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그 인간적인 것 성서와 인간 4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4권이다. 매번 읽으면서 참으로 기쁘다. 신부님께 그저 감사드리고 싶다. 근데 이건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닌가 보다. 책 뒤표지 안쪽을 보니 1998년 초판이 나와서 이번 2008년 4월에 20쇄를 찍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한때 나 역시 책을 써본 경험이 있는지라, 이런 모습 보면 세속적 기준에서 부럽다. 나는 잘 팔린 책이 기껏 4쇄였는데. 아마 세속적 흥미의 책을 써서 그런가 보다. 이제 나에게 하느님이 또 책을 쓸 기회를 허락하신다면 이제는 나 역시 인간의 영혼을 하느님께 이끄는, 마음에 하느님의 평화를 심는 글을 심고 싶다.




이 책의 주제, 고통이라는 것 역시 그런 테마다. 사람들을 평화로 이끌고 있다. 고통.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근데 피할 수 없이 어느 인간에게나 고통은 다가온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렇다면 그 고통은 왜 찾아오는 것이며, 어떻게 이겨나가는 것이 옳은가, 이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신부님께서 모색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책이다.

먼저 고통은 왜 생기는가?

사람들은 우선 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성서를 통해서 볼 때도 그랬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도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에서 볼 수 있는 경우다. 일반적인 사고도 그렇다. 권선징악.

그런데 그 권선징악이 적용되지 않는 모습도 많이 본다. 선한 사람이 고통에 빠지고 오히려 악인이 세상의 권세를 얻는 경우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 생각한 것은 다른 사람의 죄,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 받는다는 판단이다. 바빌론 유배 이전의 사고에는 이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유배 이후에는 “죄 지은 장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고 에제키엘 예언자가 말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그냥 신비라는 견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욥이 그랬다. 그리고 예수님도 제자들이 ‘그 아이의 죄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가’를 물었을 때, 아이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서의 고통이 그 경우다. 운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만 괜히 슬프고, 억울해 보인다. 사실 말 그래도 주인은 그분이시기에 억울해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다음 해석은 고통은 우리를 시험하고 견책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괴로움을 허락한 것은 그로 인해서 하느님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 딱 들어맞는 말이다. ‘고통은 인간을 정화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정말 몸으로 절감한다. 내가 하느님 앞으로 돌아온 것도 고통 때문이었다. 고통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깨닫고, 또 그 고통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그러고 보면 고통은 세상사에 정신을 뺏기고 있는 인간들을 일깨워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은혜로운 도구이다.

신앙인에게 고통은 하느님 사랑의 계획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 히브리서에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 6) 또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내십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이겠습니까?”(히브 12, 7)라고 나와 있다. 즉 고통의 교육적 가치를 말한 것이다. 묵시록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 3, 19)라고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같은 대속적 고통관도 있다. 궁극으로 이런 고통까지 함께 해야 하겠지만 아직 나로서는 자신이 없고 두려운 일이다.

어쨌거나 고통이 그러그러한 이유에서 나왔다고 해도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겠다. 없으면 제일로 좋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안 된다. 그래서 저자는 ‘고통은 인간 실존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불교와 이슬람의 가르침도 소개한다. 불교에서는 아예 인생을 苦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게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성내거나 못 견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고통을 신이 준 운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디 다른 가르침을 둘러봐도 고통은 필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대면해야 하겠는가. 피하지 말고 수용해야만 한다. 고통 안에서 쉴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고승은 ‘깨닫기 전에는 고통이었는데 깨닫고 나서도 고통이더라. 하지만 깨닫기 전에 고통에선 심란했는데, 깨달은 후의 고통에서는 심란치 않더라’라고 말한다.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하느님은 악을 허락하시지만 이는 그것을 더욱 큰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이다”라는 말 그래도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disappointment는 앞의 철자만 바꾸면 His appointment가 된다. 내 삶의 계획이 틀어진 것은 사실 나를 위한 하느님의 더 좋은 선택이라는 말이다. 약속이라는 말이다.

하긴 나 역시 그 세속적 욕망 추구를 위해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맹렬히 질주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 무너졌다. 그러나 그 무너짐이 돌이켜 보면 내게는 축복이다. 만약 그때 무너지지 않고 더 달렸더라면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지경까지 갔을 것이다. 이쯤에서 주님께서 잘라 주셨다. 고통을 통해.

