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용서 -미니북 상처와 용서 -미니북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무애진인(無碍眞人)-자유인으로 산다는 것.

송봉모, <상처와 용서>, 바오로딸, 1998.



요즘은 책을 많이 안 읽는다. 별 일이다. 정말 많이 변했다. 작년 이후의 변화다. 그땐 중독이다 싶을 정도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한 권씩 읽어대던 때도 있었다. 담배를 놓았을 때 나타난다는 금단 현상처럼 책을 며칠 읽지 못했을 때 왠지 갑갑하고 안절부절 하던 경험도 있다.
근데, 이젠 책을 안 읽는다. 읽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나 속박되지는 않을 생각이다. 자유. 이것이 또한 자유다. 그때, 책에 미쳐 살 땐, 분명 강박이 있었다. 읽고, 또 읽은 것을 꼭 써 남겨야 한다는 강박. 이건 구속이다. 자유가 아니다. 근데도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그것은 내 ‘영혼의 느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참된 나의 자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헛된, 무상한 욕망에서 야기된 것임이라는 말이다.
이제 그런 욕망에서 많이 벗어나자 책 읽기도 그리고 그에 대한 글쓰기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다. 더 이상 덧없는 그 명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규정짓기에 나를 구속시킬 필요가 없다. 본질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그럴 때 진정 자유를 느낀다.
요즘 그 자유가 좋다. 관계성에서 많이 벗어난 삶이다. 물론 인드라망적인 관계는 끝이 없겠지만, 그 그물에 걸려 허우적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번 여름 방학 때에는 대전에 가서 은사 세미나에 참석했다. 호주 빅터 신부님이 지도하는 세미나였다. 느낌이 확 다르다. 서구의 신앙이 많이 식었다 하나 두텁기는 엄청 두텁다. 반면 한국의 그것은 뜨거우나 얇다. 큰 가르침,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흠뻑 느낀 좋은 시간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정리할 기회를 만들고 싶다. 여기선 그 때 우연히 같은 방을 썼던 형제가 읽던 책 이야길 하려는 것이다. 송봉모 신부님의 책 <상처와 용서>. 가만 보니 내가 예전에 송신부님 책을 읽은 바가 있다. 바로 이 책의 씨리즈 물이다. 성서와 인간 씨리즈인데 내가 전에 읽은 것은 <9 회심하는 인간>이고 이번 것은 씨리즈 1편이다.

책은 간단하다. 포캣북이다. 그러면서 쪽수도 135쪽밖에 안 된다. 그래, 진리는 단순한 것이지. 몇몇 나와 코드가 안 맞는 사회학자들처럼 장황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짧아도 울림은 크다.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이다.
전체적인 주제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는 그리고 받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가, 그런 만큼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담고 있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여러 번이라도 읽고 싶어진다.

