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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선 인간 ㅣ 성서와 인간 2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2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광야에로의 초대
송봉모, <광야에 선 인간>, 바오로딸, 1998.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씨리즈’ 2권이다. 이 씨리즈를 다 구입해서 하나씩 읽고 있다. 예전에 몇 권 읽었더니 좋았다. 포켓북이라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짧은 글이면서도 울림이 크다.
특히 요즘 성경공부 진도가 <탈출기> 중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부분이라 시기적으로도 더욱 적절했다. 게다가 내가 겪은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더 와 닿는다.
광야. 처음 광야라는 단어를 접하고 ‘짠’던 건 대학 다닐 때 불렀던 ‘광야에서’라는 노래였겠다. 그러나 그 노래의 광야와는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광야는 물도 없고, 삭막하고, 인간이 생존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그런 땅이다. 밤이면 춥고, 낮에는 햇빛 가릴 나무조차 없는 그런 곳이다.
소설 속에서 그려 보긴 좋으나 막상 내가 그런 땅에 놓이게 된다면 돌아버릴 것 같다. 낭만이 아니다. 절박함이다. 그러니 피하고 싶은 땅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광야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광야가 자신의 성숙을 위한 땅이 되기도 하고, 절망과 좌절의 땅이 되기도 한다.
작년부터 겪었던 그 고통,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던 날들. 물론 지금도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작년 같지는 않다. 수월하다. 방심할 것은 아니겠지만.
작년 그 고통의 시간, 당시에는 정말 이러느니 차라리 죽음이 낫겠다 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라나 지금 그 고통이 어느 정도 정리된 시점에서 보니 그 광야는 내게 축복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광야로 초대했던 것이다. 나의 성숙을 위해, 나의 정화를 위해, 나의 정립을 위해.
광야는 그래도 과정이다. 끝이 아니다. 자유인으로 거듭 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일 뿐이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유의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광야 생활 40년을 통해 단련되고 정화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 신앙을 떠나, 삶의 참의미 찾기를 떠나, 세속적인 것만을 추구했던 시간을 광야는 정화해주었다.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래서 작년 추석 영훈 형이 어쩌면 내게 그런 시련이 닥쳐 온 게 다행이라고 했다. 공감한다. 우리 386들, 이제 40대 사회의 주역이 되면서 정신없이 산다. 그러다 보니 자기 성찰을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작년 무너지면서, 바닥까지 내려가면서 성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고통의 기간 중에 성찰 외에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광야야말로 나의 삶을 바꾼 하느님의 초대이지 않은가.
송봉모 신부님은 책에서 광야는 두 얼굴의 장소라고 말한다. 고통의 얼굴, 그리고 보살핌의 얼굴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얼굴을 따라가면 그 고통은 위기만을 키우고 유혹에 넘어갈 뿐이다.
그러나 위기를 또 하나의 기회로 삼고 하느님의 보살핌을 따라간다면 삶은 다르게 열린다. 축복으로 바뀐다. 삶의 우선순위를 깨닫게 된다. 세속적 명예의 덧 없음을 보게 된다. 신기한 게 작년 겪었던 그 고통 속에서도 죽지는 않았다. 이건 신비다. 그래서 이게 주님의 보살핌임을 느꼈다.
그래서 ‘쾌락, 학벌, 명예 등 세속 문화에의 중독’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덧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갔던 시간을 뼈저리게 반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작년 그 고통의 과정에서도 석 달 정도 지나니까 내 입에서 “주님, 이 고통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신부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안고’갈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라 한다.
결국 광야는 우리를 시험하는, 단련하는 장소인 것이다.
“내가 너희 찌꺼기를 용광로에서 녹여내고 납들을 걷어내어 너를 순결케 하리라”(이사 1, 25)
“아들아! 네가 주님을 섬기려면 스스로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곧게 가져 동요하지 말며 역경에 처해서 당황하지 말라. 어떠한 일이 닥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네 처지가 불쌍하게 되더라도 참고 견디어라. 실로 황금은 불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에서 단련되어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집회 2,1-5)
작년 겪은 광야는 하느님이 나를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발적으로 간혹은 광야를 찾아가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시작 전 40일을 광야에서 지내셨다. 단련을 위해서겠다. 사도 바오로도, 사막의 교부들도 스스로 사막으로 들어갔다. 필요해서 그랬을 것이다.
내게도 그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핏하면 이집트 시절을 그리워했듯이 나 역시 예전의 세속적 생활을 간혹은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명예욕에 집착하며 살았던 그 시절, 남들이 나를 치켜세워주는 그 맛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니 경계하기 위해서도 때론 일상에서 잠깐 일상을 벗어나 광야를 찾아들어가야겠다. 예수님께서도 간혹 기도하기 위해 혼자 산으로 오르시곤 했다. 그런 시간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일상의 바쁨에 빠지지 않게, 늘 성찰할 시간을 마련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