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 사진가 다이앤 아버스에 관하여 읽고 있었다.



A young man in curlers at home on West 20th Street, 1966 - Diane Arbus - WikiArt.org








"내가 묘사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이 모든 게 조금씩 이야기하고 있는 바다. 다른 사람의 비극이 자신의 비극과는 다르다는 것."

"나는 좀 두 얼굴의 인간 같다. … 그건 정말로 뭐랄까 괴로운 일이다. 나는 그냥 너무 나이스하다. 모든 게 우와아아이다. 내 입으로 ‘멋져요’라는 말을 하면… 그건 정말 진심으로 멋지다고 말한 거다. 그건 내가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다. 내 아이들이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키스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게 놀랍도록, 부정할 수 없도록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행에서 면제받아 괴로워하느니 세상의 역경을 만나겠다는 아버스의 결심이 손택이 주장했듯이 나이브하건 아니건, 아버스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기형들을 늘 "왕국"과 "귀족"과 결부시켰다.

그녀는 사진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치료되어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고통을 택했다.

"내가 찍지 않았다면 아무도 보지 않았을 것들이 있다고 나는 정말로 믿는다."

〈웨스트 20번가 집에서 컬을 말고 있는 젊은이, 뉴욕〉(1966)에서 머리카락의 컬, 밀어버린 눈썹 위에 진하게 그린 선, 부드럽게 열린 입술이 시사하는 여성성의 가면은 턱에 희미하게 보이는 수염 자국과 우아하게 담배를 들고 있는 너무 큰 손과 굵은 손가락, 매니큐어를 한 손톱에 의해 거짓임이 드러난다. 젊은이의 눈은 카메라를 대담하게 바라보며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와 자신이 만드는 이미지 사이의 틈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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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슈타인 Edith Stein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4426a


'처음 읽는 여성 철학사(원제 The Philosopher Queens: The lives and legacies of philosophy's unsung women)'로부터 발췌한다.

Philosophia (personification of philosophy), 1502 - Albrecht Durer - WikiArt.org


올해 출간된 '질문하는 여자 - 삶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지적 여행'은 '처음 읽는 여성 철학사'와 동일한 책으로 보인다.






후설의 조교로서 슈타인의 주 업무는 시간의 현상학에 관한 후설의 기록물을 출판 가능한 원고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슈타인은 편집자에게 기대하는 일반적인 역할 이상의 일을 해냈다. 후설은 초고를 따로 챙겨 주지도 않았고, 원고를 고쳐 쓰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슈타인은 홀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자료들을 모아 톤을 맞추고 순서를 재배치해 일관성 있는 철학 서술을 구성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가 초고를 만든 것이다.

슈타인은 조교 계약이 끝날 즈음 장래를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하빌리타치온(독일의 대학교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싶었으나, 후설이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일반 대학을 떠나 가톨릭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재직했던 학교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1928년 후설은 슈타인이 작업한 원고를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On the Phenomenology of the Consciousness of Internal Time)》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저작권은 후설에게 있었고, 이른바 편집자는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가 출간을 위해 원고를 준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겠지만, 원고의 상당 부분은 슈타인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든 것이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이 한마디만 끼워놓았을 뿐이다. [슈타인이 후설의 강의 속기록을 원고로 옮겨놓았다.]

슈타인의 사례는 철학계에서 여성의 현실, 곧 업적을 저평가하거나 완전히 무시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제이 헤털리 (Jae Hette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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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유물론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5a3127a

Karl-Marx-Monument, Brückenstraße, Chemnitz, Deutschland - 사진: UnsplashMaximilian Scheffler






결론까지는 아니지만 방법만큼은 헤겔을 충실히 따랐던 마르크스는 인간의 목적은 알건 모르건 인간이 실제로 놓여 있는 사회적 상황, 즉 경제적 상황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생활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정말로 믿을 만큼 자신들이 환경과 상황,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이 속한 계급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모를 만큼 효과적으로 감추어왔다.

