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o ergo sum’ 이라는 것이 결국 나를 의심한다면 적어도 의심하는 나는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의심의 주체인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냐, 거기서 자아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성은 왜 믿을 수 있느냐 이것은 신이 준 자연의 빛이다, 그리고 이 이성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수학이다. 수학적인 공리,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지식이다. 데카르트는 독단적으로 가설을 만드는데 그 가설을 만드는 방법은 차근차근 단계를 거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과 같은 직관에서 나온다. 물체는 운동하기 시작하면 계속 뭐가 막지 않는 한 계속하고 정지해 있으면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직선적인 관성인데 그 직선적인 관성을 당대의 갈릴레오도 몰랐는데 데카르트만이 맞추었다. 데카르트는신이 만든 우주인데 우주의 운동량은 일정해야 된다는 가설에서 직선적인 관성에 도달했어요. 데카르트의 뛰어난 천재가 발휘된 경우다. 연역을 하는 과정에서 수학을 활용했다는 점이 데카르트의 장점인데 데카르트가 너무 경험을 무시해버린 것은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의 방법은 과학혁명 후기에서 위력을 발휘했는데 과학에서 사실도 중요하고 경험도 중요하지만 과학은 결국 과감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연역해나가는 과정이 강한 경향이 있고 과학혁명 초기에 그런 식으로 다 과학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경험이 미처 따라오기 전에 그게 앞서가지고 과학혁명을 일으켰고,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독단적인 방법이 매력을 잃지 않고 계속 되는 것 같다.

갈릴레오의 방법은 제일 출발은 베이컨 비슷하게 뭐냐 하면 자료를 가지고 이제 정리를 해서 어떤 가설을 세운다. 그것은 베이컨의 귀납법하고 같은 과정이다. 그런데 가설을 일단 세우면 거기서 수학적 연역을 하는 2단계는 데카르트의 방법하고 같다. 그런데 거기서 결론이 나오면 데카르트 같으면 거기서 끝나고 진리로 확정이 된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거기서 그 한 걸음 더 나아가서 3단계에 가서는 결론을 실험을 해서 확정을 하는 단계가 있다. 그래서 아주 균형이 잡힌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에 대개 한 70년대 이후에는 실험이 실제로 과학에서 수학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갈릴레오를 완전히 이성주의자로 본 해석은 너무 지나쳤다는 것이 요즘에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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