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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내가 읽으려고 하니 읽기도 전에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지금 ‘국가’를 이야기할까? 왜 그에게 지금 ‘국가’가 문제시 된다는 것일까?

  이 책은 유시민이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논객으로서 한국 사회에 개입하려고 내놓았던 몇 권의 책과는 달리, 다시금 현실 정치 한복판에 들어와 캐스팅보드를 쥐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니 ‘논객 유시민’이나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아닌 ‘정치인 유시민’의 현실 정치에 대한 지적 개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정치인 유시민은 지금 ‘국가’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밝히는 동시에, 그런 ‘국가’에 대한 담론을 통해 현실 정치에 쟁점을 형성하고 의미 있는 논쟁점을 던지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국가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현 상황에서 의미 있는 쟁점을 형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지금 우리에게 허용된 선택의 폭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좀 더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합의는 굉장히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국가주의적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국가주의”란 말에는 가치 판단이 담겨있다. 그게 우리의 언어체계이다. 어느 누가 국가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혹은 지금의 국가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 정치에선 불가능한 주장이다. 그런 주장들에 대한 발언권은 실질적으로 차단당한 상태이다.

  수십 년간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그런 독재 정치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독재 정권이 수행한 반공교육의 효과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굳이 부정적인 효과로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대략적인 정치적 합의를 형성하고 있다. 그 이면은 ‘국가’에 대한 본질적 접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란 ‘개념’이 소극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존재’가 소극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 아니다. 국가는 얼마든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국가 형태냐 혹은 어떤 국가론이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정세들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의미 있는 쟁점을 형성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국가의 형태, 역할을 결정짓는 것은 국가론이 아니라, 그 국가를 둘러싼 다양한 정세들이다. 경제, 정치, 사회적 분위기 등등에 따라서 국가에 대한 관념은 요동친다. 이걸 요구했다가 저걸 요구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유시민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국가론을 가진 세력이 집권하느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현실을 상당히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세력’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그것도 결정적인 영향력 행사하는 것이 국가론뿐일까? 그건 어떤 경제 이념을 가졌느냐, 어떤 정치철학을 가졌느냐, 무엇보다도 어떤 이해관계를 가졌느냐에 비하면 매우 부차적인 요소이다.

  나는 오히려 현재의 정치 현실에서 의미 있는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쟁점은 ‘정치’나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국가’에 대한 담론이 생명력을 잃은 지금의 현실에서 국가론은 ‘정치’나 ‘민주주의’ 담론 속에 포괄될 것이라 여겼다. 전체주의적 주장을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던 과거로 회귀하거나(물론 공공연히 그런 발언을 하는 정치인과 보수 논객들이 있지만 시동이 꺼진 기차가 서서히 멈추듯 대중적인 영향력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이다) 혹은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넘어 새로운 국가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이 도래하지 않는 이상(물론 그런 담론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뿐 현실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형성되지는 못하고 있다) 국가론은 힘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국가’라니? 유시민은 지금 다시 정치적 담론의 한 가운데에 국가의 문제를 끓어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기만족적인 글쟁이가 아닌 이상 현실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을 리는 없다. 그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을 넘어 과감하게 대담한 제안을 하고자 한 것인가? 뭔가 기대감을 갖고 책을 봤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는 대체 왜 ‘국가’에 대해 말한 것일까? 그의 이면에 감춰진 진심이야 알 수 없다. 다만, 내 나름으로 제멋대로 해석해보건대 거기에는 정치적인(정확하게는 정치공학적인) 의도와 유시민 자신의 한계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정치인의 진정성, 유시민의 진정성