그러기에 고통이 더 이상 더 이상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었다. 나를 새롭게 나게 하는 계기였다. 그래서 작년 말 나의 입에서 “주님, 이 고통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야곱과 요셉의 삶의 자세를 비교한다. 야곱 집념의 사나이, 요셉은 순명의 사나이였다. 고생은 오히려 요셉이 더 심하게 겪었을 것인데, 순명했다. 항상 하느님을 찾았다. 반면 야곱은 버텼다. 그것 차이인 것 같다. 요셉처럼 “하느님께서”라는 말을 항상 달고 살면, 그 고통도 능히 이길 만 한 게 될 것이다.

하긴 풍랑 속의 제자들도 태평스레 잠만 예수님을 보면서 흔들렸다. 두려웠던 것이다. 이건 순명하지 못한 삶이다. 전적으로 의탁했더라면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풍랑 속 그 배에서 두려워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왜 너희는 아직도 두려워하느냐?” “너희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그 두 질문에 대해 나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 두렵고, 믿음도 더 생겼습니다’라고 답한다.

계속 가야할 길이다.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해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곤란을 겪으리라는 것과 하지만 결코 혼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또 평화 중에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평화를 간직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고난 중에도 평화, 풍랑 속에서도 고요. 축복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똑똑한 등산이 내 몸을 살린다
야마모토 마사요시 지음, 선우섭 옮김 / 마운틴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젊어서는 유도를 했다. 잘 나갔다. 메달도 따고. 머리 커져서 공부한다고 운동은 그냥 취미였다. 그러나 그 땐 운동보다도 술, 담배가 더 좋았다. 시대적 아픔을 술과 벗들과 녹이며.

그러다가 결핍을 느끼며, 정화를 느끼며 요가를 시작했다. 나의 경우 반응이 아주 빨랐다. 열흘 만에 댓병 소주가 떨어졌고, 두 갑 담배가 막을 내렸다. 그릭고 한 달이 지나자 8킬로그램이 줄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요가 수련 7년 8개월을 작년에 접었다. 알지 못하는 이상한 증상으로 죽음 가까이 갔다 왔기 때문이다. 요가는 단순한 스트레칭이 아니다. 영적 세계와 결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기에 정말 영적으로 맑은 지도자를 만나서 수행하지 못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단순 스트레칭은 별 문제가 없지만, 깊이 들어가면서 명상 수행을 잘못하면 다친다.

그래서 다시 즐겁게 축구를 했다. 그러다가 종아리 근육파역 손목 부상으로 지금껏 고생한다.

그래 이젠 과한 운동은 안 돼. 그러고 수영을 했는데, 하체 운동이 아무래도 약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락스 냄새, 피부가 다 망가지는 것 같다.

역시, 산이 좋겠다 싶어 산을 찾았다. 시간이 좀 소요되긴 하지만, 내가 사는 동네엔 오름이 많이 간단한 산보 정도의 등산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이거다. 이게 내가 함께 할 운동이다 싶었다. 그럴 무렵 신간 안내에서 이 책을 보았다.

좋다. 일본 책을 번역한 것인데 이론과 실전이 풍부하다. 과학적 분석으로 등산과 인체를 말한다. 이제 갓 시작한 등산으로 무릎이 신통치 않은데, 그 무릎 통증을 줄일 트레이닝도 소개되어 있다. 요통 역시 마찬 가지다. 이때는 전굴, 무릎은 이러저러한 스트레칭이 좋다. 서서 벽에 기대어 다리를 뒤로 접어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제 오름 가면서 해 봤더니 효과가 바로 나타난다.

근육통이 등산 때가 아니라 하신 때 일어난다는 것도 주의 깊게 봤다. 사실 이젠 오르는 것보다 내리는 게 힘들다. 근육에, 무릎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내리는 방법을 본다.

하지만 후반부의 암벽 등반과 고지 등반에 관한 부분은 접었다. 예전에 책읽기 범생이 강박이 있어서 무족건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지만 이제는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서 살고 싶다. 굳이 지금 내가 암벽이나 고지를 갈 게 아니라면 그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읽고 아니면 그만이다.

