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정혜경)의 '2장 잘못된 출발,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를 껴안은 일본' 중 '3.그럼에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선택했다'로부터 옮긴다. 

관동군 사령부(1935)


[가상 인터뷰] 이시와라 간지 https://v.daum.net/v/20060731181509665?f=o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일본은 침략전쟁을 택했다.

이시와라 간지는 1929년부터 착실한 준비에 들어갔다. 2년 후인 1931년 9월 18일, 일본 육군 관동군 참모 자격으로 만주 침략에 나섰다.

일본은 러일전쟁 후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관둥저우 방비와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중동철도의 남쪽 지선인 남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관동군이었다. 이시와라 간지는 모략을 사용해 전쟁을 일으켰다. 관동군이 일본 측 철도의 선로 일부를 스스로 폭파하고 중국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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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 '여학생'(다자이 오사무) 연보로부터

다자이와 미치코의 결혼식


올해 여름에 발간된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쏜살문고 '마음의 왕자'도 담아둔다.






1939년 30세 1월 8일, 이부세 부부의 중매로 야마나시 현 쓰루 고등여학교 교사인 26세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식을 올리고 고후 시에 살림을 차림.

1941년 32세 6월 7일, 장녀 소노코가 태어났고, 모친 병문안차 10년 만에 고향 가나기의 생가를 방문함. 11월에 문인 징용령에 의해 징발되었으나 흉부질환으로 면제 처분을 받음. 12월 8일, 태평양전쟁으로 전시체제에 접어듦. -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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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개시일을 담은 '12월 8일'은 열림원 다자이 오사무 컬렉션 '여학생'에 실려 있다.

다자이 오사무(1940)


딴 출판사의 다자이 오사무 전집 5권 '정의와 미소'수록작이다.





"이제부터는 힘들어지겠네요."전쟁 얘기를 하려 했는데, 이웃 아줌마는 며칠 전, 통장이 된 얘기인 줄로 안 모양이다."아, 아뇨,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질 못했어요."부끄러운 듯 말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쑥스러워졌다.

이웃 아줌마도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통장의 무거운 책임에 대해 긴장하고 있는 듯싶다. 이제부터 통반장 일도 힘들어질 것이다. 연습 때와는 달라질 테니까. 막상 공습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 지휘의 책임은 중대해질 것이다.

목욕탕에 갈 때에는 길이 밝았는데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두컴컴하다. 등화관제(燈火管制)를 하는 것이다. 연습이나 훈련이 아니다. 마음이 묘하게 긴장된다. 하지만 너무 어두운 게 아닐까. 이렇게 어두운 길은 이제껏 걸어본 적이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더듬거리듯 나아가고 있지만, 갈 길은 멀고 어둠은 더욱 짙어간다. -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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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박사의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이 아래 글의 출처이다.

사진: UnsplashRyan Parker  cf. USS 애리조나 기념관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0800037






국력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일본 군부와 정부 고위층이 전쟁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주 침략에서부터 시작한 잘못된 선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악수惡手였다.

일본 수뇌부는 만주조차 돌려주어야 할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졌다. ‘여기서 후퇴하면 미국의 군사적 지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리해질 것’이므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선택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일본은 패배를 껴안았다. 일본의 민중은 물론, 식민지와 점령지 민중들도 고통을 당했다.

* 일본 학계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를 포함한 15년간의 전쟁을 ‘광의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를 ‘협의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 구분하고, 태평양전쟁 이후를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2013), 『아시아태평양전쟁』, 어문학사,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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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41년 12월 7일(일본 시간 12월 8일) 진주만을 공습한다.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 - 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정혜경)로부터 옮겼다.

사진: UnsplashCasey Horner cf. 진주만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0j1195a






1941년 12월 8일 오전 6시, 라디오는 대본영육해군부 발표를 보도했다. 첫 문장은 "제국 육해군은 오늘 8일 미명未明,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갔다"였다. 그리고 그날 천황은 선전宣戰 조서를 내렸다.

개전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일본의 12배에 가까웠다.

누가 보아도 열세였다. 그런데 군부는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해 국민을 결속시키고자 위기를 강조했다.

선동은 통했다. 천황의 선전 조서를 접한 지식인들은 "역사는 만들어졌다.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 변모했다. 감동에 몸을 떨면서 무지개처럼 흐르는 한줄기 빛의 행방을 지켜보았다. … 일본 국민의 결의는 하나로 불타올랐다. 상쾌한 기분"이라며 감격을 나누었다.* *가토 요코,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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