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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불만과 문제점들은 이미 다른 서평단분들에 의해 훨씬 더 구체적이고 날카롭게 비판되고 있으니, 굳이 여기서 동일한 비판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제시할 수 있는지를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찾아보고자 한다.
나는 책을 볼 때(읽을 때든, 그냥 살펴볼 때든) 가장 먼저 목차부터 살펴본다. 보통은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책의 방향이나 논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78년 이후 세계사를 크게 전환의 시대(1978~1991), 낙관의 시대(1991~2008), 불안의 시대(2008~현재)라는 세 시기로 구분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78년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목차를 보면서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78년 덩샤오핑의 반혁명에서 시작하여 걸프전으로 종결되는 전환의 시대(1978~1991)는 어떤 전환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환’의 시대였다는 것에 대해 납득할 수는 있다. 그런데 91년 냉전체제의 종식에서 시작하여 2008년 까지 지속되는 시기를 낙관의 시대(1991~2008)라고 규정하는 것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1991~2008을 낙관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일까? 2008년 금융 위기 이후를 불안의 시대(2008~)라고 말하는 것 역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촉발된 세계 경제 위기가 ‘불안’의 시작인가?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저자 기디언 래치먼이 이러한 시기 구분을 했다는 것, 그러니까 세계사의 흐름을 이런 식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그가 어떤 입장과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단적인 지표가 될 수 있다. 래치먼은 <이코노미스트>를 거쳐 <파이낸셜 타임즈>에서 일한 언론인이다.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언론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지닌 입장과 견해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본 신자유주의의 역사이자, 기디언 래치먼 스스로가 신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던 세계 경제는 순식간에 끔찍한 타격을 받았고, 세계는 현 위기를 극복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각계각층에서 금융 위기를 진단하고 그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는 지속적인 크고 작은 경제난들이 이어져 왔지만 이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우리나라에서 갖는 독특성은, 대중들에게 경제적인 문제, 생존의 문제인 동시에 지성적인 문제로 다가왔다는 점에 있다. 97년 외환위기를 안전망 없는 무분별하고 성급한 시장개방 같은 졸속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찾든, 유연성(내지는 유동성) 부족과 전투적인 노동조합의 이기주의에서 찾든, 그것은 학계와 정치인들의 논쟁일 뿐이고 그런 지적, 정치적 엘리트를 제외한 다수 대중들에게는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에 대해서는 ‘먹고 사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그것을 엘리트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대중들이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관련 도서들이 대거 출간되고 각종 서점에서 판매 순위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그 이후 우석훈, 장하준, 선대인, 김광수 같은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이 큰 인기를 누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왜 2008년 금융 위기는 이런 특수성을 지니는 것일까?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던 다른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위기들과는 다른,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지닌 특수성이 바로 이 책 <불안의 시대>가 쓰인 배경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태생적으로 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독자적인 발전모델이라기보다는 이미 한계를 드러낸 경제 체제에서 파생된 위기를 지연시키는, 위기관리 전략으로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포디즘, 케인즈주의, 브레튼우즈 체제라는 삼각대가 20세기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 전략의 핵심적 축이었다. 역사적으로는 포디즘, 그리고 케인즈주의, 마지막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세계적으로 환산시키고, 전후 세계경제의 호황을 주도한다. 하지만 이 삼각대는 하나씩 하나씩 붕괴된다. 좌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이윤율의 저하경향으로 설명한다. 어떻게 설명되든 간에 이런 경제 시스템은 더 이상 이윤축적에 한계를 드러내고, 베트남전쟁, 중동 석유 파동 등으로 인해 발생한 결정적 타격을 경제적으로 극복할 원동력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발전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금융화, 민영화, 규제 완화, 관세 철폐 등을 기조로 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된다.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 목표는 ‘위기의 전가’에 있다. 즉 미국에서 발생할 위기를 주변부, 제3세계 국가로 떠넘기고, 기업에게 발생할 위기를 노동자, 서민에게 떠넘기는 방식이다. 이런 위기 전가 시스템은 계층 간, 국가 간 이동을 넘어서 부문간 이동으로도 이어진다. 경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기를 환경에 떠넘기고, 생산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소비에 떠넘기고, 경제활동의 위기를 정치활동에 떠넘기는 식(세계 곳곳에서, 특히 한국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의 위기 같은 것)이다.
