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메이드 라이프 - 손으로 만드는 기쁨,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
윌리엄 코퍼스웨이트 지음, 이한중 옮김, 피터 포브스 사진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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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나는 남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게 아닌지

 

윌리엄코퍼스웨이트 지음, 피터 포브스 사진, <핸드 메이드 라이프>, 돌베개, 2004.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읽었다. 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는 걸 본 지는 제법 되었는데, 그땐 인연이 안 닿았다. 그러다가 책 광고에 다시 등장했길래 샀다. 아마 내가 요즘 목공을 배우고 있어서, '손으로 만드는 인생'이라는 제목이 더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정신을 모으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번역 책이라 그들의 문화와 많이 달라서인지, 책이 들어왔다가도 이내 멍 하니 정신 놓고 페이지를 넘겼다를 반복하면서 읽었다.
사진 작가가 따로 붙은 책에 대한 나의 편견인지는 몰라도, 이런 책은 간혹 내용보다 책 편집의 화려함으로 승부를 거는 경우가 있다. 이번 책도 혹 그런 게 아닌가 자꾸 의심을 하긴 했다.

저자의 중요한 메시지는 소박한 삶, 그리고 자본을 초월한 삶이긴 한데, 저자는 세계 곳곳에 여행을 하고 다녔다.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소박한 생태주의는 미국의 경우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건가 이런 생각도 하면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주된 메시지를 놓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암튼 그가 소박하게 지었다는 집도 내 눈에는 호화 주택 같아 보였다.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의 주택인 '유르트'를 닮게 지었다고는 하는데, 진정 유르트의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약간은 속은 듯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메시지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새겨서 들으면 다 내게는 약이 되는 말이다. 저자가 하는 말의 핵심은 이런 것 같다. 주체적 인생이라야 한다. 여기서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자본 넘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간다나는 의미다. 좋은 말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자본의 시키는대로 산다. 그리고 자본이 조장한 사회 분위기에 취해 산다. 그건 본시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시간을 남의 것을 대신 즐기며 산다. 누군가의 연극을, 야구 시합을, 성생활을, 모험을 보면서 지내거나 남의 음악을 들으며 지낸다. 남이 대신 하는 게임만 보지 말고 장작을 패는, 아니면 꽃나무를 심는 진짜 게임을 하거나 저녁에 먹을 돼지를 잡아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한다.
이제 곧 시작되는 월드컵,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의 인생을 산다. 주체성이 약한 인간일수록 더욱 그렇다.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어 산다면 휴가니 여가니 하는 게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일부를 내다 파는 것이 당연시되어버린 사회에서 어른이 된 후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를 이끌어줄 인생의 모델이 중요한 것이다. 일과 놀이가 하나가 되는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은퇴를 경멸하는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휴가나 여가나 취미 같은 단어가 '강요된 일'이라는 사회적 병리 때문에 생겨난 오염된 것이라는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라며 진정 주인된 삶을 말한다. 사실 나 역시 강요된 일, 내 자신을 내어다 파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 그러니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휴식을 원한다. 그러나 진정 내가 하고픈 일에 매달린다면 그게 필요 없다는 것이다.

너무 원칙적인 말이라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그 본의만은 정당하다. 우리 삶의 근본 목적이 나를 파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약간만 나를 팔아야 한다. 그게 참된 삶이다. 간디의 말대로 밥벌이의 노동만 하면 되는 것이다. 스코트 니어링은 하루 4시간, 간디는 하루 2시간 노동이면 밥벌이를 위한 노동으로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 이외의 것은 참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쓰라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이 변해야 한다. 가치의 변화다. "풍족에 대한 갈망이 클수록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자칫 상당히 위험한 듯한 발언을 읽는다.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이야기인데, 그걸 오늘 나는 일정 부분 수용하기로 했다. "부자의 부를 고르게 나눈다고한들 큰 의미는 없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예전에 당연히 사회구조 변화, 즉 부의 적정한 분배를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지금 역시 그런 생각이 변한 건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 사회가 밝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하게 되면 그것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대목이다. "부자들이 끼치는 해악 중 가장 큰 게 남들의 모방 욕구를 부추긴다른 점"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부자들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함정에 빠져 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자들의 삶을 닮으려고 한다면 부를 균등 분배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더 허기질 뿐인 것이다. 이건 주변에서 많이 본다. 10년 전보다 소득이 늘었다. 왠만 하면 자가용을 다 굴린다. 그러다 10년 전보다 더 허겁지겁 뛰어다닌다. 이게 행복인가? 아니다. 부자를 닮아가려고 해선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남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있어서 주체를 잘 추스리는 게 중요하다. 타인 즉 부자를 닮으려고 할 게 아니라, 자본을 닮으려고 할 게 아니라, 밥벌이 노동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게 행복이다. 

나의 경우 교사다. "가르치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면 이는 명백히 자기 몸을 파는 행위다. 그러면 달리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즐거움 때문이라야 한다. 둘째는 가르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역할 때문일 것이다. 셋째는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가르치는 사람 또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라야 한다. 내가 몸을 파는 건 한정되야 한다. 밥벌이 이상이어선 안 된다. 예전에 대학원 수업 때, 교수가 프로젝트 참여를 권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엔 문제가 있는 프로젝트였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창녀짓 하는 건 제주공고에서면 족하다. 그 이외의 곳에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 아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고수해야할 삶의 자세다.

그것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부다. 남을 풍요롭게 해주는 부, 남을 이롭게 해 줄 수 있는 부, 남에게 퍼줄수록 더 커지는 식의 독특하고 놀라운 부"인 것이다. 이제는 "끊임없는 경쟁으로 가장 적합한 개체가 생존할 수 있었다는 다윈의 생각보다 상호 협동을 함으로써 가장 적합한 군집이 생존할 수 있었고 결국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 전반적으로 우세하다"는 커크패트릭 세일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볼 때다. 경쟁은 결국 충돌을 낳는다.

다시 간디를 떠올린다. "밥벌이 노동, 탈중심화, 자발적 가난, 비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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