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10권에서 드디어 강실과 강모를 예수와 베드로에 비유하면서 큰 비약을 이룬다. 죄없이 못박힌 예수와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죄없이 고통받는 강실과 강실을 버린 강모. 그런 사태의 주범은 유대 사회를 속박한 유대 율법의 가차없음과 같이 조선 사회를 속박한 유교 윤리의 가차없음이다. 유교적 질서가 어느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이자 도구로 전락한 조선은 결국 외세에 짓밟히고 미친 개와 같은 일제의 수탈을 당하며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어지고 있다. 시체들이 널려있는 만주 벌판을 유랑하는 조선인들의 비참한 참극은 형용하기 어렵다.

만주에서 강모는 베드로가 될 것인가, 빌라도가 될 것인가, 갈림길에 서 있다. 매안에서 온 부서방네 아이 둘의 죽음을 목격한 강모는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 생존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성찰에 이른다. 매안에서 효원은 강실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 앞에서 마침내 마음 속의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살아만 있기를 기도한다. 강실을 버린 강모와 효원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기존의 질서에 맞설 수 있는 도덕적 자각과 각성이 싹튼 것이다. 동경 유학생 강호와 사회주의자 강태 역시 유교의 틀에서 벗어나 생명의 씨앗과도 같은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청암부인의 품 안에서 자라난 이씨 문중의 손자 손녀 손부들이 유교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어선 청암부인과 같이 스스로의 자각에 의한 주체적 변화와 성장이기 때문이다. 청암부인이 준 쌀 한 가마니는 부서방에게도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 만주 땅에서 스스로 살아볼 큰맘을 일으켰다. 민족의 자취를 찾아 만주까지 온 심진학 선생 역시 식민지 청년들의 등불이다.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의 말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 가장 약한 자가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나라. 예수가 꿈꾼 그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 나라는 개인의 양심과 윤리를 보호하는 나라일 것이다.

혼불의 대미는 효원의 간절한 부름으로 끝난다. 효원의 행동하는 양심이야말로 청암부인의 혼불일 것이다. 모두 한 할머니의 자손인데, 왜 서로 미워하는가. 오직 모든 생명을 귀하게 아끼고 아낄 뿐이다.

이제……부디……그대가 살아서, 나를 용서해 주오.
효원은, 강실이의 목숨만이 자신의 생애를 건져 줄 수 있을 것 같아, 한없이 까라지려는 몸을 추스르며, 강실이 얼굴을 부른다.
강실이가 비록 누항의 시궁창 그 어떤 질곡에 빠져, 말로 못할 더러움을 겪고 있다 하여도, 그네가 온전한 몸으로 살아만 있다면, 효원은 이 무서운 죄책에서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에……어디에 있소…….
효원은 등을 구부리고 기도하듯 강실이를 부른다.
그 온몸에 눈물이 차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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