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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그 인간적인 것 ㅣ 성서와 인간 4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4권이다. 매번 읽으면서 참으로 기쁘다. 신부님께 그저 감사드리고 싶다. 근데 이건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닌가 보다. 책 뒤표지 안쪽을 보니 1998년 초판이 나와서 이번 2008년 4월에 20쇄를 찍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한때 나 역시 책을 써본 경험이 있는지라, 이런 모습 보면 세속적 기준에서 부럽다. 나는 잘 팔린 책이 기껏 4쇄였는데. 아마 세속적 흥미의 책을 써서 그런가 보다. 이제 나에게 하느님이 또 책을 쓸 기회를 허락하신다면 이제는 나 역시 인간의 영혼을 하느님께 이끄는, 마음에 하느님의 평화를 심는 글을 심고 싶다.
이 책의 주제, 고통이라는 것 역시 그런 테마다. 사람들을 평화로 이끌고 있다. 고통.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근데 피할 수 없이 어느 인간에게나 고통은 다가온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렇다면 그 고통은 왜 찾아오는 것이며, 어떻게 이겨나가는 것이 옳은가, 이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신부님께서 모색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책이다.
먼저 고통은 왜 생기는가?
사람들은 우선 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성서를 통해서 볼 때도 그랬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도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에서 볼 수 있는 경우다. 일반적인 사고도 그렇다. 권선징악.
그런데 그 권선징악이 적용되지 않는 모습도 많이 본다. 선한 사람이 고통에 빠지고 오히려 악인이 세상의 권세를 얻는 경우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 생각한 것은 다른 사람의 죄,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 받는다는 판단이다. 바빌론 유배 이전의 사고에는 이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유배 이후에는 “죄 지은 장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고 에제키엘 예언자가 말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그냥 신비라는 견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욥이 그랬다. 그리고 예수님도 제자들이 ‘그 아이의 죄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가’를 물었을 때, 아이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서의 고통이 그 경우다. 운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만 괜히 슬프고, 억울해 보인다. 사실 말 그래도 주인은 그분이시기에 억울해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다음 해석은 고통은 우리를 시험하고 견책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괴로움을 허락한 것은 그로 인해서 하느님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 딱 들어맞는 말이다. ‘고통은 인간을 정화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정말 몸으로 절감한다. 내가 하느님 앞으로 돌아온 것도 고통 때문이었다. 고통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깨닫고, 또 그 고통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그러고 보면 고통은 세상사에 정신을 뺏기고 있는 인간들을 일깨워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은혜로운 도구이다.
신앙인에게 고통은 하느님 사랑의 계획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 히브리서에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 6) 또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내십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이겠습니까?”(히브 12, 7)라고 나와 있다. 즉 고통의 교육적 가치를 말한 것이다. 묵시록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 3, 19)라고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같은 대속적 고통관도 있다. 궁극으로 이런 고통까지 함께 해야 하겠지만 아직 나로서는 자신이 없고 두려운 일이다.
어쨌거나 고통이 그러그러한 이유에서 나왔다고 해도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겠다. 없으면 제일로 좋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안 된다. 그래서 저자는 ‘고통은 인간 실존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불교와 이슬람의 가르침도 소개한다. 불교에서는 아예 인생을 苦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게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성내거나 못 견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고통을 신이 준 운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디 다른 가르침을 둘러봐도 고통은 필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대면해야 하겠는가. 피하지 말고 수용해야만 한다. 고통 안에서 쉴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고승은 ‘깨닫기 전에는 고통이었는데 깨닫고 나서도 고통이더라. 하지만 깨닫기 전에 고통에선 심란했는데, 깨달은 후의 고통에서는 심란치 않더라’라고 말한다.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하느님은 악을 허락하시지만 이는 그것을 더욱 큰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이다”라는 말 그래도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disappointment는 앞의 철자만 바꾸면 His appointment가 된다. 내 삶의 계획이 틀어진 것은 사실 나를 위한 하느님의 더 좋은 선택이라는 말이다. 약속이라는 말이다.
하긴 나 역시 그 세속적 욕망 추구를 위해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맹렬히 질주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 무너졌다. 그러나 그 무너짐이 돌이켜 보면 내게는 축복이다. 만약 그때 무너지지 않고 더 달렸더라면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지경까지 갔을 것이다. 이쯤에서 주님께서 잘라 주셨다. 고통을 통해.
그러기에 고통이 더 이상 더 이상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었다. 나를 새롭게 나게 하는 계기였다. 그래서 작년 말 나의 입에서 “주님, 이 고통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야곱과 요셉의 삶의 자세를 비교한다. 야곱 집념의 사나이, 요셉은 순명의 사나이였다. 고생은 오히려 요셉이 더 심하게 겪었을 것인데, 순명했다. 항상 하느님을 찾았다. 반면 야곱은 버텼다. 그것 차이인 것 같다. 요셉처럼 “하느님께서”라는 말을 항상 달고 살면, 그 고통도 능히 이길 만 한 게 될 것이다.
하긴 풍랑 속의 제자들도 태평스레 잠만 예수님을 보면서 흔들렸다. 두려웠던 것이다. 이건 순명하지 못한 삶이다. 전적으로 의탁했더라면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풍랑 속 그 배에서 두려워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왜 너희는 아직도 두려워하느냐?” “너희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그 두 질문에 대해 나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 두렵고, 믿음도 더 생겼습니다’라고 답한다.
계속 가야할 길이다.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해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곤란을 겪으리라는 것과 하지만 결코 혼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또 평화 중에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평화를 간직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고난 중에도 평화, 풍랑 속에서도 고요. 축복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