  일전에 한 일간지에서(한겨레신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진정성의 정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진심으로 공감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 의미도 모호한 진정성이라는 가치가 정치를 지배하면 정치는 유아적이 된다. 박상훈 대표가 염두에 뒀던 것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였던 것 같다. 그 개념은 이 책에서도 소개된다. 아마도 유시민 역시 베버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그에게 책임윤리란 말이 현실의 한계에 대한 변명거리, 혹은 권모술수에 대한 정당화 정도로 이해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진정성이란 가치가 과잉되는 것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성이 다른 가치관이나 현실적 고려를 무시할 만큼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라는 의미이지 진정성이란 것이 무용하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진정성이란 것은 사태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수용자의 느낌 혹은 감상이 추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진정성은 주관적 척도이며 역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소통과 신뢰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정치에서 진정성이 내면적 떳떳함의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별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과 정치인 사이의 공감, 소통가능성, 신뢰는 진정성을 보이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점점 더 정치는 ‘쇼’ 혹은 ‘게임’과 유사해지고 있고, 대중들은 오락프로를 보면서 리얼과 각본을 구별해내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판에서도 가짜와 진짜를 가려내고자 한다. 너무 많은 정치인, 너무 많은 말들, 너무 많은 사안들... 쏟아지는 정보의 과잉 속에서 자신이 믿고 신뢰할 만한 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래서 진정성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 유시민에게서는 그런 진정성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감춰진 진심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진정성을 보여준 적이 드물다. 이것은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력한 대선후보가 되기 힘든 이유이자 약점이다. 유능한 정치인은 자신의 본심이 무엇이든간에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대중들이 쉽게 진실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의 정치적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진정성을 묻고 싶다.  

“나는 대한민국이 더 훌륭한 국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썼으며,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하고 싶다.” - 9쪽. 

  그가 말하는 훌륭한 국가는 무엇일까? 일단 그는 훌륭하지 않은 국가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줬다. 

“선량한 시민 하나라도 버리는 국가는 결코 훌륭한 국가라고 할 수 없다.” -8쪽.

  유시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언론을 통해서든 인터넷을 통해서든 접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시민을 생각하면 항소이유서를 떠올리듯, 나는 유시민의 이름만 들어도 김선일이 떠오른다. 아직 어린 나에게 김선일 씨 살해 사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2004년 이라크에서 무장 테러단체에게 김선일 씨가 납치되었을 당시, 참여정부 핵심 인사였던 유시민의 태도는 참으로 의연했다. “국민 하나 납치되었다고 군대를 철수하는 나라가 어디있냐?”고 말했다(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니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직접 들은 것도 아니니 사실을 왜곡되어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와 다른 진실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제게도 알려주세요.). 끝내 김선일 씨가 살해당한 날에도 유시민은 파병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그런 유시민의 태도는 당시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의 분노의 방향은 대부분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을 향하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분위기의 저변에 유시민에 대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로부터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파병을 반대했던 유시민이기에 의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가 파병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오가며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에게 신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주장하는 책임윤리와도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가 용산 참사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며 “선량한 시민 하나라도 버리는 국가”를 비판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바라는 훌륭한 국가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썼으며,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하고 싶다”고 말한다. 도대체 믿을 수 있을까?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일은 잊고, 현 정권의 악행만 기억하는 것일까? 혹은 “훌륭한 국가”에 대한 신념 역시도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닐까? 2004년 당시에는 국민이 죽을 위기에 처해도 더 큰 대의를 위해 국가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 훌륭한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신념을 번복하고 다른 국가상을 취한 것일까? 얼마 후면 이 책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번복하고 새로운 국가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국제 정치의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이해해주고자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정치의 무거움에서 벗어났던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훌륭한 국가”를 소망한다고 가슴 절절히 말하는 이 순간에도 그는 반성도 후회도 없다. 일일이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국회의원으로,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보여줬던 그 수많은 反 훌륭한 국가적 행보들에 대한 반성 없이 어떻게 훌륭한 국가를 말할 수 있는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이렇게 서문에서부터 마음이 상했다. 

 

2. 과연 이 책의 의미는? 

  사소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책의 목적은 무엇일까? 정치공학적으로 복잡하게 계산된 그런 정치적 의도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인문사회 서적으로서 이 책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저자는 용산참사를 계기로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게 됐고, 훌륭한 국가란 무엇인지 독자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애초의 기획 의도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해보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국가란 무엇인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정말 저자의 의도대로 국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을까? 

