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수용소과 스페인 내전
'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중 '스페인 내전' 편으로부터 아래 옮긴 글에 나온, 스페인 내전 난민들이 보내진 프랑스의 아르젤레스 Argeles 는 루시옹 해변에 있다.
이정표 맨꼭대기에 '아르젤레스'가 있다. - 사진: Unsplash의Jametlene Reskp
아르젤레스 난민캠프 1939 Par Albert Belloc —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생시프리앵(셍씨프히엉) Saint-Cyprien (여기에도 난민캠프가 있었다.) Par Alan Mattingly — Travail personnel,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1939년 프랑스의 스페인 난민캠프 실태] https://blog.naver.com/lemonde100/221697800478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9
공화국의 난민은 프랑코군을 두려워하여 카탈루냐 지방과 레반테 지방으로 모여들었다. 1938년 내전이 끝날 때쯤 공화국 난민은 백만 명 정도였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배에 타지 못한 공화국 시민 50만 명과 공화국군 수천 명은 육로로 카탈루냐에서 프랑스의 국경을 향해 떠났다.
힘들게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스페인에서 온 피난민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경계선을 긋고 나서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스페인 난민들을 통제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에는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1939년 말,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으로 어려움에 빠졌다. 자국의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프랑스는 스페인 난민까지 신경을 쓸 처지가 아니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주인공은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프랑스군은 남성, 여성, 아이들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프랑코가 있는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외인부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빨리 선택하라는 프랑스군의 재촉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도 선택하지 않자, 프랑스군은 그들을 농촌 노동에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피난민의 현실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스페인 난민은 프랑스 남동부 끝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아르젤레스와 셍씨프히엉에 위치한 농장으로 보내져 노동 착취를 당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절반가량의 스페인 난민은 스페인으로 송환되었다. 그들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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