이제 꾸준히 다니자. 등산은 격하지 않고 느긋하면서도 끈기 있게 하는 운동이다. 그뿐이겠는가. 맑은 공기, 그리고 쉼, 사색이 함께 하기에, 굳이 저자가 애써 설명한 과학적 운동 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산, 그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야리아폭격기 2012-09-07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적 아픔을 술에 녹여 ㅋㅋㅋㅋㅋㅋ 아 미친 허셐ㅋㅋㅋ
 
생명을 돌보는 인간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3편이다. 역시 좋다. 살아도 정말 ‘생명’이 있어야 삶이지, 지금처럼 맹탕 살면 그건 죽은 삶이다. 신부님 글 읽으며 1) 생명을 받고,  2) 생명을 유지, 보존하며,  3)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게 이 책의 내용이다. 사실 내용 자체가 어려울 것은 없다.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信·望·愛 3덕을 잘 닦으면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생명을 받고, 소망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사랑함으로써 생명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생명을 받는 것은 당연히 하느님부터로다. 기도와 성사 속에, 명상 속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꿈을 통해. 나는 분주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생명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근데 신부님은 “말없이 멈춰서서 바라보는 한 폭의 경치는 우리가 책에서 얻는 가르침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줄 것이다”라고 한다. 이제야 조금 느낀다. 언제가 오름에 올라가 들꽃을 보면서 눈물이 나던 날. 예전에 그렇질 못했다. 모든 것이 연구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힘을 빼니 아름다움이, 하느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이 했던 건, 꿈을 통한 하느님 만나기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꿈은 그냥 돼지꿈, 개꿈으로만 생각했었다. 근데 신부님은 꿈은 무의식이 드러난 것이며, 무의식 역시 삶의 실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꿈을 꾸면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라고 하신다. 잊기 전에 기록도 하고. 앞으로 해 봐야겠다.

다음은 그렇게 받은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먼저 일에 반응하지 말고 선택하라고 하신다. 반응하면 화나 낼 것이다. 하지만 선택하면 너그러워진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환경에 내가 주체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애씀과 무리가 없는 삶. 이건 노자 도덕경 이야기 같다. 물고기는 애쓰면서 헤엄치지 않는다고, 인간만이 어깨와 목에 힘을 줄 뿐이라고. 맞다. 덧 없는 것에다 진을 빼지 말자. 온유하게, 여여하게, 자연스럽게, 매사에 애씀이 없이, 무리함 없이, 생명의 진 뺌 없이, 자연의 음률에 따라 사는 삶.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작년까진 내가 너무 젊었는지, 정신없이 살았다. 이제야 좀 힘 빼고 있는데, 근데, 몸이 좀 나아지니까 다시 옛 버릇처럼 ‘애씀’으로 살 것 같다. 조심해야지.

신부님은 이런 삶을 위해 우선 하루 세 끼 밥 규칙적으로 잘 먹을 것. 잠 충분히 잘 것을 말한다. 황당할지 모르지만, 이는 예전에 어느 피정에서 듣고 공감했던 부분이다. 이런 자세가 되어야 주님과 만난다. 바쁘면 못 만나고 만나서 얻은 생명을 보존하지도 못한다.

다음은 항상 소망을 상기하면서 살라고 하신다. 물론 소망과 욕망은 다를 것이다. 욕망은 예전 험한 세상 헤쳐 나가느라 하던 짓이라면 이제 중년 이후의 삶에서 소망은 생을 더욱 보람 있게 만들 가치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랑의 실천, 나눔의 실천이라는 소망 말이다. 이 세상 소망 말고 저 세상 소망 말이다. 이 때 주의할 점, 소망을 자신의 능력에 두면 안된다. 그러다간 스스로에게 속고 만다. 항상 기도 중에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고 습관적으로 하는 것도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된다.

그리고 감사하는 훈련도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잘 못한다. 이 책을 보니까 그게 1)내가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2)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명성.- 그렇다. 내가 이랬다. 근데 모든 것이 창조주에게서 나왔다는 생각, 즉 나는 내 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오늘 내가 살고 있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니고 모두 감사해야 함을 느낀다. 맞다.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일부터 감사할 일이다. 선물임을 깨달았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자리마다 순간마다 감사할 일이다. 오늘부터 매일 잠들기 전에 하루에 감사할 일 10 가지 이상은 떠올리고 자야겠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나누는 것. 이건 사랑이다. 보시다. 돈만이 아니라 시간, 관심 등 모든 것을 나눠야 한다. 배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신부님은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에게 선물을 주라고 한다. 물질적이든, 격려든, 칭찬이든, 인사든.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항상 화살기도를 올리라고 한다. 참 좋은 제안이다. 항상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을 주어야겠다. 사랑을 나누는 일, 그 자체가 생명을 나누는 일일 터이니.