  출판사(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출판사이지만;;)와 저자는 어떤 책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대학 새내기를 위한 정치철학(중에서도 국가론) 입문서? 고전을 읽기 힘든 청소년을 위한 교양서? 한마디로 거칠게 말하면 “국가란 무엇인가”처럼 거창한 제목을 붙이기엔 부끄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둔 것 같은 제목과 구성을 지녔지만 샌델이 정의론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포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아도 이 책의 내용은 빈약하다. 샌델의 정의론은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적 담론을 형성하기엔 너무 낡고 고리타분하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이론들을 검토해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국가론은 그런 기능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샌델은 도덕철학의 대가이지만, 유시민은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가 정치철학과 다양한 사회이론에 일가견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학자들처럼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연구를 하여 나온 결과물은 아니다. 이 사실은 이 책을 옹호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는 근거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데 이런 거창한 제목(다소 거만해 보일 수조차 있는)을 붙이고 여기서 국가에 대해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듯이 시작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옹졸해 보일 수도 있다. 말그대로 그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애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순전히 저자가 바로 진보정치를 표방하는 정치인 유시민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직업적 정치인으로서 무언가 대중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 하지만 이런 기대마저도 어이 없이 무너지고 만다. 대체 이 책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 책이 국가론에 대한 이론서로서의 기능도, 그렇다고 현실 정치에 대한 의미 있는 개입도 될 수 없다고 판단내린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봐야겠다. 

 

3. 국가론이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진 한국 정치

  유시민은 이 책에서 국가론을 크게 세 개로 구분한다.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맑스주의 국가론이 그것이다.(목적론적 국가론도 있지만, 그것이 다른 국가론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국가론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기에 병렬적으로 언급하기는 힘들다. 위의 세 국가론은 근대 정치에서 각각 독립적인 정치사상적 조류를 형성한 것과 달리 목적론적 국가론은 고대 사상에서 태동한 것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반박과 재생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근대적 사상과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는 이 세 가지 국가론을 중심으로 국가에 대한 담론을 구성하고 거기에 한국 정치를 적용해본다. 하지만 그가 구성한 국가론의 얼개는 너무 엉성하다. 그가 책에 소개된 정치사상들을 다룰 때 나타난 사소한 오류들은 굳이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그의 구분이 너무 거칠게 자의적으로 해석되어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대해 ‘공산당 선언’을 중심으로 원형(prototype)을 살펴보며,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국가기구와 상부구조,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해 논의한 바는 생략했다. 각각의 국가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본적 관점을 비교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자유주의 국가론과 국가주의 국가론도 역시 원형을 중심으로 비교했다.” - 291 쪽. 

  그는 원형을 중심으로 비교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원형’이란 것이 무엇일까? 원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원시적 형태라고 하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각각의 국가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본적 관점”에 대해 말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재단된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국가에 대한 관점이 달라서 반목하고 갈등하며 심지어 서로를 학살하는 일까지 발생해온 것이 근대사이다. 그들이 모두 동의하는 ‘원형(prototype)' 혹은 “근본적 관점이란 것이 대체 뭘까? 그들도 모르는 것을 유시민은 어떻게 알고 원형을 중심으로 비교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서로 자신이 진정한 맑스주의자임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는 그런 근본적 관점이 있을까? 그렇다면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는 사소한 차이만이 있다는 것일까?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와 네그리에게 국가에 대한 근본적 관점이 무엇일까?  