상처 이야기와 함께 중요한 것은 용서다. 내 경우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어려웠던 적이 있다. 베드로가 아니라 유다처럼 한심하게 나를 단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송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단죄는 파괴적이고, 병적이고, 비그리스교적이다. 자기 멸시와 자기 학대에 빠질 때 우리는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 단죄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랬나. 이번 대전에서의 세미나에선 처음 프로그램에서부터 나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꼈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이젠 이뤄졌기 때문인 모양이다.
유다와 다르게 “자신을 용서한 자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일어섰다. 성서의 훌륭한 인물은 다 스스로를 용서한 자이다. 다윗, 베드로, 막달라 마리아, 바로오 등.”
이런 예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셨음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내가 밑줄을 많이 그으며 읽은 부분은 5장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이다. 먼저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기대는 실망과 상처를 받겠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 기대는 안개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기대하면 안 된다.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희망은 자녀의 재능과 꿈을 먼저 헤아려 주며 자녀의 생이 완성되고 선이 자라기만을 바란다. 그렇지 않고 자녀든, 친지든 친구이든 누군가에게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상처를 받겠다고 자처하는 꼴이라 한다.
평소 주변에 기대하고 사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이 그저 뜻 없이 한 사소한 행동에서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별것 아닌 것 갖고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멀리한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섭섭함은 상대가 나를 어머니처럼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상처들은 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용서해야 낫는다.
특히 친밀한 사이일수록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큰 만큼 상처도 클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기대하고 상처받을 것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표현을 하라고 한다. 표현 없이 기대하다가는 상처만 키운다.
둘째는 추측하지 말라고 한다.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추측하면 오해와 상처를 낳는다.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인지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이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만 추측하고 판단하고 상처받는다면 그 상처는 내가 자초한 것이다. 이건 전에 MBTI, 에니어그램 프로그램을 하면서 배웠다. 사람은 각각 다르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인정과 애정 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환상 속에 산다. 존경받고, 인정받고, 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환상이다. 나는 이 증세가 심했던 사람이다. 물론 이번 대전 세미나에서 나의 명예욕의 뿌리가 어디인가도 보았다. 그걸 파악하니 치유도 쉬워진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명예욕은 본성 아니겠냐고 물을 것이다. 송신부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러나 송신부님은 대답은 다르게 끌어간다. 본성적인 것인가를 가만히 물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인가? 남들의 존경인가? 그리고 어떤 느낌이 오는가 점검해 보라. 만약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는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영혼의 느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의 느낌이다. 곧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이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가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 싶어 하신 것은 자유이다. 죄에서 자유롭고, 죽음에서 자유롭고, 세상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불교 언어를 빌려 표현하다면 무애진인(無碍眞人)이 되어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인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마음, 자유로운 삶이지,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정과 인정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할 것은 아니다. 그가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하는가를 찾고 그것을 치유해주어야 한다. 애정결핍에서 생긴 상처일 가능성이 많다. 기도로 치유를 하여야 한다. 요즘 교회 안에 이런 치유를 위한 기회가 많음을 보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고독하되 외롭지 않은 관계를 잘 만들어가야 한다. 홀로 있되, 사람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평소에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고독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할 수 있다.
넷째는 자신 안에 있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내 사전에 2등은 있을 수 없다’ 등의 태도는 모두 상처를 낳는 텃밭이다. 어떤 사람이 완벽한 명강의를 해서 청중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항상 그 상처의 텃밭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이젠 그렇게 살지 않는다. 송신부님은 여기서 예수님도 나자렛 회당에서 말 한 번 잘못해 매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다며 완벽한 강의, 강론에 대한 강박을 버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저 주님께 맡기고 강의하면 그뿐이다.
그래서 “반대자들의 갖은 비방이나 공격보다도 옹호자들의 열광 때문에 진리가 더 큰 몸살을 앓는다”는 드 멜로 신부님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명성에 연연하며 진리를 왜곡시키는 경우를 경고한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 잘 나간다고 생각할 때 이처럼 헛된 길을 간 경우가 많았다. 명성에 연연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비하는 영성생활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한다. 자기비하를 하면 하느님의 거룩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한다. 영성가들도 말하기를 악마가 가장 노리는 자는 1)두려워하는 자 2)분노와 악심을 품는 자 3)걱정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자 4)자기비하를 하는 자라고 한다. 그리고 악마는 이런 성향을 더욱 부추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뒤집어 살면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살 것,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365회 반복된다고 한다. 2)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갈 것 3) 걱정, 죄책감에서 벗어날 것-기쁘게 살아가야 하겠다. 4)자기 긍정적으로 살 것. 결국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마귀가 접근을 못하겠다 싶다.
물론 자기애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자기애는 나누지만 이기주의는 받고 챙기기만 한다. 이런 자기 사람이야말로 영적 성장의 첫 번째 단계다. 대전에서 그런 비슷한 이야길 들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영성생활의 기본이라는 말. 자기 긍정성이 있어야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애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 세계와 교감을 나누지, 결코 외부상황에 지배되지 않고, 왜곡된 죄의식이나 솔직하지 못한 합리화, 자기 변명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자기 신뢰가 있어야 다른 이들의 비판 앞에서도 인내하면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남의 기준에 맞춰 살면서 좋은 사람 소리 들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그림자 투사를 하지 말라고 한다. 갈등은 우리 무의식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사실은 그 사람 안에 나의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그 그림자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내가 나로서 행동하지 못하고 우리 안의 그림자가 주체가 되어서 행동한다면 우린 예민해진다. 내 안의 그림자가 나를 통제해버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의식의 빛을 그 그림자에 비춰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더 하여 화, 갈등과 관련한 조언도 있다. 예수님께서도 화를 내셨다. 심하게 꾸짖기도 하셨고, 성전 앞의 환전상들의 물건을 뒤집어 엎어버리시기까지 했다. 이때 우리는 나의 부정적 감정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화가 난다고 해도 그 화가 바로 나 자신은 아니다. 이걸 떼어 놓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감정과 나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면 휘말린다.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부분에 나를 전부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는 여유가 필요하다. 떼어놓는 여유. 매 상황마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반응하면 평화를 잃는다. 하지만 선택하면 다르다.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이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필요한 훈련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유인을 다시 생각한다. 원효 같은 무애인. 그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그 내면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 하느님 품 안에 고요히 머무는 것, 그것을 통해 만들어져 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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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화 비밀 - 개정판 생각나무 ART 1
모니카 봄 두첸 지음, 김현우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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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각 없이 구입했다. 할 짓 없이 알라딘 헤메다가 50% 할인 가격이라는 말에 혹해서, 그리고 예술과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으로서의 콤플렉스 때문에, 그런 지적 허영을 채우고 싶어서 구입했다.