문제는 실천이다. 감사와 선물 주기만이라도 오늘부터 꼭 해 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야에 선 인간 성서와 인간 2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2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광야에로의 초대




송봉모, <광야에 선 인간>, 바오로딸, 1998.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씨리즈’ 2권이다. 이 씨리즈를 다 구입해서 하나씩 읽고 있다. 예전에 몇 권 읽었더니 좋았다. 포켓북이라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짧은 글이면서도 울림이 크다.

특히 요즘 성경공부 진도가 <탈출기> 중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부분이라 시기적으로도 더욱 적절했다. 게다가 내가 겪은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더 와 닿는다.

광야. 처음 광야라는 단어를 접하고 ‘짠’던 건 대학 다닐 때 불렀던 ‘광야에서’라는 노래였겠다. 그러나 그 노래의 광야와는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광야는 물도 없고, 삭막하고, 인간이 생존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그런 땅이다. 밤이면 춥고, 낮에는 햇빛 가릴 나무조차 없는 그런 곳이다.

소설 속에서 그려 보긴 좋으나 막상 내가 그런 땅에 놓이게 된다면 돌아버릴 것 같다. 낭만이 아니다. 절박함이다. 그러니 피하고 싶은 땅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광야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광야가 자신의 성숙을 위한 땅이 되기도 하고, 절망과 좌절의 땅이 되기도 한다.

작년부터 겪었던 그 고통,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던 날들. 물론 지금도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작년 같지는 않다. 수월하다. 방심할 것은 아니겠지만.

작년 그 고통의 시간, 당시에는 정말 이러느니 차라리 죽음이 낫겠다 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라나 지금 그 고통이 어느 정도 정리된 시점에서 보니 그 광야는 내게 축복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광야로 초대했던 것이다. 나의 성숙을 위해, 나의 정화를 위해, 나의 정립을 위해.

광야는 그래도 과정이다. 끝이 아니다. 자유인으로 거듭 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일 뿐이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유의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광야 생활 40년을 통해 단련되고 정화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 신앙을 떠나, 삶의 참의미 찾기를 떠나, 세속적인 것만을 추구했던 시간을 광야는 정화해주었다.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래서 작년 추석 영훈 형이 어쩌면 내게 그런 시련이 닥쳐 온 게 다행이라고 했다. 공감한다. 우리 386들, 이제 40대 사회의 주역이 되면서 정신없이 산다. 그러다 보니 자기 성찰을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작년 무너지면서, 바닥까지 내려가면서 성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고통의 기간 중에 성찰 외에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광야야말로 나의 삶을 바꾼 하느님의 초대이지 않은가.

송봉모 신부님은 책에서 광야는 두 얼굴의 장소라고 말한다. 고통의 얼굴, 그리고 보살핌의 얼굴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얼굴을 따라가면 그 고통은 위기만을 키우고 유혹에 넘어갈 뿐이다.

그러나 위기를 또 하나의 기회로 삼고 하느님의 보살핌을 따라간다면 삶은 다르게 열린다. 축복으로 바뀐다. 삶의 우선순위를 깨닫게 된다. 세속적 명예의 덧 없음을 보게 된다. 신기한 게 작년 겪었던 그 고통 속에서도 죽지는 않았다. 이건 신비다. 그래서 이게 주님의 보살핌임을 느꼈다.

그래서 ‘쾌락, 학벌, 명예 등 세속 문화에의 중독’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덧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갔던 시간을 뼈저리게 반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작년 그 고통의 과정에서도 석 달 정도 지나니까 내 입에서 “주님, 이 고통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신부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안고’갈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라 한다.

결국 광야는 우리를 시험하는, 단련하는 장소인 것이다.

“내가 너희 찌꺼기를 용광로에서 녹여내고 납들을 걷어내어 너를 순결케 하리라”(이사 1, 25)

“아들아! 네가 주님을 섬기려면 스스로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곧게 가져 동요하지 말며 역경에 처해서 당황하지 말라. 어떠한 일이 닥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네 처지가 불쌍하게 되더라도 참고 견디어라. 실로 황금은 불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에서 단련되어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집회 2,1-5)

작년 겪은 광야는 하느님이 나를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발적으로 간혹은 광야를 찾아가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시작 전 40일을 광야에서 지내셨다. 단련을 위해서겠다. 사도 바오로도, 사막의 교부들도 스스로 사막으로 들어갔다. 필요해서 그랬을 것이다.