  이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다른 모든 정치 주체들에게는 본질적이기도 하고 사소하기도 한 다양한 차이들을 소거하고 자신이 말하는 “원형”, “근본적 관점”에 몰아넣고 자신만 (내가 볼 때는 별것도 아닌)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저술의 기본적인 예의가 안 갖춰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국가론에 대한 고전을 정리하는 가벼운 교양서적이라면 이런 비판이 과도한 것이겠지만 그는 끊임 없이 현실 정치의 문제를 자신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속에 적용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눕혀보고 있는 것이다. 왜 이것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될까? 일반적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란 자신의 일방적인 잣대로 남을 평가하고 재단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도 정확하게 사용한다면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최소한 세 개의 선택지를 주었으니까. 하지만 실질적으로 침대는 하나밖에 없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는데 한국 정치 현실에서 국가에 대한 담론은 논쟁의 기능을 상실했다. 국가주의 국가론도 맑스주의 국가론도 현실적으론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이다. 물론 나는 맑스주의 국가론이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대의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은 좀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국가에 대한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국가’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거기에 새로운 변화와 상상력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신의 이론이 기존의 낡은 맑스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혹은 진정한 맑스주의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제도권 정치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제도권 정치 안으로 들어가자면 어느 누구도 감히 맑스주의를 주장할 수 없다. 국가주의도 당연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대중에게 승인받을 수 없는 국가관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자의적인 기준으로 누구는 국가주의 국가관을 주장하고 누구는 맑스주의 국가관을 주장한다고 평한다. 

“앞서 살펴본 김상봉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동조한다. 그런데 이 이론은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받아들일 경우 유일하게 옳은 길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운동뿐이다. 그런데 이 혁명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한때 성공한 사회혁명의 결과였던 소련과 중동부 유럽 사회주의 체제는 다 무너져버리고 없다.” - 200 쪽. 

  이 얼마나 대단한 논리인가.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은 이런 유시민의 논리를 납득할 수 있었을까? 한순간에 김상봉은 얼간이가 되어버렸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 모두 논리를 벗어나있다. “김상봉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동조”하는 무리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무리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자체가 그리 실체가 있는 개념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에게는 국가론 자체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가 분화되고 다양화되는 것만큼 다양한 국가론이 생산되고 폐기되어 왔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도 무리다. 현실성을 단숨에 기각시킬 만큼의 논의를 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받아들일 경우 “유일하게 옳은 길은 ...... 혁명운동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비약이다. 그들은 그런 혁명운동을 주장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김상봉과 비슷한 견해”란 무엇일까? 유시민이 소개한 김상봉의 진보관은 내가 당장 접근할 수 없는 자료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정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김상봉의 “근본적인” 정치적 견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김상봉의 정치적 개입은 작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출간을 계기로 삼성에 대한 불매운동을 제안한 것 정도이다. 그리고 유시민이 본문에 소개한 김상봉의 견해 역시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대변인인 것을 넘어서서 일부 재벌들의 대변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국가 자체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기형적인 경제 구조, 즉 재벌 카르텔을 해체할 궁리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재벌의 친위대로 전락하고, 더 나아가 하나의 기업처럼 변질된 것은 국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재벌 기업 체제 때문이라고 한다. 유시민이 직접 옮겨준 부분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가 말하는 것처럼 김상봉에게 혁명운동이 유일한 선택지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김상봉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시민에 의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자라는 침대에 눕혀져서 자유주의의 잣대로 처형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비슷한 상황과 논리가 수차례 등장한다. 이것은 유시민에게는 다양한 국가론의 스펙트럼에 포괄적으로 균형있게 접근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현실 정치의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들을 다룰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국가론에서도 비슷하다. 자유주의 역시 다양한 이단점을 형성하며 분화되고 다양화되어 왔다. 그렇게 자유주의 이론은 발전해왔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고려는 별로 없어 보인다. ‘정의’에 대해 끝없이 말하면서도 롤즈 같은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에 대해서조차 다루지 않고 있다. 오랜만에 고전을 공부하고 정리할 필요라도 있었던 것일까? 

 

4. ‘정치’란 무엇인가? 