근데 확실히, 뭐는 뭐만 먹고 살아야지 싶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다가 목 꺽어지는 줄 알았으니, 뱁새가 황새 쫓으려다 찢어진 가랭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서양미술사의 기념비적 걸작 8편의 비밀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래도 이 책 하나 읽으면 그 동네 이야기의 기본은 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하지만 즐겁기도 했다. 도판을 보는 것만을도 좋았다. 애당초 예술품을 이해할 만한 눈은 되지 못했으나, 그래도 줏어 들을 풍월은 있었으니까. 저자의 관점은 이렇다. 우선 작가의 개인사, 중요하다. 다음엔 시대적 배경. 역시 중요하다. 시대를 뛰어넘는 결과물은 없으니까. 그다음 예술사조. 역시 그 흐름과 흐름을 뛰어넘는 긴장 속에서 명품은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삶 역시, 그 뛰어넘음을 고민해야 한다. 세상에 살되, 그리하여 세상을 반영하되, 그 세상을 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어림 없다. 헤맨다. 이 나이 들도록 방황이다. 불혹도 한참 넘긴 내가 이 꼴이다.

그냥 한 구절만 옮긴다. "화가는 진실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하고, 미술상은 예술의 중요성은 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비평가는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책임감을 느끼고 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감상자는 화가가 작품을 그릴 때 기울이는 노력과 집중력에 버금가는 자세로 예술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자세로 감상했다면 나 역시 지금쯤 뭔가 했을 것이다. 그냥 소풍가듯 부담없이 보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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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드 라이프 - 손으로 만드는 기쁨,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
윌리엄 코퍼스웨이트 지음, 이한중 옮김, 피터 포브스 사진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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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나는 남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게 아닌지

 

윌리엄코퍼스웨이트 지음, 피터 포브스 사진, <핸드 메이드 라이프>, 돌베개, 2004.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읽었다. 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는 걸 본 지는 제법 되었는데, 그땐 인연이 안 닿았다. 그러다가 책 광고에 다시 등장했길래 샀다. 아마 내가 요즘 목공을 배우고 있어서, '손으로 만드는 인생'이라는 제목이 더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정신을 모으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번역 책이라 그들의 문화와 많이 달라서인지, 책이 들어왔다가도 이내 멍 하니 정신 놓고 페이지를 넘겼다를 반복하면서 읽었다.
사진 작가가 따로 붙은 책에 대한 나의 편견인지는 몰라도, 이런 책은 간혹 내용보다 책 편집의 화려함으로 승부를 거는 경우가 있다. 이번 책도 혹 그런 게 아닌가 자꾸 의심을 하긴 했다.

