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o ergo sum’ 이라는 것이 결국 나를 의심한다면 적어도 의심하는 나는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의심의 주체인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냐, 거기서 자아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성은 왜 믿을 수 있느냐 이것은 신이 준 자연의 빛이다, 그리고 이 이성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수학이다. 수학적인 공리,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지식이다. 데카르트는 독단적으로 가설을 만드는데 그 가설을 만드는 방법은 차근차근 단계를 거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과 같은 직관에서 나온다. 물체는 운동하기 시작하면 계속 뭐가 막지 않는 한 계속하고 정지해 있으면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직선적인 관성인데 그 직선적인 관성을 당대의 갈릴레오도 몰랐는데 데카르트만이 맞추었다. 데카르트는신이 만든 우주인데 우주의 운동량은 일정해야 된다는 가설에서 직선적인 관성에 도달했어요. 데카르트의 뛰어난 천재가 발휘된 경우다. 연역을 하는 과정에서 수학을 활용했다는 점이 데카르트의 장점인데 데카르트가 너무 경험을 무시해버린 것은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의 방법은 과학혁명 후기에서 위력을 발휘했는데 과학에서 사실도 중요하고 경험도 중요하지만 과학은 결국 과감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연역해나가는 과정이 강한 경향이 있고 과학혁명 초기에 그런 식으로 다 과학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경험이 미처 따라오기 전에 그게 앞서가지고 과학혁명을 일으켰고,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독단적인 방법이 매력을 잃지 않고 계속 되는 것 같다.

갈릴레오의 방법은 제일 출발은 베이컨 비슷하게 뭐냐 하면 자료를 가지고 이제 정리를 해서 어떤 가설을 세운다. 그것은 베이컨의 귀납법하고 같은 과정이다. 그런데 가설을 일단 세우면 거기서 수학적 연역을 하는 2단계는 데카르트의 방법하고 같다. 그런데 거기서 결론이 나오면 데카르트 같으면 거기서 끝나고 진리로 확정이 된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거기서 그 한 걸음 더 나아가서 3단계에 가서는 결론을 실험을 해서 확정을 하는 단계가 있다. 그래서 아주 균형이 잡힌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에 대개 한 70년대 이후에는 실험이 실제로 과학에서 수학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갈릴레오를 완전히 이성주의자로 본 해석은 너무 지나쳤다는 것이 요즘에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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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귀납법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어떤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갖는데, 그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반대했다는 점에서 베이컨, 데카르트, 갈릴레오 셋은 일치한다. 그런데 반대는 좋은데 그러나 이 세 사람이 내놓는 방법의 내용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베이컨의 방법은 귀납법이 중요하고 데카르트의 방법은 철저한 연역법이다. 갈릴레오는 귀납법과 연역법을 절충했지만 약간 데카르트 쪽에 더 기울었다.

베이컨의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하고 나는 새로운 방법을 내놓겠다, 그게 New Organ이란 뜻이다. 나는 새로운 기관, 새로운 논리, 새로운 과학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런 기개가 보인다. 데카르트의 경우 진짜 본론인 과학은 아무도 지금 얘기하지 않지만 그 서론으로 쓴 방법론은 불멸의 고전이다. 갈릴레오의 방법이 여러 비본질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요소를 추려내는 방법이다.