  나는 글을 시작하면서 왜 하필이면 ‘국가’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유시민에게는 ‘정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베버의 관점에 따라 정치를 정의한다. 베버에 따르면 정치란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다. 유시민은 이런 “베버의 견해를 가장 좋은 답변으로 채택한다”고 말한다. 그는 베버의 이런 견해가 정치에 대해 “폭넓게 규정”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유시민이 베버를 따라서 정치를 이해할 때에는 별다른 의문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정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것을 “폭넓은 규정”이라고 했을 때에는 의아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를 국가 운영자에게 독점적으로 허용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야 폭넓은 규정일 수는 있지만, 점점 정치의 스펙트럼이 확대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규정은 오히려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제한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협소한 규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시민이 이것을 정치에 대한 폭넓은 규정이라고 받아들인 것은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라는 약간은 모호한 표현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규정에 따르면 야당 정치인이나 재야 정치인의 활동 역시 정치에 포함되며, 각종 사회단체, 시민단체, NGO 활동 역시 정치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정치란 언제나 ‘국가운영’의 문제로 제한된다. 이것은 그가 정치를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확대해서 말한다면 그에게 ‘정치’의 독자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국가에 포섭되지 않는 정치의 영역이란 없다. 그런 것은 정치로 인정할 수 없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는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겠지만, 고려대 당국에 성추행 의대생의 출교를 요구하는 일인시위는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투쟁은 정치적이지만, 한진중공업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그들에게 연대하는 시민들의 투쟁은 비정치적이다. 하지만 정작 그 주체들은 두 행위 사이에서 큰 의미 차이를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문제의식에 서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의 차이가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유시민에게는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은 바로 그의 정치에 대한 철학 때문이다. 그가 베버의 정의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진보 정치를 추구하고, 스스로가 진보 정치인으로 인정받길 원하지만, 정작 그가 추구하는 정치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자신의 정치에 무슨 요구를 담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형식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유시민에게 위에서 말한 두 행위의 근본적 차이는 시민 정치의 독립성이다.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은 그것이 시민들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정치행위라고 하더라도 야당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제도권 정치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행보의 운용 폭을 넓혀줄 수 있다. 즉, 집권, 혹은 정부 여당에 대한 견제라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만 이것은 진정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
  유시민의 이런 견해는 그가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정국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던 촛불시민들은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고 국정운영에 반영해주기를 원했다. 대통령을 퇴진시키거나 정부를 전복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 그들의 끈질긴 대중행동에 대한 대통령의 응답은 거짓 사과와 물대포였다.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고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촛불시민들은 더 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 그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선거에 참여하여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정치참여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를 교체하는 것이다.” - 111쪽.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유시민의 소망에 가깝다. 촛불시민들에게 “대통령을 퇴진시키거나 정부를 전복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유시민에게 촛불시민들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민주주의를 구현할 직접행동의 주체로 형성되었다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였다거나, 선거(그리고 선거의 결과)로 포괄될 수 없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촛불시민이 의미가 있는 것은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적 여론으로서,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야당에 표를 던질 유권자로서이다.  

  그에게는 시민들의 독자적인 정치적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국가와 선거라는 제도에 포섭되는 한에서 그들은 정치적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은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인 견해이다. 그가 아무리 자신이 진보 정치인으로 분류되길 원한다고 하여도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에서 합의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는 어쩌면 국가로 포섭되지 않는 시민들의 독자적인 정치적 영역을 인정하는 것은 곧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동조하는 것이며, 그들에게는 국가를 소멸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담이고, 정치에 대한 유시민의 견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진보적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정치질서에서 국가로 포괄되지 않는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과거에도 이런 영역은 언제나 존재해왔었다. 다만 과거에는 그런 영역이 국가로 포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정치적인 문제로 배제되어 왔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 시민사회의 등장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 영역의 관계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점점 더 많은 사적 영역이 공적화되고 정치적 쟁점이 되어왔다. 김상봉과 다른 많은 네티즌들이 주장하는 재벌에 대한 불매운동 같은 경우는 현재의 제도적인 시스템 안에 머물면서도 국가에 포괄되지 않는 정치적 활동이다. 국가가 재벌에 대해 무력할 때 소비자-시민은 무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자투쟁은 어떤가? 국가는 회사 내 분규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개입하더라도 대부분 사측 편일텐데 무능력하고 부도덕한 국가는 그냥 그렇다치더라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폭력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정치는 제도나 법을 바꾸는 활동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현재의 세계화된 정세에서 더욱 주요한 정치적 활동이 된다. 점점 더 많은 권력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 각지의 “인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권력은 대부분 자본화된 형태이다. 그리고 그 자본은 대부분 금융화된 형태이다. 국가는 금융화된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이런 금융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금융 자본에 대한 방어와 통제는 전세계 시민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그것을 누가 하겠는가? 구체화된 형태로서는 국가를 경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안세계화운동이라는 시민들의 정치적 연대를 통해서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유시민에게는 이런 고려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유시민이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가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한 권력을 획득하면 안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현재의 변모한 세계 질서에 대한 관점과 비전이 없다. 가령 그가 이 책에서 소말리아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소말리아의 근본문제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공동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소말리아의 상황은 국가 없이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와 같이 경쟁하는 자연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홉스의 이론에 힘을 실어 주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 32쪽.