저자의 중요한 메시지는 소박한 삶, 그리고 자본을 초월한 삶이긴 한데, 저자는 세계 곳곳에 여행을 하고 다녔다.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소박한 생태주의는 미국의 경우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건가 이런 생각도 하면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주된 메시지를 놓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암튼 그가 소박하게 지었다는 집도 내 눈에는 호화 주택 같아 보였다.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의 주택인 '유르트'를 닮게 지었다고는 하는데, 진정 유르트의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약간은 속은 듯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메시지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새겨서 들으면 다 내게는 약이 되는 말이다. 저자가 하는 말의 핵심은 이런 것 같다. 주체적 인생이라야 한다. 여기서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자본 넘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간다나는 의미다. 좋은 말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자본의 시키는대로 산다. 그리고 자본이 조장한 사회 분위기에 취해 산다. 그건 본시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시간을 남의 것을 대신 즐기며 산다. 누군가의 연극을, 야구 시합을, 성생활을, 모험을 보면서 지내거나 남의 음악을 들으며 지낸다. 남이 대신 하는 게임만 보지 말고 장작을 패는, 아니면 꽃나무를 심는 진짜 게임을 하거나 저녁에 먹을 돼지를 잡아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한다.
이제 곧 시작되는 월드컵,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의 인생을 산다. 주체성이 약한 인간일수록 더욱 그렇다.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어 산다면 휴가니 여가니 하는 게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일부를 내다 파는 것이 당연시되어버린 사회에서 어른이 된 후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를 이끌어줄 인생의 모델이 중요한 것이다. 일과 놀이가 하나가 되는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은퇴를 경멸하는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휴가나 여가나 취미 같은 단어가 '강요된 일'이라는 사회적 병리 때문에 생겨난 오염된 것이라는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라며 진정 주인된 삶을 말한다. 사실 나 역시 강요된 일, 내 자신을 내어다 파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 그러니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휴식을 원한다. 그러나 진정 내가 하고픈 일에 매달린다면 그게 필요 없다는 것이다.

너무 원칙적인 말이라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그 본의만은 정당하다. 우리 삶의 근본 목적이 나를 파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약간만 나를 팔아야 한다. 그게 참된 삶이다. 간디의 말대로 밥벌이의 노동만 하면 되는 것이다. 스코트 니어링은 하루 4시간, 간디는 하루 2시간 노동이면 밥벌이를 위한 노동으로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 이외의 것은 참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쓰라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이 변해야 한다. 가치의 변화다. "풍족에 대한 갈망이 클수록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자칫 상당히 위험한 듯한 발언을 읽는다.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이야기인데, 그걸 오늘 나는 일정 부분 수용하기로 했다. "부자의 부를 고르게 나눈다고한들 큰 의미는 없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예전에 당연히 사회구조 변화, 즉 부의 적정한 분배를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지금 역시 그런 생각이 변한 건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 사회가 밝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하게 되면 그것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대목이다. "부자들이 끼치는 해악 중 가장 큰 게 남들의 모방 욕구를 부추긴다른 점"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부자들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함정에 빠져 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자들의 삶을 닮으려고 한다면 부를 균등 분배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더 허기질 뿐인 것이다. 이건 주변에서 많이 본다. 10년 전보다 소득이 늘었다. 왠만 하면 자가용을 다 굴린다. 그러다 10년 전보다 더 허겁지겁 뛰어다닌다. 이게 행복인가? 아니다. 부자를 닮아가려고 해선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남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있어서 주체를 잘 추스리는 게 중요하다. 타인 즉 부자를 닮으려고 할 게 아니라, 자본을 닮으려고 할 게 아니라, 밥벌이 노동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게 행복이다. 

나의 경우 교사다. "가르치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면 이는 명백히 자기 몸을 파는 행위다. 그러면 달리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즐거움 때문이라야 한다. 둘째는 가르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역할 때문일 것이다. 셋째는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가르치는 사람 또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라야 한다. 내가 몸을 파는 건 한정되야 한다. 밥벌이 이상이어선 안 된다. 예전에 대학원 수업 때, 교수가 프로젝트 참여를 권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엔 문제가 있는 프로젝트였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창녀짓 하는 건 제주공고에서면 족하다. 그 이외의 곳에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 아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고수해야할 삶의 자세다.

그것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부다. 남을 풍요롭게 해주는 부, 남을 이롭게 해 줄 수 있는 부, 남에게 퍼줄수록 더 커지는 식의 독특하고 놀라운 부"인 것이다. 이제는 "끊임없는 경쟁으로 가장 적합한 개체가 생존할 수 있었다는 다윈의 생각보다 상호 협동을 함으로써 가장 적합한 군집이 생존할 수 있었고 결국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 전반적으로 우세하다"는 커크패트릭 세일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볼 때다. 경쟁은 결국 충돌을 낳는다.

다시 간디를 떠올린다. "밥벌이 노동, 탈중심화, 자발적 가난, 비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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