과학은 힘이다, 이건 무슨 뜻이냐면 과학은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과학의 가치라는 것이다. 지식이 순수한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응용되어 가지고 인류에게 어떤 복지를 갖다 줘야 된다는 데서 과학의 의의를 찾았다. 과학의 새로운 방향을 베이컨이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18,9세기에 꽃피는 산업문명을 베이컨이 예견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학을 철학과 구분하는 하는 것이 베이컨의 입장이다. 그래서 베이컨은 자연철학은 '원인의 탐구와 효과의 생산'이라고 했다. 'Inquiry of Causes and Production of Effects' 여기서 원인의 탐구라는 것은, 이건 전통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이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이다. 목적론이다. 원인만 탐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지식은 어디까지나 거기서 무언가 생산해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네가지 우상이 있는데 먼저 이돌라 트리부스(Idola tribus) 종족의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경향을 말한다. 이건 타고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돌라 스페쿠스(Idola specus) 동굴의 우상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어떤 개인의 특별한 성벽이라던가, 환경의 영향으로 인간이 길을 잘못들기 쉬운 경향이다. 이돌라 포리(Idola fori) 시장의 우상은 여러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는데서 오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경향인데, 접촉을 통해서 오류가 전해지는 매개는 언어이다. 마지막으로 이돌라 떼아트리(idola theatri) 극장의 우상은 전통이라던가 역사 교권 교권 이제 교회의 권리요, 유행 이런 권위 있는 이런 것들을 권위로 보는 데에서 오는 오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귀납법을 썼지만 자기의 귀납법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의 과정에서 이성이 너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귀납은 불충분한데 거기에서 껑충 뛰어가지고 독단적인 결론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자료를 충분히 수집해가지고 그것을 잘 정리하고 분류하고 차근차근 범위를 좁혀가면서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존재표는 연구하려는 현상이 나타나는 사례를 모으는 것이다. 부재표는 연구하려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사례를 또 모은다. 정도표 또는 비교표는 존재표에 나오는 사례에서 나타나는 정도가 크냐, 작으냐 그 정도에 따라서 또 나누어 분류한다. 이런 식으로 많은 자료를 정리, 분류해서 어떤 연구하려는 현상에 대해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베이컨의 귀납법이다. 그런데 그 규칙이 너무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본인도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이건 우선 형식적인 결함이다. 다음으로 베이컨의 단점은 수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가설이 중요하다는 것도 간과했다는 것이다. 베이컨의 장점으로 사실수집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인 면보다는 연역법에 너무 치우쳐가지고 중세의 스콜라철학 같은 것은 완전히 3단 논법을 가지고 신학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베이컨이 처음으로 근대에 이르러서 귀납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다.

베이컨이 경험주의자, 자연철학자, 과학자를 뭐에 비유를 했냐하면, 경험주의자들은 앤트릭스라고 불렀는데 데이터를 모으는 개미에 비유했다. 잔뜩 자료만 갖다 모으는 개미. 자연철학자들은 그 몸에서 어떤 진을 뽑아내는 거미라고 했다. 그런데 과학자는 모름지기 개미도 아니고 거미도 아니고 꽃에서 어떤 진을 빼내고 거기에다가 자기의 침을 더해서 꿀을 만드는 벌에 비유했다. 여기서 베이컨이 말하는 것은 과학은 귀납만 가지고도 안 되고, 연역만 가지고도 안 되고, 이 둘이 종합이 돼야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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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보다 우주가 어디에서 왔느냐 상당히 그리스 철학에서도 이단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었고, 그런 점에서 플라톤 과학은 뒤에 나오는 그리스도교하고 좀 통하는 데가 있다. 티마이우스는 우주창생설인데,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는데 데미우루고루스가 질서정연한 우주, 코스모스로 만든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오면 그 이전의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오랜 관측 그리고 그 이전의 우주론시대의 사색, 이런 것을 기초로 해서 우주에 관한 어떤 체계, 천체의 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야 되는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고 그런 시도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된다. 플라톤은 우주가 둥글다고 생각을 했고 지구는 그 가운데 있고 모든 천체는 원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게 이런바 지구중심설의 출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식 번역을 도입해서 천동설이라고 했다.