내게도 그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핏하면 이집트 시절을 그리워했듯이 나 역시 예전의 세속적 생활을 간혹은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명예욕에 집착하며 살았던 그 시절, 남들이 나를 치켜세워주는 그 맛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니 경계하기 위해서도 때론 일상에서 잠깐 일상을 벗어나 광야를 찾아들어가야겠다. 예수님께서도 간혹 기도하기 위해 혼자 산으로 오르시곤 했다. 그런 시간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일상의 바쁨에 빠지지 않게, 늘 성찰할 시간을 마련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월든>의 소로가 그런 사람이었어?

박홍규,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필맥, 2008.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비단 영화 속의 그 인간만도 아니고 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물론 잘 나가는 인간들이야 여전히 앞만 보고 가느라 정신없을 터이니 귀환희망족(?) 부류에서 빼드려야겠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돌아가는 데 있어서 지침이 될 선생을 찾았다. 나 역시 열심히 찾아 다녔다. 몸은 빼고 머리로만. 그렇게 대리 만족만 했다. 그래도 그게 하나의 큰 경향이었다. 특히 웰빙이니 귀농이니 마음 수련이니 하는 단어가 강아지 입에 물린 핸드폰 마냥 낯설지 않을 만큼 생태주의가 상업화된 2008년 대한민국에선 더욱더. 그래서 10년 전쯤부터 니어링이니 타샤 튜터 같은 사람들을 많이 찾았다. 소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싶었다. 아니 소로가 원조처럼 보였다. 니어링 부부나 타샤 투터보다 앞선 세대에 ‘월든’ 숲 속에서 생활했던 사람이니.
그래서 소로를 환경보호론자, 동식물연구가, 박물학자, 시인, 금욕주의자 등으로 묘사하기도 했단다. 근데 내가 좋아하는 이단자 박홍규가 이런 시각을 완전히 비틀며 소로에 대한 평전을 냈단다. 호기심. 나는 박홍규의 그 올바른 비틀기를 좋아하니까 당연히 읽어야지. 그래 놓고 책을 사긴 했는데 처박아 두었다. 몸이 안 따라줘서 그랬다.
방학을 하니까 그래도 여유가 생겨 이 책을 들었다. 역시 박홍규. 물론 오버 하는 느낌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소로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다가 온다.
박홍규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그동안 소로가 한국에는 너무 일면적으로 알려져 왔다는 것. <월든>만 많이 소개되고 <시민저항>은 별로 소개되지 않은 관계로 ‘자연’만 알려지고 그의 ‘저항’ 특히 폭력적 저항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려져도 그렇게 ‘생태주의 운동’과 ‘근원적 민주주의’적인 면만 주목을 받았을 뿐, 그의 반체제적 성향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로는 禪僧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한마디로 정의하면 ‘제멋대로 살기의 달인’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규정이다. 과격한 규정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것이 결코 헛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확실히 우린 지금까지 소로를 잘못 본 것 같다. 웰빙이니 자연이니 하는 시대 조류에 맞게 그를 요리해서 먹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는 성자이기는 커녕 반역자이고 성인이 아니라 무법자라는 것이다.
이러면 거부감이 드는가. 아니다. 나는 이런 규정이 좋다. 나의 성격 결함? 설마. 소로가 그때 그렇게 살았던 것은 당시 미국 사회가 완전히 ‘돈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 그 속의 이웃들은 ‘돈에 미쳐 싸우는 짐승’ 같았기 때문에 소로가 그렇게 그 틀을 벗어나 제멋대로 살았던 것이다. ‘돈에 미쳐’라는 대목은 2008년 한국사회를 닮았다. 그러니 땡기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세태에 소로는 미리부터 경고했다.
“생계를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인간만큼 치명적인 실패자는 없다”고. 맞는 말이다. 예전에 공선옥의 글에서 읽은 ‘생존 이상의 부에 연연해하지 말 것’과 상통한다. 예전엔 말로만 이해했는데 요즘은 제법 몸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살아질 것 같다.
그런 소로이건만 사람들은 그를 전원생활의 모범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고급 승용차에 골프채를 싣고 다니면서 경치 좋은 변두리에 별장 지어 놓고 사는 사람들까지 ‘소로’를 입에 올리고 있으니 박홍규가 열 받을 만도 했겠다.
책 마무리에서 그가 강조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고급 아파트, 고급 승용차, 골프, 별장, 성형수술, 고급 브랜드, 사치스러운 관광여행, 상업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중을 현혹하는 저급한 공연물 등 모든 천박한 사치와 허영 그리고 퇴폐를 당장 거부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등지고 시골이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다. 다만 그런 것들 가운데 일부를 갖고 가서 안락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은 위선이며 해악을 초래한다. 이 책의 결론은 간단하다. 모든 물질문명을 거부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물질문명의 지배를 받게 되지 않을 정도로는 그것을 거부해야 인간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유다. 돈이 많아야 자유가 아니라 그 돈을 추구하는 미친 풍토에서 벗어날 때 자유다. 그렇게 해서 다가간 자연이 진짜 자연이다. 이익을 만들어 내는 데에 활용하는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그건 인간이 저지른 야만에 이용되는 대상일 뿐이다.