  그가 이것을 단지 홉스 이론에 대한 예로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왜 홉스 이론의 예로 소말리아를 선택했을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을테니까 선택했을 것이다. 적어도 소말리아의 근본문제가 ‘국가권력’이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판단만은 고유하게 유시민의 견해일 것이다. 하지만 소말리아의 근본문제를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유시민에게 현재의 세계화된 국제 질서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증거이다. 소말리아의 상황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과거 서구 제국주의의 유산과 초국적 자본의 침투, 아프리카를 휩쓸고 파멸로 몰고 갔던 신자유주의의 광풍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다.

  유시민의 견해가 이래서인지 그는 참여정부 시절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에 거리낌이 없었고, 현재에 와서도 뭐가 잘못이었고 문제였는지 모르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라면 유시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전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정부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둘이 잘 맞았는지는 몰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적어도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며, 퇴임 후에는 인터뷰나 저서를 통해 후회와 반성을 표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유시민에게는 ‘정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겐 ‘국가 운영’과 ‘그것과 관련된 활동’과 ‘선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 ‘정치’가 없다는 것은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과 비전이 없다는 것이며, 지금의 몰락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대응 전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대체 진보 정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우리가 바라는 진보정치는 단지 이명박 정권을 말려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진보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가 드러낸 것은 낡은 정치인의 모습일 뿐이다.

5. 그럼에도 나는 진보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자신의 진보적, 개혁적 성향에 대한 인정욕구가 있는 것 같다. 그는 책에서 ‘진보’의 의미를 규정하려고 하고, ‘진보 정치’를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진정한 ‘진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가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내면에 숨겨진 마음이야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명확하게 확인되는 것은 이 책을 통해 드러낸 자신의 정치적 의도이다. 어떤 서평에서는 그가 “자유주의적 지평 하에서 보수세력과 자유개혁세력을 연합하려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통합’”을 의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는 진보와의 통합, 혹은 진보세력의 흡수를 의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평을 더 빨리 썼으면 좋았겠지만)이제와 그의 행보를 보면 나의 그런 짐작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는 국민참여당이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하겠다고 공언했으며 민노당과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대중들의 시선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제도권 정치 내에서 그의 영향력과 지분을 고려했을 때, 쉽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교란을 할 정도의 힘은 있을 것이다. 유시민을 배제하고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진보대통합을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유시민의 정치 철학을 고려한다면 그가 진보의 프레임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넓은 야권통합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보세력에 편입되는 진보세력을 흡수하든 진보정치의 표상을 획득한다면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은 한동안 지체될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야 그렇다치고, 이 책에는 그런 유시민의 의도가 듬뿍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시민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는 왜 국가주의, 자유주의, 맑스주의 국가론이란 엉성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들었는가? 맑스주의와 진보정당에 호감을 가진 대중들을 포섭하기 위함이다. 김상봉 같은 이들, 그러니까 맑스주의의 냄새가 나는 이들, 유시민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이들이 근본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관점을 주장하며, 그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진보적이라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 거칠게 말한 것 같지만, 이 책에는 그의 그런 의도가 너무 쉽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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