아리스타르코스(BC 310년~BC 230년: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이다. 지구의 일주[日周]운동과 지동설을 처음으로 제창하였다)는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보니까 문제가 해결이 잘 안되어 과감하게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요즘에 말하는 지동설, 더 정확하게는 태양중심설의 시작이다. 피타고라스가 우주의 한가운데 큰 불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것이 태양이라면 이것이 바로 태양중심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히파르코스(BC 160?~BC 125? : 고대 천문학자이다. 그는 태양의 운행표에서 춘하추동의 길이가 다름을 보여 주었다)때에 와가지고 상당히 진전이 되어서 지구중심설이 체계화되고 이론화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학이 발달한다. 프톨레마이오스(85?~165? : 저서인 [천문학 집대성]에서 지구중심설을 수학적으로 기술하였다.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는 지구중심설을 수학적으로 탄탄한 기초를 만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책이 알마게스트(Almagest :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인 [천문학 집대성]의 아랍어역본)다.

그때 이후로는 기원전 4세기부터 내려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체계 거기에 플라톤의 지구중심설이 결합이 되어가지고 이것이 서구에 말하자면 정통우주설로 자리가 잡히게 된다. 그때 이후로 이것이 근대까지 내려옵니다. 근대라면 코페르니쿠스가 16세기니까 1400년 동안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서양의 공식우주설로 내려온다.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정반대의 우주체계, 다시말해서 태양 중심 우주체계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1473년~1543년 : 1543년에 출간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을 통해 지구중심설을 재발견한 천문학자이다)가 태양중심설을 내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새롭고 혁명적인 이론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은 옛날에 있었던 것의 재발견이다. 전통적인 천문학을 이어받되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맞바꾸는 것이 코페르니쿠스다. 그때는 천체가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라 공에 붙어있다고 해서 천구의 회전이라고 했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 같아 걱정을 많이 했다. 중요한 것은 코페르니쿠스는 그 자신은 혁명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사실은 보수주의자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전통적인 우주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상당히 충실한 사람이었다. 지구와 태양의 역할만 바꾼 것이다. 근데 그 결과가 엉뚱하게 굉장한 혁명적이 된 것 이예요. 튀코 브라헤(1546년~1601년: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동시에 다른 행성들이 태양둘레를 돈다는 ‘튀코체계’[수정된 천동설]를 주장)가 나온다. 튀코 브라헤는 덴마크의 귀족이고 굉장히 돈도 많고 그래서 코펜하겐의 앞의 섬에 우라니버그(하늘의 성이라는 뜻)라는 천문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아주 우수한 관측기계를 갖다놓고 하늘을 관측한다. 요하네스 케플러(1571년~1630년)가 튀코의 관측자료를 가지고, 우주론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한 것이 케플러의 삼법칙([Kepler's laws]: 제1법칙[궤도의 법칙], 제2법칙[면적의 법칙]. 제3법칙[주기의 법칙])이다. 1법칙은 우주는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다. 태양에 가까워질 때는 좀 빨라지고 멀어질 때는 늦어지고 반비례하는 관계라는 것이 2법칙이고 3법칙은 타원궤도가 부채꼴을 그린다는 것인데 그것도 거리에 따라서 반비례하는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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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널은 과학, 20세기에 아주 급격한 과학기술의 변화를 가리켜서 과학 혁명이라고 했다. 꼬이레가 43년에 쓴 논문에서 ‘갈리레오와 플라톤’이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과학 혁명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때 정의가 된 16, 17세기에 과학 혁명이라고 했다. 16,7세기에 과학 전체의 혁명보다 그 분야에 따라서 혁명을 예를 많이 들고 있다. 16,7세기의 과학 혁명은 그 이전의 2000년 동안 내려온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은 사건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을 버리고 전혀 다른 근대적인 과학을 시작하게 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근본적인 재정위(radical reorientation)라는 표현을 쓴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년-코페르니쿠스는 이 저서를 통해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나오고 베실리우스는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1543년-총 7권으로 구성된 베실리우스의 저서로 의학 근대화의 새로운 기점이 되었다)라는 책이 나온다. 이게 유명해서 ‘Revolution’, 베실리우스는 줄여가지고 ‘De fabrica’라고 하는데 1687년은 뉴턴의 ‘Principles’,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년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세 권짜리 저작으로 서양의 과학 혁명을 불러일으킨 책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 두 책이 나온 해이다.