아나키스트 박홍규. 예전에 그의 책에서 자유, 자연, 자치의 기치를 읽었다. 이번 소로 평전에서도 그 가치관이 녹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로를 왜곡했다. 은둔 성자처럼.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게 아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예전에 <월든>을 읽으며 의문스럽긴 했다. 그가 월든 숲에서 지낸 기간이 불과 2년이다. 그 2년 생활로 삶을 마친 게 아니다. 다시 도시에 와서 살았다. 근데 이 대목에서 황당한 건 그가 월든 생활로 영양실조에 걸렸고, 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얼마 뒤에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대목이다. 그렇게도 사람들이 칭송하는 월든 숲에서의 생활이 남긴 게 그런 것이었나. 암튼 2년 만에 그 숲 생활을 정리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무슨 은둔 성자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세상 더럽다고 생각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주러 잠시 숲 생활을 했을 뿐인 것 같다. 왜곡 과장하지 말지어다.
또한 내가 놀란 것은 <존 브라운 대장을 위한 변호>에 나온다는 그의 폭력저항에 대한 동의 부분이다. 흔히 간디도 이 소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소로가 폭력저항까지 옹호했다니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하긴 사람은 변한다. 처음엔 비폭력 저항을 내세우다가도 어떤 극한 상황에 대한 체험으로 그렇게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 그의 저항 방법은 불복종이다. 인두세 납부 거부였다.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 즉 정부가 그런 못된 짓을 하는 데 도움이 되게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쁜 곳에 쓰일 게 뻔한데도 세금을 내는 것은 어쩌면 공범이 된다는 논리다. 그러니 납세 거부. 참 마음에 든다. 나도 지금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못한다.
실제 그로 인해 투옥되기까지도 했다. 물론 친척이 세금을 대납하는 바람에 감옥 체험은 이틀 만에 끝났다고 하니 좀 싱겁긴 했다. 그런 그가 어떤 계기로 폭력저항에도 긍정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암튼 전반적으로 그는 그 사회의 이단아였음은 분명하다. 당시 기득권자들은 그를 심한 꼴통으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도 울림이 큰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박홍규가 비틀어 본 것 말고, 예전부터 소로를 논하던 관점도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발적 빈곤’을 주장한 점.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일을 적게 하는 정부’라는 주장.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는 말.
그렇다고 단순히 사회개혁운동가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는 제도의 완성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 즉 새로운 인간상의 창조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와 자유가 인간의 선량함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끝내는 승리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반은 공감하고 반은 부정하고 싶다. 제도 개선만으로 안 되는 것은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상 창조의 방법에 대해서는 일단 구체적이지 않으므로 보류 입장을 취하겠다.
그럼에도 그의 좌충우돌은 상당히 선구적인 작업이었음을 인정한다. 본받고 싶지만 나는 용기가 없어 그러지 못한다. 부럽다.
솔직히 이런 사람을 보면 요즘 나는 일단 그의 결혼 유무와 자식이 있나 없나부터 따지고 본다. 역시나. 그는 미혼이었다. 홀몸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이단아 짓기 가능했지 싶다.
그렇다고 그가 결혼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퇴짜를 맞은 경험도 있다. 암튼 이런 사람을 보면 그의 처지와 나의 처지가 다름을 일단 설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알갱이는 챙기고 싶다.
“생계 이상의 돈벌이에 연연하지 말고 자유인이 될 것. 그것은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을 것. 그 자연 역시 돈벌이와 관련 없이 자연 그대로의 자연일 것.” 그것을 방해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싸울 것. 하지만 그 싸움도 단순히 제도 개선이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
나도 숲에 들어가 살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