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단편전집 3권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마지막 수록작 '소묘'( 1983년 8월 발표)로부터 옮긴다. 화자는 시부모 집 별채에 사는 며느리이다.

사진: Unsplash의 Uliana Semenova







정남향의 안채 거실은 밝고 넓고 유리창은 늘 티끌만한 얼룩 한 점 없이 반짝거렸다. 그 유리창가를 온통 아프리칸 바이올렛의 시렁이 차지하고 있었다. 모양도 빛깔도 가지각색의 바이올렛은 휴면기도 없이 사시장철 꽃을 피웠다. 나는 아직 어떤 애호가네 집에서건 화원에서건 심지어는 바이올렛 전시회에서조차 그렇게 화려하게 다발로 핀 꽃을 본 적이 없다. 신접살림 난 친구들이 창가에 놓고 한두 분(盆) 기르는 그 꽃은 대개 가련하다 못해 비실비실했지만 시어머니가 기르는 것은 전혀 딴 종류처럼 사치스럽고 극성맞았다. 가장자리에 프릴까지 달고, 철쭉꽃만한 크기로 무리져 피어난 진분홍 바이올렛 같은 건 요괴롭다 못해 독기까지 느껴졌다.

그런 화분이 거실 창가에서 안방 창가로 이어져 자그마치 오백 분이 넘었다. 시어머니는 칠백 분이라고 했지만 내 창가에서 내려다보면서 하는 나의 셈은 항상 오백을 고비로 헷갈리고 지쳤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 방 창으로 보는 것보다 들어가서 직접 보면 더욱 장관이었다. 손님들마다 자지러진 탄성을 질렀다. 처음 오는 손님 아니라 두 번 세 번 보는 손님도 우선 탄성 먼저 지르게 돼 있었다. 그러고 나선 으레 그렇게 탐스러운 꽃을 사시장철 키울 수 있는 비결을 물어보았다. 시어머니는 그런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망설이지 않고 자못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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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4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9-2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6-09-24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곡님!
추석 명절 잘 보내시길요.
건강하고 행복 가득하시길 기원드려요^^

서곡 2026-09-24 19:47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ㅎㅎ 페넬로페님도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이 추분인데 오늘 낮도 더웠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더라, 여름아! 무지하게 덥던 어느 여름 날에 읽은, 근 백년전 소설인 이효석 단편 '도시와 유령'(1928)이 아래 글의 출처이다.

Summer #3, 1957 - Richards Ruben - WikiArt.org


도시와 유령(幽靈)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9001181&menuNo=200019 (전문)





그러나 장안의 여름밤을 아름다운 꿈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거기에는 생활의 무거운 짐이 있다. 잔칫집 마당같이 들볶아치는 야시에는 하루면 스물네 시간의 끊임없는 생활의 지긋지긋한 그림이 벌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낮과 다름없이 역시 부르짖음이 있고, 싸움이 있고, 땀이 있었다.

독자여, 뭐? 그래도 유령이라고? 그래 그럼 유령이라고 해두자. 그렇게 말하면 사실 유령일 것이다. - 살기는 살았어도 기실 죽어 있는 셈이니!

어떻든 유령이라고 해두고 독자여 생각하여 보아라. 이 서울 안에 그런 유령이 얼마나 많이 늘어 가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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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6-09-23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곡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서곡 2026-09-23 22:58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반갑고 감사합니다~ 님도 연휴 잘 보내시길요 굿나잇입니다......
 

올해 칠석은 8월19일이었다. 1972년 8월 발표작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박완서)로부터 옮긴다. *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1380.do 참조.


직녀 (저자: Zhang Ling - The Weaver Girl. Telling Images of China (2010 exhibit). Dublin: Chester Beatty Library. 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 속 견우와 직녀 (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cf. [손홍규의 로그 인]삶과 문학 https://www.khan.co.kr/article/201101252135415 박완서 작가 별세 당시의 글로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가 인용된다.




노염이 기승을 떠는 늦여름의 오후, 설희 엄마는 우리집에 마실을 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우?"

일손을 쉬지 않은 채 불쑥 묻더니 내 대답도 안 기다리고,

"칠석이래."

또 한동안 잠자코 일손만 놀리더니,

"연이는 올여름에 피선가 바캉슨가 보내봤수?"

"아직……"

"젠장 그래도 아직이래네. 여름 다 보내놓고……"

나는 멋쩍게 픽 웃고 말았다.

"연이 엄만 돈이 아까워서, 너무너무 아까워서 뼈가 저려본 적 있수?"


그녀는 레이스 뜨기를 열심히 해서 만원 가까운 돈을 모았다. 설희를 데리고 이삼일 물놀이를 즐기려고. 실상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는 집세와 약간의 이자놀이쯤으론 시어머니 모시고 모녀가 겨우 먹고살기가 고작이었다.

그런 돈에서 오천원을 오늘 시어머니가 무당집에 가서 칠월칠석 치성을 드려야겠다고 가지고 갔다는 것이었다.

"드리지 말지. 요새 세상에 치성은 무슨……"

나도 그 돈이 무척 아까워서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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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효상문학상 작품집으로부터 옮긴다.

Image by ANDRI TEGAR MAHARDIKA from Pixabay






손보미의 작품 〈밤이 지나면〉은 스토리텔링의 긴장감이 살아 있고 심리 스릴러 같은 느낌이 재미있다. 성장소설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성장소설의 전형적인 교훈성을 뛰어넘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이 있다. 마을사람들에게 ‘미친년’ 소리를 듣는 여인과 자발적인 실어증에 걸린 ‘나’라는 어린 소녀가 내통하여 ‘정상적인 세상, 사회화된 세계’를 벗어나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와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실패마저 아이에게 커다란 성장의 발판이 된다. -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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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손보미의 단편 '밤이 지나면'은 불길한 동화 같다. 어두운 밤이 무서운 아이들이 있는 법이다. 어쩌면 대부분.

Sleeping Child, 1961 - Will Barnet - WikiArt.org


소설집 '사랑의 꿈' 첫 수록작인 '밤이 지나면'은 문학동네 2019 여름호 발표작이다. 





"아줌마."

그녀가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어둠은 무서운 게 아니라고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뭐라고?"

"몰라요? 밤은 지구가 자전하니까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구 반대편에서는 사람들이 깨어 있어요. 거기는 낮이거든요. 여기는 밤, 거기는 낮."

"그걸 누가 몰라."

나는 그녀가 여전히 이죽거리고 있지만 발음이 미묘하게 뭉개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니. 너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데."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잠깐 쉬었다 가야겠다." - 밤이 지나면 | 손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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