중세의 명상적 지식에서 이제는 근대의 조작적이고 행동적인 지식, 라틴 말로는 'Scientia contemplativa에서 scientia est operativa'이렇게 넘어 간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베이컨의 유명한 말 ‘앎은 힘이다’ ‘Scientia est potentia’라는 말, 그게 바로 근대적인 지식을 상징하는 말이다. 과학 혁명의 결과 교회는 완전히 유럽의 구심점이었던 지위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과학에게 내주게 된다. 그래서 과학 혁명 이후에는 과학이 교회를 대신해서 유럽 문명의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과학 혁명의 결과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무너지고 근대 과학은 플라톤(BC427~BC347-그리스의 철학자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철학적 대화편의 저자이다)과학이 그 기초를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질적인 것이 양적인 것으로 바뀐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의 수학화다. 고대의 세 가지 전통이라고 한다면 수학과 마술로 대표되는 플라톤, 질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원자론 이 셋이 경쟁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원자론은 일찍 탈락하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싸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겨서 지배를 해오다가 과학 혁명의 결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몰락하고 플라톤이 득세를 하는 것 그것이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넘어간 것을 뜻한다.

자연을 기계로 보는 관점이 이제 자리 잡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계적 철학의 지배다. 이건 철학에서는 잘 안 쓰고 과학사에서 만든 말인데 기계적 철학은 간단히 말해서 모든 것을 물질과 운동으로 설명하는 경향이다. 'matter in motion', 물질과 운동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굉장히 극단적인 기계론 유물론, 뭐 나아가서 무신론까지 된다. 그것이 16, 7세기의 전체의 특징이다. 베이컨에서 데카르트 갈릴레오에 이르기까지 거의 다 이런 경향을 갖고 있다. 궁극적인 설명을 버리고 즉각적인 기술을 택했다. ultimate explanation을 버리고 immedial scription을 택하는 것이 과학혁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시대에는 물체가 하늘에서 왜 떨어지느냐면 물체 속에 형상이 있다. 이데아 같은 것. 그 궁극적인 원리 비슷한 것이 있어서 물체의 고향인 땅으로 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다. 어떻게 떨어지느냐? 어떻게 속도가 변하느냐? 그것을 알고 그것을 측정하는 것이 갈릴레오의 과학이다. 그러니까 왜에서 어떻게로 달라지는 것이 과학 혁명이다.

중요한 것은 과학 혁명의 특징이다. 상식적인 경험을 버리고 추상적인 이성을 택한 것이 과학 혁명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를 버리고 플라톤의 추상적인 이성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적인 과학을 플라톤의 양적인 과학으로 바꿔놓은 것, 그게 수학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기계로서의 우주, 기계적인 우주관은 그 조상을 따져 본다면 그리스 철학에서 셋이 경쟁하면서, 원자론, 데모크레이토스에게서 온 것이다.