이 광범위하고 종합적인 이론은 구조와 기본 개념들은 헤겔과 청년 헤겔주의자들에게서, 동적 원리들은 생시몽에게서, 물질의 우위에 대한 믿음은 포이어바흐에게서,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견해는 프랑스 공산주의 전통에서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완전히 독창적인 이론이다. 그것은 여러 요소들이 절충주의로 흐르지 않고 명료하고 정합적인 체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모든 헤겔적 사유 형태들의 최대의 자랑인 동시에 치명적 결함인 거대한 건축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서는 헤겔이 자기 시대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에 대해 가졌던 오만하고 경솔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헤겔과 반대로, 마르크스의 이론은 경험과학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고 경험과학의 일반적 성과들을 받아들인다. - 6 역사적 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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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2023.1.2호의 'table 아니 에르노 『카사노바 호텔』정혜용+송지선+천희란 나와 같은 부류의 한풀이'로부터

부르디외 묘소 By ManoSolo13241324


아니 에르노의 '카사노바 호텔'(정혜용 역)에 부르디외를 추모하는 글 '슬픔'이 실려 있다. cf. ‘사회학과 장례식’ -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2410231827001






정 「슬픔」을 읽다 보면, 에르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부르디외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의미가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 자체도 좋았어요. 이렇게 덤덤하고 담백한 글이라면 죽음의 자리에 추도사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싶게요.

천 부르디외를 다룬 「슬픔」에서도 결국 에르노 자신의 문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어요. 부르디외의 이론이 사회결정론으로 해석되는 슬픔에 대해 말하면서, 지배 과정을 객관화하는 것이 오히려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자기 믿음을 드러내죠. 에르노 글쓰기의 방향, 동력 같은 걸 가늠하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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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테레사'(존 차)로부터

[Mario Ciampi designed the building (completed in 1970) that was the former home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 (BAMPFA) on Bancroft Way in Berkeley, California, where Cha worked while attending graduate school. Cha's estate donated her works to BAMPFA in 1991.] By mliu92 from San Mateo - 9414 BAM-PFA, CC BY-SA 2.0


[조해진 소설 | 잘 가, 언니] 1회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21563.html 2014년 한겨레에 연재한 조해진의 '잘 가, 언니'(소설집 '빛의 호위' 수록)는 차학경 아카이브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차학경의 '딕테'를 꺼내읽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조해진 소설 | 잘 가, 언니] 8회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23097.html 마지막 8회에서 제목인 '잘 가, 언니'가 고 차학경의 여동생 차학은의 편지('관객의 꿈' 수록)로부터 왔음이 밝혀지며 편지가 발췌인용된다. 조해진의 이 작품은 테마소설집 '한밤의 산행'(2014)에도 실려 있다.


차학경 - 테레사 학경 차의 오빠 차학성 - 존 차는 '안녕, 테레사' 외에도 '버드나무 그늘 아래'란 책이 번역출간되어 있고(역자가 같다), '차학경 예술론' 공저자이다.





예술가 차학경에 대한 기억은 전시회에서 만난 그의 작품들에서 비롯된다. 지금 내게 아직도 남아 있는 당시의 느낌은 어떤 형언하기 어려운 안도감 같은 것들이었다. 그 안도감은 ‘아, 이렇게도 언어와 언어 행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녀의 작품들은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덧없는 우리의 생애와 빛나는 기억을 독자와 함께 공유하자는 마음에서 테레사의 막냇동생 차학은이 그녀에게 보내는 시 한 부분을 덧붙인다.

나는 떠올려요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을 태양은 저기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어요 그녀는 무언가를 가리켰어요 그녀는 말했어요, "저것 봐, 저것 봐!" 나도 가리켰어요

나는 떠올려요 하얗고 반투명한 커튼 위로 던져진 우리의 그림자들 그녀가, 둥글게 잡고 있는 내 팔에서 잡아당긴 실을 감아 커다란 실뭉치를 만들 때 나는 지켜보았어요 그 마지막 조각이 내 손에서 떨어져 마룻바닥을 가로질러서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에서 그녀의 손으로 사라지는 것을 - 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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