이런 위기 전가 시스템에 바로 이 책의 전제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디언 래치먼은 대체 왜 91년부터 2008년 까지를 낙관의 시대라고 보았을까? 대체 왜 2008년 금융 위기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불안의 시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일까? (래치먼은 이것을 다소간 세계 정치적인 문제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 역시 자본의 문제를 정치 영역에 떠넘기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제3세계에 보급하기 시작한 70년대, 80년대, 그런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이식한 결과 아프리카와 남미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IMF와 GATT, WTO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세계화된 시기(래치먼이 낙관의 시대라고 명명한 바로 그 시대이다.)에는 그런 신자유주의 위기가 거의 전지구화되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명명된 장기불황의 시대도 그때이고, 한국과 대만을 비롯해 세계적인 충격이기도 했던 동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발생한 시기도 바로 그때이다. 동일한 시대 중남미에서도 외채위기와 외환위기가 결합된 엄청난 경제 위기가 들이닥쳤고,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자본주의를 도입한(자본주의 중에서도 바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동유럽에 빈곤화, 양극화, 실업률 증대 등 다양한 경제위기가 발생한 것도 그 시기이다. 2000년대 중반에는 환경위기와 금융위기가 결합하여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식량부족으로 전세계 곡물가격이 폭등하였고, 식량수출국들은 수출을 제한하면서 식량의 절대적인 부족현상이 발생했다. 북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그래도 먹고는 살던 나라들에서 식량이 부족해서 폭동이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심지어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같은 선진국에서조차(양상은 좀 다르지만) 식량 부족으로 인해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기 세계 어느 곳을 들여다보아도 래치먼이 말하는 것과 같은 윈-윈의 시대, 낙관의 흐름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오히려 증폭하는 불안과 고통,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위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위기가 바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성공적인 신자유주의의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전략의 본질이 위기 전가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위기는 끊임없이 제3세계 국가, 주변부 국가, 반주변부 국가 등으로 전가되었고, 고통은 노동자, 서민, 실업자, 여성, 이주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전세계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각종 재벌, 초국적 자본이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동안 그 대가는 지구 생태계가 치르고 있다. 자본주의의 무능력함이 증명되는 와중에도 자본가 집단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대신 대다수 국가들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지도력의 위기를 드러내고, 정치 시스템은 의심을 받고,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덕분에 여지껏 미국과 미국의 백만장자들은 여전히 무사하다. 기디언 래치먼 말대로 1991~2008년까지는 낙관의 시대였다. 자본주의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미국과 미국의 백만장자들은 그 문제를 다른 집단들에게 떠넘기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에 다름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위기전가 시스템이 잘 돌아가리라는 낙관인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위기의 진앙지가 바로 미국이며, 최대 피해자도 바로 미국이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위기이다. 9.11이 미국 본토가 물리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알린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면, 2008년 금융 위기는 미국 본토가 금융적인 붕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알린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것이 바로 2008 금융 위기의 특수성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비슷하다. 97년 외환위기는 우리나라의 위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발전해야 하고, 선진국에 도달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발전주의적 전략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했던 것이다.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패러다임이 넘어간 결과 발생한 위기인데, 오히려 발전주의적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더 발전하고, 더 강해지고, 더 선진국에 가까워진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의존해왔던 논리구조로는 이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바로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그 점에서 2008년 금융 위기는 ‘먹고 사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서 지적인 문제, 인식적인 문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래치먼은 2008년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세계가 윈-윈 게임에서 제로섬 게임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도 세계 정치와 세계 경제는 윈-윈보다는 제로섬에 가까웠다. 초국적 자본과 미국 행정부, IMF와 WTO 등은 끊임없이 제로섬 게임을 제안해왔다. 그것은 자본의 안정성과 노동의 안정성(일반화 시키자면 민중의 생활세계의 안정성)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금융시장을 개방함으로써 금융 자본은 위기에 발빠르게 대처하고, 각종 위험을 예방하면서 수익의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지만, 덕분에 민중들의 생활세계는 변덕스러운 금융 투기자본의 일거수일투족에 휘둘리는 불안정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97년 외환위기 등으로 이어졌고, 그 이후에도 그런 불안정성은 주기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2008년 금융 위기의 문제는 그런 안정성의 교환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불안’의 문제를 래치먼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이제 비로소 실감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편협한 견해인가?
하지만 이 책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독자는 이 책을 읽자마자 이 책이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시야는 매우 편협하고 견해는 일관되지 못하며, 해결책은 있으나마나한 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미국의 엘리트인 저자가 알지 못하는 것을 미국의 외부에서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왔다. 그에게는 2008년 금융 위기만이 인지되고 있지만, 우리는 97년의 위기도 2006년의 위기도 2008년의 위기도 모두 신자유주의로 인한 위기라는 것을 인지해가고 있다. 래치먼이 2008년 이후의 신자유주의의 참된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아무리 외쳐도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모습은 그가 가리킨 방향이 아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결코 미국의 전략에 우리의 대안과 미래가 없음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2008년의 금융 위기가 기존의 습관적인 이데올로기적 과정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공백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상상력 역시도 공백일 수밖에 없다. 97년에 희극적으로 반복되었던 ‘잘 살아보세’의 구호(비극적인 원형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이다)는 이제 다시 반복되기 힘들다. 우리나라가 더 강해져서, 더 부유해져서, 더 선진국에 가까워져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해결책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앞으로의 역사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탐구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대의 전환기에는 언제나 전 대중적이고 광범위한 지적 탐구가 동반되었다. 이제는 과거보다 더 광범위한 지적 탐구가 발생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