방법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새로운 과학의 방법을 내놓았다. 소련에서 온 물리학자인 보리스 게슨은 영국의 부르주아들이 항해 그리고 광산개발이라던가 이런 여러가지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는데 그것을 해결 하려면 뉴턴 물리학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 그런 사회경제적인 배경 때문에 뉴턴 물리학이 나왔다는 것. 로버트 K.머튼은 첫째 명제가 뭐냐면 당시 영국의 Puritanism, 청교도주의가 상당히 그 특이한 교리를 갖고 있었는데 뭐라고 할까 그것이 아주 실용적이고 행동적이고 적극적이고 공리적인 이런 특징을 가졌다. 완전히 사회와 격리된 지적인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내적 접근인데 이 접근에서 대표적인 것이 꼬이레인데, 꼬이레는 이것을 두 가지로 정의했다. 하나는 공간의 기하학화(Geometriction de l'espace), 그러니까 이게 플라톤적인 우주관을 받아들인 결과 공간을 정성적으로 질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어떤 경향이다. 근데 그것은 결국 피타고라스, 플라톤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또 하나는 코스모스의 해체(Dissolation de Cosmos)로 우주는 그냥 우주가 아니라 질서 있는 우주라는 뜻이다. 지적인 태도의 변화, 지적인 변형 또는 지적인 돌연변이, 플라톤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결과 과학 전체도 달라졌다는 것이 내적인 접근이다. 그런 단계에서는 사회의 영향이 있다는 것, 과학이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과학이 발달해 가지고 수준이 높아지고 자리가 잡히면 패러다임이 확립이 되고 그렇게 되면 이게 사회로부터 고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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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철학이 적어도 소크라테스 이전까지는 완전히 일치했다. 철학 또는 과학이 발생할 때 우주에 대한 사색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우주가 어디서 왔느냐는 문제는 뒤에 나오고 처음에는 우주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근본이 무엇인가? 근본 물질이 무엇인가? 이런데서 시작했기 때문에 초기의 철학을 자연철학이라 하고 우주론(전체적인 우주, 나아가서 그 내부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정량적(주로 수학적)인 연구를 말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철학이고 동시에 과학이다. Science is what you know, philosophy is what you don't know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버트란트 러셀) 철학에서 아무리 살림을 많이 낸다고 하더라도 철학의 영역은 계속 무한한 것으로 남는다.

과학과 철학이 사색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도구를 만드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산물은 기술과 예술이다. 기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거의 비슷하다. 과학의 발생은 우리가 배경을 보면 하나의 신화에서 논리로 넘어 오는 그 과정에 있다. 신화시대에 자연을 해석하되 어디까지나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가지고 했었는데 이제는 초자연적인 것은 차단을 하고 자연의 원리는 자연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철학이나 과학이라고 한다면 또 기술은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 시작했는데 과학으로 넘어오면 그것을 끊어버리고 어디까지나 그 자체를 위한 지식이 된다.

방대한 지식에서 원리적이고 순수하고 예지적인 부분은 철학이 맡고 좀 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쪽은 과학이 맡고 일종의 역할분담이 생겼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는 그 분화가 점점 진전이 되가지고 중세를 거쳐서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과학의 분리과정이 계속된다. 19세기에 오면 과학과 철학의 분리가 아주 두드러져가지고 독일의 대학에서 과학과 철학이 완전히 과목으로 분류가 된다. 과학은 처음에 철학과 함께 출발하면서 기술과 완전히 분리가 된다. 처음에 참 신기한 분리인데 과학은 그 기원에서 기술에 힘을 많이 입었는데도 그리스의 과학은 기술과 상당히 다른 길로 발전한다. 상호작용이 별로 없다. 그것은 과학에 종사한 계급과 기술에 종사한 계급이 완전히 다르다는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가까워진 것이 과학 혁명이다. 산업혁명의 특징은 처음에 증기기관이라던가, 방직기계라는 것은 별로 과학과 관계가 없는 순수한 기술의 전통의 산물이다.

그 다음에 19세기말쯤에는 전기학이라던가, 유기학이라던가 하는 것은 단순한 장인전통을 가지고는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복잡해진다. 여기에서는 정말 그 기술전통과 과학전통이 아주 밀접하게 협조를 하게 되서 과학적인 기술 기술적인 과학 이런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점점 경향이 심해진 것이 오늘날의 과학기술인데 지금의 과학은 철학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할 정도로 멀어졌다.

대개 19세기는 과학을 자연철학이라고 불렀다. 과학 혁명 이후에 인문적인 요소, 철학적인 요소를 계속 제거하면서 수학화, 기계화, 가속화한 결과 오늘날은 아주 추상적이고 맹숭맹숭하고 아주 재미없는 내용이 되어 버렸는데, 한편 과학은 기술하고 굉장히 가까워져가지고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일심동체가 되었다. 어디가 과학이고 어디가 기술인지 명확한 경계선을 그을 수 없을 정도로 과학과 기술이 융합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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